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40화 (140/175)

140화 지도교수의 의무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준의 첫 강의 일자가 다가왔다. 준은 아침 일찍 연구실로 출근했다. 잔잔한 차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조교 브로콜린의 작품이었다.

“오셨어요?”

“일찍 나왔군.”

“과제 한 것도 다시 확인하고, 또 오늘 배울 거 미리 한번 살펴보려고요.”

브로콜린은 보기와는 달리 무척 부지런했다. 조교들의 출근 시간은 오전 8시 무렵이지만,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연구실에 나오곤 했다.

나와서 다른 귀족들처럼 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라 그는 늘 책이나 연구 논문을 붙잡았다.

준의 입장에서는 대견한 일이었다.

“원래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인가?”

“아뇨. 예전에는 막장이었죠.”

“그런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아! 내가 예전처럼 게으르게 살면 완전히 가문을 말아먹겠구나. 결국 남는 건 실력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준이 시선을 떼지 않자 브로콜린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더 할 말이 있지 않냐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역시 교수님은 예리하시다니까. 그냥 하다 보니 공부가 재미있어졌어요. 적어도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사업보다는 이게 훨씬 낫더라고요. 위험한 것도 없고, 그냥 열심히 읽고 생각하면 되니까. 개꿀이죠.”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도록.”

“제 걱정은 붙들어 매십쇼. 지금은 교수님 일이 더 문제 아닙니까?”

브로콜린의 어투에서 장난기가 싹 없어졌다.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오늘은 준의 첫 강의였다. 기초병리학 수업이었는데, 지난 며칠 사이 우려할 만한 일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났다.

수업과 직원이 연구실에 몇 번 왔다가는 사이, 수강 신청을 했던 학생들이 모두 수강 철회를 해 버린 것이다.

“전무후무한 일이라면서요. 축하드려야 하나요? 왕립 아카데미에서 신기록을 하나 보유하게 되셨으니.”

“그래도 아직 폐강 결정까지는 일주일이 남았으니 기다려 봐야지.”

준이 미리 준비한 강의 교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브로콜린이 깜짝 놀라며 따라 일어났다.

“설마 강의 가시려는 건 아니죠?”

“가야지. 혹시 학생이 올지도 모르잖아?”

“시간 낭비입니다. 의미 없는 일이죠. 학생들이 모두 수강을 철회했는데 굳이 가서 뭐 해요? 마음만 아플걸요.”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

“와우. 순간 철학과 교수님인 줄 알았네요.”

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브로콜린의 너스레는 하룬의 그것과 닮았다. 좀 더 스마트하고 때로는 비판적이라는 게 차이점이었지만.

“같이 가 드려요? 혼자 강의실에 계시려면 심심하실 텐데.”

“됐다. 연구실이나 지키고 있어.”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은 연구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고요한 연구동을 나와 강의동으로 접어드니, 쾌활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날씨도 참 좋았다.

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날이었다. 바람도 선선했고. 수강 철회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날씨 정도면 학생들이 오지 않아도 용서가 될 것 같았다.

‘뭐, 중요한 건 다른 학생들이 아니야. 엔도버. 그 친구가 어떻게 나올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

준은 엔도버의 행보가 궁금했다.

모든 이야기는 아레스 공작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미놀렌 경이 책임지고 나선다고 말했으니까. 그렇다면 엔도버 또한 곤경에 빠졌을 게 분명했다.

곤경에 처했다는 게 즐거운 게 아니었다.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가 궁금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준에게 불리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그네스는 잘하고 있겠지?’

요 며칠 사이 아그네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병원 일이 워낙 바빠 철야를 하는 날도 있었고, 새벽같이 병원에 출근했다.

‘언제 시간 내서 한번 가 보는 게 좋겠어. 왠지 걱정이 되는군.’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와 왕립 병원은 서로 협력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의학부 교수가 병원에 방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에서 진료 의뢰가 올 정도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에 도착했다. 의학부 전용 강의실에 도착한 준은 문을 옆으로 밀었다.

‘역시나.’

안은 고요했다. 한 명의 학생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준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강단에 섰다. 교재를 교탁 위에 올려놓고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훌륭한 강의실에 아무도 없다니. 아쉽네.’

왕국 최고의 학부답게 시설이 대단히 훌륭했다. 주변의 소음도 차단되어 있어 강의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학생들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강의 시작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준은 다시 시계를 집어넣고 교재를 덮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날씨도 좋으니 산책이나 해야겠군.’

준이 책을 손에 들던 바로 그때, 뒷문이 열렸다.

무슨 일일까. 준은 다시 교재를 내려놓고 그쪽을 주시했다.

젊은 학생이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네는…….”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엔도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평소에 얼마나 꼿꼿이 다녔는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영 어색했다.

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각이군.”

“죄송합니다.”

준은 다시 출석부를 살폈다. 수업과 직원이 강의 직전에 갱신해 준 새로운 출석부였다.

