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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43화 (143/175)

143화 공개 진료 (3)

공작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준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뒷짐을 진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인과 자녀들은 물론, 일가친척들이 모두 몰려온 것 같았다. 그중엔 치유사복을 입은 남자도 서 있었다.

그들은 한껏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준은 회의적이었다.

인간만큼 양면성을 가진 존재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자들이야. 방해가 될 게 분명한데. 차라리 없는 게 좋겠어.’

잠시 뜸을 들이던 준이 입을 열었다.

“각하. 잠시 주변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아그네스 선생을 제외하고요.”

“그건 안 되오.”

나선 것은 수호기사 미놀렌이 아닌, 중년의 이름 모를 사내였다. 복식을 보건대 가문에서 꽤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 같았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대의 신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오. 가주님께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저는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채용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소만.”

중년은 고집스럽게 준을 바라보았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아레스 공작은 왕국의 대신. 만약 준이 적국의 자객이라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준은 아쉬울 게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환경이 이러니 최선을 다할 순 없겠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지금 가주님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거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준은 묵묵히 고개를 돌려 중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그쳤다.

“가주님은 왕국의 군무대신으로 왕국의 안위를 돌보는 사람이오! 당신의 모든 의료행위는 적합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어야 할 것이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뭣이?”

준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저는 왕국의 군무대신을 진료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레스 데 알프하이겐이라는 환자의 진료를 하고 있는 거지요. 목숨이 걸린 일에 직책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무엄하군!”

“그만두게.”

아레스 공작이 나섰다.

그는 인상을 굳힌 채 손짓으로 모두 물러가라 명했다. 가문 사람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가지 않고 버티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레스 공작의 주치의인 사내.

그가 허리를 굽혔다.

“저라도 남겠습니다. 각하.”

“자네가 남아서 무엇 하겠는가. 내 병을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죄를 묻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게.”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준의 뜻대로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비웠다. 아레스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자, 어떤가. 자네의 요구대로 모두를 내보냈네. 이제 할 말을 해 보시게나. 혹시 완치시킬 방법이 가문 사람들의 반감을 살 만큼 위험한 겐가?”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소란을 벌일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군요.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운이 따른다면 모를까. 완치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겐가?”

“암이라는 질병은 완치 판정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치유사들도 완전관해(完全寬解)라는 용어를 쓰지요. 실제로 지금은 암이 주요 장기에 퍼져 있는 상황이라 모두 제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 사람들은 왜 내보낸 건가?”

“저의 치료법이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할 테고, 공작 각하께서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우시겠죠.”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침음을 흘리던 공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고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한편, 아그네스는 준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전신에 퍼진 암을 다스린다는 걸까? 왕립 병원에서 일하며 몇 명의 암 환자를 보긴 했지만, 완전관해에 이르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약초 하나.

암영초.

그거라면 완치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그네스는 쉽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준이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판정했고, 다른 방법을 이야기한다는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카누 씨를 치료할 때 암영초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말라는 당부를 듣기도 했고.

그래서 아그네스는 얌전히 듣기만 했다.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은 방법이라면 굉장히 위험한 게 분명할 터인데.”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뒤따르는 고통도 다른 약물에 비해 적을 거고요.”

“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군.”

“암은 증식과 전이를 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암의 크기를 줄이고, 그것을 유지시킬 수만 있다면 평소처럼 생활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각하의 얼굴에 흑색종이 생기고 나서도 생활에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보존적 치료를 하겠다는 거로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공작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완치를 기대하고 준을 불렀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고, 그는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항암제를 개량해서 신약을 만들 생각입니다. 마침 관련 연구를 하고 있던 터라, 아그네스 선생이 도와준다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신약이라면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마나를 일으켰다. 신성한 빛이 찬란히 빛났다.

“치료에 마나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마나 요법은 암에 효과가 없지 않나?”

“맞습니다. 하지만 투여한 약을 암 조직에 정확히 도달하게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요. 다시 말해, 마나를 이용해 암 조직에 효과적으로 약물이 침투하게 할 계획입니다. 일종의 표적치료라고 할까요.”

