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공개 진료 (2)
왕립 아카데미에서 출발한 마차가 순조롭게 알프하이겐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 안에서 준과 아그네스는 그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시점에서 아그네스가 궁금했던 것은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관련한 이야기였다.
“아카데미에서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수업 거부가 흔한 일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왠지 그건 빙산의 일각일 것 같은 느낌?”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사실 수업 거부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이 있지.”
“더 큰 일이요?”
준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그네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교수 임용을 반대하는 청원서가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와. 그동안 굉장한 일이 있었네요. 수강 철회에 청원서라니…… 상상도 못 했어요. 청원서는 단순히 수업 거부가 아니지 않아요?”
“뭐, 큰 맥락에서 본다면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지. 나에 대한 문제니까. 나아가서는 계급이라는 구조에 대한 문제기도 하고.”
“진즉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아그네스는 조금 서운한 모양이다. 큰 눈망울로 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하하. 얘기한다면 네가 도와줄 수 있어?”
준이 짓궂게 농담하자 아그네스가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아직 그럴 능력은 없지만요. 좀 더 노력해 볼게요. 선생님의 심신의 안정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보니까 왕립 병원에는 멘탈 케어 분야도 있더라고요.”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너무 많이는 하지 마세요. 가끔 견학하는 정도라서요.”
준이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그네스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자인 자신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경험을 이어 주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하세요. 만약 제가 아카데미에서 그런 대접을 받았더라면 정말 마음 아팠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았어.”
“정말요?”
“당연하지. 학생들을 위해 큰 결심을 하고 왔는데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뭔가 선생님은 늘 여유가 있으시니까…….”
성인군자 같아서요, 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준은 언제나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기를 바랐다. 성인군자는 너무 먼 거니까.
그 마음을 읽은 걸까.
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애제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봐요. 지금도 선생님 얼굴엔 여유가 한가득 있어요.”
“받아들이기 나름이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감정의 소모로 푸느냐. 아니면 성장의 밑거름으로 만드느냐. 종이 한 장 차이지.”
“저도 선생님처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하지만 잘 참고 자기 자신을 믿는다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노력은 쉽게 배신하지 않으니까.”
아그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준은 그녀에게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의도한 바였다.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그리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왕립 병원 생활도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왕립 병원에는 대부분 아카데미 출신의 의료진이 포진되어 있다. 그곳에서 듣도 보도 못한 누아라는 시골 마을에서 온 치유사가 온전히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다.
그나마 마나 유저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치유사로서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이야기가 더 많은 법이니까.
‘그래도 녀석이라면 잘 해낼 거야.’
준은 아그네스의 저력을 믿었다. 그녀가 가진 특유의 친화력도.
“어머, 선생님. 도착한 거 같아요! 정말 대단한 저택인데요?”
아그네스는 창밖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왕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크고 높은 건물을 보면 이렇게 흥분하곤 했다.
저택은 여전했다. 웅장하고, 저택을 지키는 병사와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준은 지금 공작의 상태가 어떤지가 궁금했다. 암이 전이되었다고 듣긴 했지만 어떤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결국은 암영초를 써야 완치시킬 가능성이 있는데…….’
준은 계속 고민을 거듭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물론 그것은 자신의 편의가 아닌, 환자가 처한 상황과 병의 예후에 대한 것이었다.
잠시 후 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좋아. 한번 그렇게 해 보는 게 좋겠군.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는데?’
치료계획을 모두 세운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마중을 나온 것은 집사가 아니라 막내 공자인 엔도버였다. 그는 예를 갖춰 준에게 인사했다.
“일찍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마중까지 나와 주다니 고맙군.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운명일까요?”
일전에 밖에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한 엔도버의 말을 농담조로 받은 것이다. 엔도버도 멋쩍게 웃으며 그때의 일을 반성했다.
그때, 준이 엔도버의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음? 여기 눈 옆에 난 멍은 뭔가?”
“이거요?”
엔도버는 씨익 웃으며 시퍼런 멍을 어루만졌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살다 보면 뭐 멍이 들 때도 있는 거죠.”
“입술도 살짝 터진 거 같고. 혹시 싸웠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교수님의 환자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치유사는 눈앞에 있는 환자를 지나치지 않는 법이지.”
준이 손을 뻗어 마나를 일으키려 하자, 엔도버가 뒤로 살짝 물러나 피했다. 마나를 이용하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상처인데도 그는 거부했다.
“이건 제 전략적인 무기입니다. 가능하면 오래 보존하고 싶군요. 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런가. 잘 알겠네.”
준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를 챘다. 아마도 로열 클럽 회원들과 물리적인 다툼이 있었던 거겠지.