하지만 그 출석부에서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 엔도버의 이름도 올라와 있지만, 그의 이름에도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준이 출석부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엔도버를 응시했다.

“자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개인적으로 날 찾아온 건가?”

“아뇨. 강의를 들으러 온 겁니다.”

“강의?”

“예. 강의요.”

엔도버는 준을 따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는 준과 클럽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고, 그렇게 된다면 어느 쪽이든 큰 것을 하나 잃게 된다. 그는 모두를 갖고 싶었고, 단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마음고생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온 상황이긴 하지만, 요 며칠은 정말 힘들었다.

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는 분명 내 강의를 철회했을 텐데. 여기 출석부에도 철회 표시가 되어 있고. 나의 착각인가?”

“그게…….”

엔도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준은 가벼이 웃어넘겼다.

“뭐, 상관없네. 수강 변경 기간도 있고, 그사이에 새로운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지. 이해하네. 나는 청강생도 받고 있어서 강의를 해도 상관없어.”

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엔도버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해 얼굴이 반쪽이 됐다. 피부도 푸석해졌고, 다크서클도 볼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걸 준이 놓칠 리가 없었다.

준은 편하게 수업을 시작했다.

“우리가 앞으로 이야기할 병리학이란, 쉽게 말해 병의 원인과 원리를 밝히기 위한 학문이지. 병소의 구조와 장기의 형태, 그리고 기능의 변화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네. 생명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질환을 대상으로 하는 흥미로운 분야지.”

준은 계속 강의를 진행했다.

물론, 엔도버는 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대체 어떻게 이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준비된 시간이 흐르고 준은 강의를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아주 훌륭한 강의였다.

강의를 들은 학생이 단 한 명, 그것도 집중하지 않은 학생이었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오늘 배운 부분에서 질문이 있나? 가급적이면 적극적으로 질문을 해 줬으면 하네. 아카데미는 고등교육 기관이지.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새로 얻어 가는 게 많을 거야.”

“…….”

엔도버는 시선을 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준은 강단을 내려와 한쪽으로 늘어진 창가에 섰다. 포근한 햇살 속으로.

“날씨가 참 좋군. 이런 날엔 강의보다는 나들이라도 가는 게 좋지 않나?”

“교수님.”

나지막한 부름에 준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왜 제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까? 이야기는 다 들으셨을 텐데요.”

“대가?”

엔도버의 눈에 분노와 절망,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게 보였다.

“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제가 한 행동을 빌미로 진료를 거부하고 계신다고.”

“큰 오해를 하는군. 자네를 난처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자네를 보호하려고 한 거지.”

“보호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자네의 수강 철회는 물론, 청원서의 서명 등 모든 행동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이야기야.”

“비꼬시는 겁니까?”

“아니. 난 그런 데 취미 없어.”

준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도 여유롭고 태연한 미소라, 엔도버는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결국 엔도버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열 클럽’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지만, 가문과 아버지의 목숨을 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준을 선택했다.

“교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진료해 주실 겁니까?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강의도 다시 듣겠습니다. 청원서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네.”

“예?”

엔도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굴종과 굴욕을 강요할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의 젊은 교수는, 태연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 강의를 듣지 않아도 되고, 서명도 취소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내가 미놀렌 경에게 이야기한 건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네.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자네의 미래를 위해서 한 일이야.”

준의 말대로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해도 그랬다. 만약 자신이 준의 위치에 있다면, 아버지의 병을 이용해 엄청난 굴욕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엔도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대가를 바랄 시간에 환자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해 주고 싶군. 우리에겐 여러 환자가 있지만, 환자에겐 우리가 전부니까. 그들의 믿음에 보답해 줄 시간도 부족해. 애들 싸움에 낄 시간 없어. 우린 생명을 다루는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우리…….”

“그래. 우리.”

준은 손가락으로 엔도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어 자신도 가리켰다. 다시 한번 반복하며 둘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했다.

“자네는 아직 학생이지만, 마음이 동한다면 나중에라도 나처럼 치유사로서 환자 앞에 서겠지?”

‘우리’라는 표현이 엔도버의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격동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의학부 졸업 이후 병원엔 근처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당한 사업체를 물려받아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왠지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충만감은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치유사가 된다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엔도버는 머리가 시원해진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마음도 편해졌다.

“강준 교수님.”

“얘기하게.”

엔도버는 자연스레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정식으로 부탁드립니다. 저희 아버지를 진료해 주십시오.”

“흐음.”

준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진지하게 엔도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그건 알프하이겐의 공자로서 부탁하는 건가, 아니면 내 제자로서 부탁하는 건가?”

“제자로서…… 부탁드립니다.”

“좋아. 각하께 전해드리게. 빠른 시간 내로 한번 찾아뵙겠다고.”

“아, 감사합니다!”

엔도버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런 순진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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