아레스 공작은 애써 놀라움을 감췄다.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었지만, 마나 유저였던 그는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나를 운용하기 위해서 자연의 힘과 신체의 진기를 이용한다. 이를 통해 섭취한 약물을 통제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약을 먹으면 소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약효가 줄어들거나 정상적인 조직에 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준이 말한 방법이라면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최대한의 약효를 낼 수 있다.

“내가 완치를…… 아니지. 건강하게 여생을 마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나?”

“치료에는 늘 변수가 있기에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아비루나 왕국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평화로울 것입니다.”

“자네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할 줄 아는군.”

아비루나 왕국의 평화. 그 한마디가 공작의 고민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그가 어깨를 펴며 말했다.

“좋아. 자네의 치료 방법을 받아들이지. 가문 사람들에겐 내가 잘 설명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청이 있습니다.”

“이번엔 또 뭔가?”

“공개 진료를 하고 싶습니다.”

“뭐라?”

아레스 공작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 * *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준은 한가롭게 차창 밖을 관찰하고 있었고, 아그네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공개 진료는 지나친 게 아니었을까요? 아레스 각하께서 정말 화가 나신 것 같은데요.”

공개 진료를 하고 싶다는 준의 말에 아레스 공작은 버럭 화를 냈다. 병에 걸렸다는 걸 숨겨야 하는 것도 모자란 판에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준은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명분이 있는 일이야. 실리도 챙길 수 있고. 뭐, 판단은 각하께서 하실 일이겠지.”

“혹시 공개 진료를 거부하시면 치료를 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아니. 치료는 할 거다.”

아그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근 고집이 센 스승이었다.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넘어가지 않는 그런 사람.

“그럼 다행이구요. 그래도 괜한 말씀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괜한 말은 아니지. 각하께도 좋은 제안이 될 거야. 정말 왕국과 신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어째서요? 오히려 부끄럽지 않을까요? 학생들이 참관하는 진료라면…….”

공개 진료는 왕립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치료의 모든 과정을 공개하는 것으로, 의학부 학생들이 참관하여 실습을 하기도 한다.

준은 미소를 지었다.

“뒤집어서 생각해 봐. 왕국 의학의 발전을 위해 한 몸 희생한다. 그건 왕국을 수호하는 군무대신이라는 자리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상황이지.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위대한 성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일이고.”

“아!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중병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 내는 모습은 만인에게 귀감이 될 거야.”

“또 학생들은 귀중한 실습 경험을 하는 거고요. 이거 일석이조 아닌가요?”

준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사실 아레스 공작이 취할 명예와 찬사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 학생들에게 진귀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어수선한 분위기가 완전히 돌아설 것이다. 자신 쪽으로.

연줄과 정치적 공작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기가 교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자격을 실력으로 보여 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일석이조라는 표현은 정확했다.

잠시 후 마차가 엘누아르 가문에 도착했다. 하룬과 폴링이 마중을 나왔는데, 뒤따라 말을 탄 무리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준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알프하이겐 가문의 엔도버 공자와 미놀렌 경이었다. 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 각하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잘됐군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한 건 특별히 없습니다. 약이 만들어지는 대로 학생들과 함께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강이라도 기일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흘 내로 완성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엔도버 공자와 미놀렌 경이 다시 말을 돌렸다. 아그네스는 잘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또다시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신약을 사흘 내로 완성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까.”

“벌써요? 언제 그렇게 하셨어요? 전 눈치도 못 챘는데…….”

“카누 씨를 만난 이후로 틈틈이 만들었지.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아.”

아그네스의 눈에 존경심이 서렸다.

자신은 카누 씨가 완치됐을 때 그저 기쁘기만 했다. 죄책감을 내려놓았던 것도 있고, 오래도록 친하게 지낸 이웃이 건강을 되찾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그네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 신약,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 그런데 왜 갑자기 의욕이 넘쳐?”

“선생님한테 질 수는 없으니까요!”

“뭐?”

피식 웃은 준은 아그네스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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