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공개 진료 (1)
강의가 모두 끝난 살롱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통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주제가 모두 같았다.
정확히는 동일한 인물의 이름이 대화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엔도버가 강준 교수님 수업을 들었다면서?”
“나도 그 얘기 들었어. 그냥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문이 아닌가 봐?”
“뭐야? 그게 무슨 소리? 나는 처음 듣는데.”
이제 막 자리에 앉은 학생이 깜짝 놀랐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학생이 주변을 한번 살펴보았다.
“애들 자리에 없으니까 빨리 말해!”
다행히 지금 모인 학생들은 로열 클럽에 반감을 가진 학생들이었다.
“아니. 그게. 아까 수업과에 갔다가 우연히 들었거든. 수업도 듣고 수강 신청도 다시 했다던데?”
“그게 말이 돼? 엔도버는 로열 클럽 핵심 멤버잖아.”
“나도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물어봤다고. 직원이 진짜라는데 헛소문은 아니겠지.”
“설마 청원서에 서명한 것도 철회한 거 아니야?”
그 한마디에 좌중이 술렁였다.
수강 철회 건은 몰라도, 청원서에 서명을 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학생들이 교수와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발을 뺐다?
분명 뭔가 변수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혹시 로열 클럽 애들이 우리 단체로 유급시키려고 계략을 짠 건 아니겠지?”
“야,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지.”
“엔도버가 서명까지 철회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정식 절차가 아니니까. 청원서를 받은 학장님만 알고 계시겠지.”
“아니면 엔도버 본인이거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궁금증이 풀리진 않았다.
“아!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없고 궁금해 미치겠네.”
“우린 이제 그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
“글쎄…….”
가능하면 강의에 참여하지 말라는 압박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로열 클럽의 일원인 엔도버가 강의에 참여했다.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사실 여기에 모인 모든 학생들은 준의 강의를 듣고 싶었다.
몇몇 학생은 준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제도권에서 활약한 치유사가 아니라, 변방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치유사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배울 게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계질서가 분명한 의학부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다들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깊은 아쉬움을 남긴 채로.
“혹시 강준 교수님 조교가 누군지 아는 사람?”
“브로콜린 선배라고 들었는데.”
“친한 사람 있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난감하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혹시 건너서라도 아는 사람 없어?”
“그 선배, 학부 생활 안 하기로 유명하잖아. 로열 클럽 멤버들도 싫어하고. 입학 때부터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고 하더라.”
“쯧. 하필 그 선배가 조교가 되냐.”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들어온 학생은 다름 아닌 엔도버였다.
오랜만에 책을 들고 있던 그는 학생들을 슥 훑어보더니 한쪽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나 보네. 재밌냐?”
“아니, 그게…….”
“하긴. 소문이 안 퍼질 리가 없겠지. 수강 철회한 거 때문에 그래?”
학생들이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피식 웃은 엔도버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아버지가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데 더 이상 교수님께 밉보이면 안 되니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고.”
“그렇긴 하지.”
“아버님 병세가 심각한 거니?”
학생들이 하나둘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거리감을 느꼈지만, 오랜만에 터놓고 대화를 해서 그런지 질문이 술술 나왔다.
엔도버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만간 강준 교수님이 왕진을 오신다니까 그때 이야기를 들어 봐야지. 뭐, 우리 아버지 독하기로 소문나셨으니 금방 떨치고 일어나실 거야.”
“어서 쾌유하시길 바란다. 아레스 각하 덕분에 우리가 발 뻗고 자고 있는데.”
“맞아. 혹시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하고.”
엔도버는 코를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서로 인사하는 것 외에는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왠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신경 끄고 너희들은 공부나 해. 우리 집안 문제니까.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때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좀 유명한 분이셔야지.”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때 한 여학생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런데…… 강의는 어땠어? 강준 교수님 강의.”
“강의? 뭐라고 할까. 배울 게 많았어. 앞으로도 계속 들을 생각이야. 그 교수님 학벌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어딘가의 아카데미 출신이 아닌 이상 그렇게 잘 가르칠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정도로?”
학생들이 흥미를 보였다.
“미안한데 강의 이야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을까?”
“얼마든지.”
엔도버가 손을 까딱였다. 학생들이 하나둘 일어서더니 그가 있는 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엔도버는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리고 지금은 그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어깨가 홀가분해졌다.
그렇게 학생들이 엔도버와 이야기를 한창 이어 갈 무렵.
문이 열렸다. 조금 거칠게.
“엔도버.”
켈빈이었다. 그 뒤로 로열 클럽 멤버 세 명이 나란히 섰다.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고, 그걸 본 학생들은 몸을 움찔했다.
켈빈이 비죽 웃었다.
“좋아 보인다?”
“그러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네. 오랜만에 공부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이 나는 법이지.”
