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공개 진료 (4)
두 사람은 저택 한쪽에 마련된 진료실 겸 연구실에 도착했다. 폴링과 릴리가 늘 신경을 쓰기에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준은 여러 플라스크 중 하나를 집어 아그네스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그 신약인가요?”
“그래. 널리 사용되는 항암제를 개량한 약물이다.”
“엄청 써 보이는데.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네가 사탕이라도 하나 드리지 그래? 요즘 열심히 사 먹고 있는 것 같던데.”
아그네스는 부끄럽게 웃었다.
왕도에 오고 일정한 수입이 생기자, 그녀는 아낌없이 군것질에 투자 중이었다.
하룬은 살이 찔 거라며 잔소리를 잔뜩 하고 있지만, 준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적당한 식욕은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되니까.
“한번 살펴봐. 냄새도 맡아 보고. 독성이 있긴 하지만 조금은 먹어도 상관없다.”
“알겠어요.”
준은 아그네스가 약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플라스크를 건넸다.
자리에 앉은 아그네스는 두 눈을 반짝이며 약을 살폈다.
플라스크 안에 든 약물은 탁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굉장히 써 보였다.
아그네스는 유리로 된 샬레(Schale)에 약물을 떨어트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장면을 보며 준의 머릿속으로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 아직 현미경은 없는 것 같던데. 간단한 거라도 한번 만들어 볼까?’
그 작은 도구는 이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아직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광학에 마법공학을 접목시킨다면 고배율의 현미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될 때 한번 제작해 봐야겠어. 페르디낭 각하가 보면 좋아하시겠군.’
준은 언젠가 꺼낼 패를 머릿속에 잘 간직한 다음, 다시 아그네스를 살폈다. 그녀는 다양한 실험 도구로 약물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참 후 아그네스가 도구를 내려놓고 몸을 풀었다.
“다 봤어요.”
“어때?”
“맛을 좀 보고 향도 맡아 봤는데, 대부분 제가 아는 약초인 것 같던데요? 어떤 약으로 개량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추가한 건 딱 하나뿐이야.”
“정말요?”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치유사라면 약의 맛과 향으로 어떤 약초가 들어가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아그네스는 우수한 치유사였고, 준이 만든 신약의 성분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런데 약초 하나를 추가했을 뿐인데 신약이라고 부를 정도의 효과가 난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떤 약초가 들어갔어요?”
“금장미.”
“금장미라면……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공작 각하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네요.”
준은 웃으며 말을 바꿨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약초를 넣고 뭔가 다른 방법으로 조합하면 약의 효과를 높일 수 있지.”
“맞아요.”
“하지만 보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아그네스가 귀를 활짝 열었다. 준의 가르침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잠시 기다려.”
준은 진료실 한쪽에 달린 문을 열었다.
그곳은 창고였다. 약초와 의료도구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다. 준은 그곳에서 약초를 한 다발 안고 밖으로 나왔다.
실험대에 약초를 늘어놓았다.
약초가 실로 다양했다. 중병을 다루는 약인 만큼 들어가는 약초가 정말 많았다.
“어?”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그네스가 살짝 놀랐다.
준은 처음부터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과연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는지.
“뭔가 이상해요. 평소에 봐 오던 약초들인데…….”
아그네스는 약초를 하나씩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이 느끼던 이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이 약초들, 굉장히 신선하네요! 마치 땅속에서 계속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은 신선함이 느껴져요.”
“정답. 그 약초들엔 최상급 보존 마법이 걸려 있지.”
“최상급이요?”
“단순히 상태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작물에 영양분을 공급해 자생하게 만들어 준다. 말 그대로 약초를 통째로 퍼온 것과 다를 바 없지.”
“확실히 이렇게 신선한 약초로 약을 만든다면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아요.”
아그네스는 눈을 반짝이며 약초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마치 약초학 전공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약초들은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요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요리요?”
전혀 뜻밖의 말에 아그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팔짱을 끼며 준이 말했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신선함에 차이가 있다면 맛이 극명히 갈리지. 영양도 마찬가지고. 약초도 그렇다. 잘 소화시키고 흡수가 되게 하려면 약초의 상태가 좋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잖아요.”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네요. 최상급 보존 마법이라면…….”
상급 치유사들이 전개할 수 있는 마법은 중급 보존 마법일 것이다. 상급도 아닌 최상급은 책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누아 마을에서 처음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준은 엄청난 기적을 보여 주었다. 이것도 큰 그림 중 일부에 불과했다.
“결국, 선생님의 뛰어난 능력이 좋은 약을 만들어 낸 거네요.”
“아직 끝이 아니야. 약을 조합하고 달여야 하니 정성도 필요하겠지.”
준은 신뢰를 담은 눈으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정성만큼은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아그네스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연구실에 출근한 준은 평소와는 다른 공기를 느꼈다. 느긋한 차향이 연구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향이 좋군. 드디어 비품이 왔나?”
