145화 공개 진료 (5)
연구실로 찾아온 학생들은 모두 서명을 한 사람들이었다. 준의 교수 임용을 반대했던 그 청원서에 말이다.
하지만 준은 면접을 하는 내내 청원서에 왜 서명을 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반대로, 학생들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했다. 교수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의 공개 진료에 참여하려는 거니까.
말 그대로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였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긴장하며 준의 질문을 기다렸다. 어쩌면 비난이 쏟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반면 한껏 여유로웠던 준은 나란히 앉은 세 학생 중 가운데 학생을 지목하며 질문했다.
“자네는 왜 이번 공개 진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나?”
“아레스 각하의 완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뻔한 대답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새로운 약과 치료 방법에 대해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든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하나 기록을 남겼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특성을 파악했다.
단순히 공개 진료를 위해 면접을 진행하는 게 아니었다.
준은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우며 그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잠재력이 있는지에 대해.
준이 잠시 짬을 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도 이번 면접에 참여했다. 그녀는 진료 보조가 아니라 공동 주치의로 이름을 올렸다. 형식상으로는 준과 대등한 관계였다.
“아그네스 선생은 더 질문할 게 없나?”
“음. 글쎄요.”
아그네스는 펜 끝을 입에 물고 고민했다. 그러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표정이 환해졌다.
“여러분들은 왜 치유사가 되려고 하는 건가요? 한 분씩 대답해 주세요.”
준은 피식 웃었다. 아그네스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면접자 중 의학부 학생이 아닌 경우는 질문을 살짝 바꿨다. 왜 해당 학부에 입학하게 됐냐고. 아그네스는 능력보다는 열정과 비전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렇게 면접이 모두 끝났다.
결국 엔도버를 제외한 로열 클럽 멤버들은 면접에 참여하지 않았다. 브로콜린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아예 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로열 클럽의 멤버인 엔도버는 가장 먼저 면접을 신청했다. 그리고 합격점을 받았다.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고생은 무슨. 이제부터 시작이야. 거기에서 20명 추릴 수 있겠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면접만 100명 넘게 봤으니까요. 그래도 해 봐야죠.”
귀여운 제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의를 표했다.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준은 제자를 위해 잠시 서류를 내려놓았다.
“조금 쉬었다 하는 게 좋겠다.”
“앗. 예.”
그래도 아그네스는 메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꼼꼼함과 신중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거기까지 어떻게 터치를 할 순 없었다.
대신 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밖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준은 다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어린 제자는 힘들 법도 했는데, 표정으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문득 궁금증이 든 준이 물었다.
“면접관으로 참여해 본 소감이 어때?”
“소감이요? 처음엔 긴장됐는데 막상 하다 보니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많은 학생들하고 이야기할 기회는 흔치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리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를 들었을 때 좀 놀랐어요. 생각보다 공부하고 싶어서 들어온 분들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교육의 기회는 공평하지 않으니까.”
아그네스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좀 아쉬워요. 어딘가 잘 찾아보면 저처럼 치유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저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직도 누아 마을 뒷산에서 약초나 캐고 있었을걸요?”
“그럴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내가 여기에 온 거야. 가능하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구나.”
아그네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선생님은 이유 없이 움직이는 분이 아니니까요.”
“잘 아는군. 하긴. 이젠 슬슬 나에 대해 알 때도 됐지. 함께 한 시간이 적지 않으니.”
“그러게요. 시간 참 빨라요. 선생님께 살인자 소리를 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은근 뒤끝이 있었구나.”
“뒤끝이 아니라 추억이에요.”
아그네스는 볼을 살짝 붉히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하늘의 노을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네요. 곧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이겠는데요?”
“서두르자. 늦게 가면 하룬 녀석이 투덜거릴 테니까.”
“넵!”
준과 아그네스는 공개 진료에 참여할 학생들을 추렸다. 대부분 합격자가 일치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 선발했다.
모든 정리가 끝났다.
아그네스를 최종 선발된 학생들의 리스트와 출신 학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의학부가 아닌 다른 학부 학생들이 많이 뽑혔네요. 스무 명 중에 다섯 명이 다른 학부 출신이에요.”
“좋은 현상이다.”
“왜요?”
“모든 학문은 서로 연결점이 있어. 겉으로는 전혀 달라 보일지라도. 이번 공개 진료도 마찬가지야. 다른 학부 학생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해 결과를 낼 거다. 예를 들어 공학을 전공하는 친구는 새로운 진료 도구를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그렇게 될 거야.”
잠시 후, 약속한 시각이 되자 조교 브로콜린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그답지 않게 준과 아그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저…… 합격자 선발은 끝났습니까?”
“그래. 지금 막 끝났다. 첫 진료는 사흘 뒤 오전이다. 합격자들에게 공지해 주도록.”
“아카데미에 모여서 가는 게 좋겠죠?”
“편한 대로 해.”
준이 확정 명단을 브로콜린에게 건넸다.
브로콜린은 긴장된 눈으로 리스트를 살폈다. 곧 표정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뽑아 주셔서 감사하네요.”
“우와. 전혀 감사하지 않은 태도인 것 같은데요?”
아그네스가 농담조로 지적하자 브로콜린이 정색했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전 감사하다는 말 자체를 잘 안 한다고요. 그러니까 진짜 감사한 겁니다.”
“앞으로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감사하다는 말.”
“왜죠?”
“준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으니까요. 배울 게 정말 많을 거예요.”
“그건 의학부 학생 한정 아닙니까?”
“그럴까요? 아닐 거 같은데. 공부와는 전혀 관계없는 못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도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묘한 여운을 남긴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준에게 말했다.