“그것도 재미있겠네.”
켈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엔도버는 분명 자신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장소가 적당하지 않은 거 같은데. 따라와.”
엔도버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켈빈을 따라갔다.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기도 했다.
잠시 후, 두 사내가 마주 섰다.
* * *
똑똑―
노크가 들리자 의자에서 꾸벅 졸고 있던 브로콜린이 눈을 부릅떴다. 부스스한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다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들어오시죠.”
문이 열렸다. 연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여기 강준 교수님 연구실이죠?”
“그런데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교수님 아는 사람인데요. 잠깐 지나가다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그래요? 앉으세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심드렁하게 손님을 맞은 브로콜린은 소녀를 빤히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제안했다.
“차 한잔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쿨하게 고개를 끄덕인 브로콜린은 개인 사물함에서 찻잎을 꺼내 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소녀의 앞에 뜨거운 찻잔이 놓였다.
“향이 별로 좋진 않을 겁니다. 제가 마시던 거라서. 아직 비품이 안 왔어요. 뭐 온다고 해서 좋은 찻잎이 오는 건 아니겠지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소녀가 꾸벅 인사했다.
예의도 바르고 외모도 훌륭했다. 공부 외엔 큰 관심이 없던 브로콜린이 눈을 힐끔거릴 정도로.
“근데 아카데미 학생이에요?”
“아뇨. 학생은 아녜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이렇게 끝내주게 예쁜 분은 처음이라서.”
브로콜린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솔직하신 분이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쓸데없이 솔직하다고. 미움도 많이 받는 편이죠.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성격이 이런데. 고치기 쉽지 않죠.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소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때 감탄사와 함께 브로콜린이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교수님은 아직 혼인을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설마 교수님의…….”
브로콜린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자 소녀가 양 손바닥을 흔들었다.
“아뇨! 아니에요! 전 교수님 제자예요. 왕도 저택가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어요.”
“제 말이요. 같이 생활한다는 건 동거한다는 거잖습니까? 이야. 우리 교수님 샌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능력자셨네.”
“예?”
“괜찮아요. 저 입 무겁거든요. 앞으로 자주 뵐 거 같은데 성함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전 브로콜린이라고 합니다.”
“아, 전 아그네스예요.”
“외모처럼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하하하…….”
뭔가 대화가 자꾸 어긋나고 있었다.
때마침 준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그네스는 계속 당황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근무 시간일 텐데.”
준은 반갑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본 아그네스는 진즉 시간을 내서 들를 걸 후회했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와봤어요. 인사나 드릴까 해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왕립 아카데미와 왕립 병원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걸어서 올 만한 거리였다.
“그래도 근무 중에 나올 만한 거리는 아닌데.”
“오늘 진료는 끝났어요. 그냥 요즘 제가 너무 바쁜 척을 해서 선생님하고 이야기할 시간도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서 왔어요.”
“어쩔 수 없지. 너도 병원에 적응하는 데 정신이 없을 테니까. 별일은 없나?”
“예. 괜찮아요.”
아그네스는 씩씩하게 웃었다.
준은 그 미소에서 위화감을 느꼈지만,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배경이 없으니까.
그때, 아그네스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확인한 준이 물었다.
“그런데 차는 어디서 났어?”
“이거요? 조교분이 주시던데요?”
“비품이 들어왔나?”
준이 시선을 주자 브로콜린은 태연히 답했다.
“왕립 아카데미의 업무 처리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아요. 제 겁니다.”
“그렇군.”
“살짝 늦은 느낌이지만, 교수님도 한잔 드릴까요?”
“좋지.”
브로콜린은 차를 준비할 겸 자리를 피했다. 그제야 아그네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학생들이 수업 거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찾아왔군. 병원 쪽에서도 말이 많은가 보지?”
“장난 아녜요. 병원에서는 선생님 곧 잘린다고 말들이 많아요.”
아그네스는 자신이 준의 제자라는 것을 병원 동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여과 없이 전해질 수 있었다.
“소문은 한 다리만 건너도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별일 아니니까.”
“정말 괜찮으신 거죠?”
아그네스의 크고 예쁜 두 눈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해결될 거야.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병원 생활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저야 열심히 하면 되겠죠. 정 안 되면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가죠 뭐.”
“그럼 하룬이 슬퍼할 거야.”
“역시 그렇죠?”
아그네스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그때 준의 머릿속으로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진료 없다고 했지?”
“예. 저택으로 갈지 아니면 병원으로 다시 갈지 고민 중이에요.”
“시간 괜찮으면 같이 왕진이나 갈까?”
“그래도 돼요?”
아그네스는 기뻐했다. 준과 함께 왕진을 간 지 정말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식 치유사가 된 이후로 그럴 만한 일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요?”
“알프하이겐 가문의 저택으로. 아레스 각하를 진료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