켈빈이라면 충분히 주먹을 휘두를 만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냉정한 척을 하지만, 의외로 분노 조절이 어렵다는 걸 간파했으니까. 살롱에 찾아가서 로열 클럽 회원들을 만났을 때 이미 모두 파악한 일이다.
아무튼, 상처를 전략적인 무기로 사용한다는 말은 엔도버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로열 클럽의 내분이 시작된 것이다.
“자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원하지. 각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잠시 손님이 오셔서 접견 중이신데요. 곧 끝나실 테니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안내하지요.”
“고맙군.”
준과 아그네스는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아레스 공작이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녀들과 사무관들이 도열해 준에게 예를 취했다. 귀빈 대접을 받는 것이다.
준은 목적지로 가기 전에 아그네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바로 알프하이겐 가문 역대 가주의 인물화가 모여 있는 공간이었다. 그 웅장한 광경에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대단해요. 저택 안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역사와 전통을 기념하는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흑색종의 진단에 도움이 되었다. 바로 이 초상화에서.”
준은 아레스 공작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림으로 피부암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대단한 관찰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아그네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병의 단서는 환자의 주변에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안 돼.”
“알고 있어요. 환자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준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복도를 한참 걸은 두 사람은 저택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방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전체적으로 하얀 톤으로 꾸며져 있었고, 무척 청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긴 진료실인가?”
“치료나 요양 목적으로 사용되는 방입니다. 하루에 두 번 청소와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하네요.”
“훌륭하군.”
엔도버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의료 장비들이 다 갖춰져 있는 게 보였다. 준은 아그네스에게 도구 준비를 지시했다.
“일단 기본적인 진찰을 할 거야. 스캐너는 없으니 마나로 진단을 하지.”
“알겠습니다. 준비할게요.”
“엔도버 자네는 준비되는 대로 각하를 모셔오게.”
“예. 교수님.”
엔도버가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알프하이겐 가문의 유력 인사들이 인사차 방문했지만, 준은 그들과 길게 상대하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어 아레스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고생이 심했는지, 안색이 많이 초췌했다. 다부졌던 몸도 줄어들었고, 전체적으로 기력이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고집스러운 얼굴은 여전했다.
“그대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때 일은 사과함세.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지나간 일일 뿐이지요.”
공작은 준의 비판도 각오하고 있었다.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고 했었으니까. 준의 성격상 그때의 일을 들먹일 것 같았다.
지금 칼자루를 쥔 건 자신이 아니라 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준은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예의 있게 행동했다.
“대강의 이야기는 미놀렌 경께 들었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네. 수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몸이야. 이따위 병에 굴복할 수는 없지.”
“좋은 마음가짐이군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공작은 이미 편한 옷으로 환복한 상황이라 편히 침상에 누웠다.
하녀들이 커튼을 쳤고, 준이 손바닥에 마나를 흘려 진찰을 시작했다. 왕립 병원에서 진단한 대로 각 장기에 암이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준이 배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아그네스를 불렀다.
“췌장 쪽을 살펴봐. 전이 흔적이 있는지.”
“제가요?”
“그래.”
그때, 아레스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는 누구인가?”
“이번에 왕립 병원 치유사로 부임한 아그네스 선생입니다. 어린 나이에 실력이 아주 뛰어나죠. 각하의 치료를 도울 겁니다.”
“크흠.”
무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그네스는 조심스레 아레스 후작의 배를 눌렀다. 그리고 마나를 흘렸다.
쉽게 오지 않는 좋은 기회였다. 아그네스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췌장에 암이 전이되었는지 확인했다.
곧 진찰이 끝났다.
공작이 다시 옷매무새를 바로 하는 사이, 두 사제는 잠시 방에서 나와 의견을 나눴다.
“어땠어?”
“역시 스캐너를 써야 할 거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괜찮으니까 느낌을 말해 봐.”
“전이된 것 같진 않아요. 염증인 거 같아요.”
준은 아그네스의 어깨를 툭 쳤다.
“제대로 봤다. 그 느낌 잊지 마. 스캐너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생각보다 많으니까.”
“네!”
안으로 다시 들어온 준은 공작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진단 결과를 말했다.
“폐와 간에 전이 흔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췌장 쪽은 아직 암이 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왕립 병원의 진단이 맞는 셈이지요.”
“그래서. 완치할 수 있겠나?”
“현재 나와 있는 약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합니다.”
주변이 웅성거렸다. 특히 가문의 직계가족들은 동요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공작은 침착히 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당당한 걸 보니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군.”
“병을 다스릴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무엇인가?”
“각하께서 도와주신다면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공작은 잠시 고민했다. 준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그래. 좋아. 원하는 바를 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