“예. 오자마자 개시했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오셨네요.”
“나야 늘 이 시간에 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일 분도 안 늦으시고 매번 같은 시간에 오시니까.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을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다고 편리하다고 하더군요.”
준은 씨익 웃었다. 그걸 보며 조교 브로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으세요?”
“남에게 도움이 되는 건 좋은 일이지.”
“하기야. 교수님은 낙천주의자시니까요. 차 드릴까요?”
“오늘은 일찍 물어보는군. 한 잔 부탁해.”
브로콜린은 차를 잔에 따라 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준은 여유롭게 기대어 앉아 차를 음미했다. 고급 차는 아니었지만 마실 만했다.
브로콜린이 할 말이 있는 듯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레스 공작님 진료는 어떻게 됐습니까? 왕진 가신다고 했잖아요.”
“환자의 용태를 떠벌리고 다니는 치유사도 있던가?”
“아뇨.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경각심을 가지도록 해. 자네가 자연과학부 학생이라곤 해도 여기는 의학부 교수 연구실이니.”
“알겠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저야 어차피 치유사를 할 것도 아니니까요. 고등 아카데미로 진학해 더 연구를 할 겁니다.”
“고등 아카데미라. 가세가 더욱 기울겠군.”
“하하하. 어떻게든 해 봐야죠. 장학금도 노려보고. 조교도 계속해야죠.”
준은 차향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콜린의 학구열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연구 활동에 적합했다. 고등 아카데미에 진학한다면 분명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고등 아카데미 진학할 때 추천서가 필요하다면 이야기해.”
“진심이십니까?”
“자네라면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당장 내일 연구실이 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청원서도 그렇고.”
“그땐 내가 다른 분들에게 부탁해서라도 받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면, 청원서는 조만간 휴짓조각이 될 거다.”
“그게 정말입니까?”
어느새 브로콜린은 준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준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작 각하의 치료를 내가 맡기로 했다.”
“아하! 그러니까 실력으로 교수 자격을 입증하시려는 거군요.”
“그렇지.”
“그런데 그걸로 청원서가 무효로 돌아갈까요? 뭔가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거 같은데…….”
“그래서 큰 걸 하나 준비했다. 공개 진료. 그걸로 학생들의 마음을 돌릴 생각이야.”
“헉!”
그렇게 침착하고 냉정하던 브로콜린도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준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왕립 아카데미 학생들을 데리고 공개 진료를 할 거야. 학생들은 실습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고. 신약과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할 계획이다. 아마 지원자들이 줄을 서겠지.”
“오!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무엇보다 때가 절묘하네요. 안 그래도 요즘 의학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들었거든요.”
“어수선하다니?”
“로열 클럽의 일원이었던 엔도버가 켈빈에게 주먹으로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더라고요.”
“그래?”
그제야 준은 엔도버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알프하이겐 가문의 저택에서 만났을 때, 그는 멍든 상처를 전략적인 무기로 사용한다고 했었다.
‘맞았다는 소문을 직접 흘리고 다니는 건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학내 폭력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엔도버는 다른 학생들의 동정표를 살 가능성이 커졌다.
일이 커지면 징계위원회가 열릴 수도 있는 일.
물론 켈빈이 징계를 받는 일은 없겠지만 로열 클럽의 균열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이라면 공개 진료에 참여할 학생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최대한 많은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겠지. 아카데미 게시판에 공지를 게시해. 20명에게 공개 진료 참여 기회를 주겠다고. 학년에 관계 없이.”
“선착순입니까?”
“면접을 볼 거다. 내가 학생을 직접 선발하지.”
“20명이면 경쟁이 치열할지도 모르겠네요. 의학부 학생들이 꽤 많으니까. 80명 넘지 않아요?”
“다른 학부 학생들도 참관이 가능해. 조건만 충족된다면.”
“진짜요?”
준은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어서 준비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브로콜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도 지원해도 되나요?”
“가십거리를 위해서인가? 그런 거라면 미리 사절하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요즘 치유사들이 도구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전 공학에 관심이 많은데, 진료 과정을 보면 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 흐음. 그럼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 단서조항은 브로콜린을 위해서였다. 준은 그의 천재적인 발상이 의학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대자보를 쓰고 총학생회에도 알리겠습니다. 대자보를 잘 안 보는 학생들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해.”
브로콜린이 즉시 대자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유려한 필체의 모집 공고가 완성되었고, 그것은 아카데미 광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게시되었다.
아레스 공작과 관련된 일인 만큼 아카데미 총학생회에서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모집 공고가 담긴 서신을 모든 학생들의 저택과 기숙사에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준이 아레스 공작을 진료하게 되었고, 신약 및 새로운 치료 방법의 실습 기회가 제공될 거라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의학부 학생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인 건 바로 그때였다.
교수 임명을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을 한 학생들이 하나둘 준의 연구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