“일 끝나셨으면 이제 슬슬 돌아가요. 저녁 먹어야죠.”
“그 못난 친구 밥 굶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
“농담이다.”
싸늘히 식었던 아그네스의 표정이 다시 상냥하게 돌아왔다. 준은 농담도 가려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오늘 고생했으니 특별히 맛있는 걸 먹도록 하지.”
“야호!”
“부럽네요. 귀족 라이프.”
브로콜린이 투덜거렸고, 자리에서 일어선 준이 브로콜린에게 제안했다.
“괜찮으면 자네도 같이 가지.”
“아닙니다. 남은 일 정리해야죠. 학생들한테도 공지해야 하고…….”
“난 두 번 권하지 않아.”
브로콜린이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구실 문을 열고 앞장섰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 가시죠. 근데 아그네스 선생님. 오늘 저녁 메뉴는 뭡니까?”
“메뉴요?”
아그네스는 대답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 * *
첫 공개 진료일이 밝았다.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이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갔다. 요리사들은 따뜻한 음식을 준비했고, 하녀들은 저택을 깨끗이 청소했다.
하룬은 기사와 병사들을 도열시키고 호위 작전을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대오가 어긋나거나 허접해 보이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니까.
폴링과 릴리도 준이 왕진을 나갈 준비를 도왔다.
말 그대로 저택의 모든 사람이 공개 진료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하룬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준의 집무실이 아닌 아그네스의 거처였다. 그녀는 세안을 마치고 치유사복으로 환복 중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근처도 올 수 없지만, 하룬은 괜찮았다. 그는 문 한쪽에서 얼쩡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그냥 왕도에 오더니 아주 팔자가 피셨어. 엉? 공작 각하의 주치의가 되고 말이지.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뒷산에서 풀이나 뜯고 있었는데.”
“부러우면 부럽다고 얘기해. 뭐하러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니?”
“쳇.”
그녀의 일침에 하녀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하룬은 입을 씰룩였지만, 아그네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왕립 병원의 치유사복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그걸 입으니 아그네스는 루치아보다 더욱 눈부셔 보였다. 적어도 하룬의 눈에는.
“흠흠. 일은 좀…… 어때?”
“정신없어. 환자는 환자대로 선생들은 선생대로. 적응하는 데만 일 년은 걸리겠다. 아! 머리핀은 안 할 거예요. 마나 요법 때 방해가 될 수 있어서.”
“죄송합니다.”
하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머리핀을 제거했다. 아그네스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치유사 일도 힘들어 보이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넌 편해서 좋겠다. 저택만 지키면 되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저택 지키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남?”
“루치아 선생님이나 마리한테선 소식 없었어?”
“뭐, 아직까지는.”
환복을 모두 마친 아그네스가 손가방을 받아들고 방을 나섰다. 하룬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서로 바쁘다 보니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왠지 서먹해진 것 같아 하룬은 꽤 애를 썼다.
말도 걸어보고 옆으로도 붙어 보고.
복도를 걷다 우뚝 멈춰 선 아그네스가 홱 돌아섰다. 그리고 하룬을 쏘아보았다.
“너 오늘 왜 그래?”
“뭐가?”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왠지 어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무슨 강아지 같은 소리야? 갈 길이나 가셔.”
아그네스가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다 하룬의 손에 시선이 스쳤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못 보던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그네스가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하룬의 손을 잡았다.
“다쳤니?”
“아얏! 살살 좀 만져. 대련하다가 살짝 베었는데, 뭐 괜찮아. 응급처치 키트도 썼으니 금방 나을 거다.”
아그네스는 손을 떼지 않았다.
금방 나을 상처인데 이렇게 통증이 느껴졌다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였다.
아그네스는 즉시 붕대를 풀었다.
세로로 베인 상처가 시뻘겋게 부어 있고, 고름이 차 있었다. 누가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치료가 잘못됐어. 염증이 도진 것 같아. 고름도 가득하고.”
“에헤이. 괜찮으니 나중에 갔다 와서 봐 주든가. 위대하신 공작 각하께서 널 기다리고 있는데.”
“알 게 뭐야. 친구 아픈 거 보살펴 주지도 못하는 치유사는 자격도 없어.”
아그네스는 하룬을 앉힌 다음 마나를 일으켰다.
고름이 빠져나가며 부었던 상처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효과는 빠르고 확실했다. 잠시 후 하룬의 상처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하룬의 손을 어루만진 아그네스가 한마디 했다.
“응급처치 키트 다른 사람이 써 줬지?”
“맞아.”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어. 잘못 사용해서 상처가 덧난 것 같아. 내가 조만간 시간을 내볼게.”
“괜찮겠어? 바쁘잖아.”
“잠 한 시간 줄이면 돼.”
아그네스는 다시 가방을 들고 재빨리 복도를 걸었다. 하룬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저 뒷모습을 바라보며 치료받은 손을 어루만졌다.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멋있기까지 하네.”
하룬은 해맑게 웃었다.
* * *
수많은 마차가 알프하이겐 가문으로 모여들었고, 공개 강의 참여자로 선정된 학생들이 하나둘 마차에서 내렸다.
준은 가장 먼저 도착해 학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환자의 막내아들인 엔도버가 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모여서 뭔가를 해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로열 클럽 회원들이 참여하지 않는 이상, 자네의 역할이 클 거야.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그럼요. 맡겨 주십시오. 놈들은 우리를 버렸다고 말하겠지만, 버림받는 건 그놈들일 겁니다.”
엔도버는 이제 로열 클럽에 대한 명백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의학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집사의 알림이 도착했다.
“슬슬 출발하지.”
두 주치의와 왕립 아카데미에서 선발된 실습 인원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위풍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