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로열 클럽 (1)
그게 끝이었다.
인사를 마친 켈빈은 바로 연구실을 나섰다.
아그네스가 뒤늦게 꾸벅 인사하며 예의를 차렸지만, 그는 못 본 척 지나쳤다. 넌 또 뭐야? 이런 표정으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일이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주눅 들지 말라는 준의 충고를 떠올리고는 다시 어깨를 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은 금방 정리가 됐다.
“자네들이 이해해 주게. 아직 혈기 넘치는 나이라서 말이야.”
페르디낭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어쩔 수 없다는 시늉을 했다.
그조차도 제어가 안 되는 학생인 모양이다.
“뭐, 재미있는 친구로군요. 힐데브란트 가문의 차남이라면 저 정도는 해 줘야지요.”
“지금이야 내 앞이라서 저 정도로 끝났겠지만, 밖에서는 다를 걸세.”
“그건 또 나름대로 기대되는군요.”
준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 아그네스를 소개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 친구가 제자인 아그네스입니다. 내일부터 왕립 병원에서 치유사로 일하게 됐습니다.”
“오. 듣던 대로 미인 선생이군.”
“아,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미인이라는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아그네스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사교계 제왕으로 군림하는 후작의 눈엔 아주 좋은 파트너로 보였다. 하지만 은근한 눈빛을 보낼 뿐, 별다른 제안을 하지 않았다.
바로 준 때문이었다.
만약 아그네스가 준과 연고가 없었더라면 오늘 만찬에 초대했을 것이다.
유명한 바람둥이였지만 경우가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자네 주변엔 미인들이 많은 것 같군. 루치아 선생도 왕국제일미던데. 천운을 타고난 겐가? 이쯤 되니 자네가 부럽군그래.”
“천운이라.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만약 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더라면 루치아는 물론 아그네스와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지구에서 무기력하게 죽어 갔을 것이다.
그 복잡하고 긴 내막을 알 리가 없던 후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좋아. 내가 은퇴하면 사교계의 뒷일을 자네에게 넘기고 떠나도 되겠군. 슬슬 자네도 왕도 사교계에 데뷔해야 하지 않겠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그쪽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교수직도 쉽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잘 알고 있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훤히 알 것 같아. 하지만 기왕 왕도에 자리를 잡았는데 다른 귀족들과 연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잖나?”
“필요가 생긴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보겠네.”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페르디낭 후작은 겸손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렇게 잠시 환담을 나누던 중, 페르디낭 후작이 아그네스를 주목했다.
“아그네스 선생.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강준 교수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네.”
“앗. 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나가서 아카데미를 둘러보고 있어. 금방 따라 나갈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아그네스가 재차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정말 예의 바른 친구로군.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져.”
“좋은 곳입니다. 누아 마을은. 그런데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셨습니까? 그냥 인사나 드릴까 해서 뵙자고 한 거였는데.”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준이 귀를 기울였다.
페르디낭 후작은 미리 연초(煙草)를 채워 둔 파이프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실은 좀 문제가 생겼네.”
“켈빈 공자와 관련된 일입니까?”
“음? 어떻게 알았나?”
“왠지 그럴 것 같더군요. 쉬는 날에 연구실까지 찾아올 정도로 부지런한 학생처럼 보이진 않아서 말입니다.”
“제대로 봤군.”
페르디낭 후작은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끝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 그가 결정을 내렸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의학부 학생회에서 자네의 교수 선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공식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네. 일종의 청원서라고 할까.”
“흔히 있는 일입니까?”
“아니. 의학부를 설립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네. 아카데미 전체에서도 처음이지.”
“처음이라. 재미있군요.”
“그렇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야. 전원의 서명을 받아 왔단 말이네. 의학부에 등록되어 있는 모두의 서명을.”
페르디낭 후작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들어 보여 주었다. 이름과 소속, 그리고 자필 서명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교수 임용을 반대하는 청원서였다.
준이 피식 웃었다.
“왕립 아카데미는 왕실 직할 교육 기관인데, 왕실의 뜻을 학생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요.”
“그만큼 학생들이 반감이 크다는 게야.”
“이유는 제가 평민 출신이기 때문이겠지요?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거기에 지방 귀족이니까.”
“으음. 뭐.”
신음을 흘린 페르디낭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분 때문에 반대표를 던진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반발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왕립 아카데미는 귀족들의 엘리트 코스로 여겨지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켈빈이 모든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명을 했다는 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
말 그대로 집단 유급이나 제명을 각오하고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아카데미 학장과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네. 왕명이기 때문에 자네의 임용을 되돌릴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수업 거부라든지. 그런 걸 미리 막아 볼 생각이네.”
“아이러니하게도 의학부인데 의술에 뜻이 없는 학생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페르디낭 후작이 담배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아카데미는 훌륭한 인재가 모이는 곳이지만, 현실은 좀 다르네. 진리로 세상을 비추라는 교칙도 퇴색된 지 오래지.”
“혹시 그래서 절 이곳에 데려오신 겁니까?”
“뭐, 어느 정도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네.”
“이런. 당했군요.”
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페르디낭 후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지. 아비루나의 의학계는 좋지 않은 관습으로 썩어 있다네. 적폐라고나 할까? 그걸 청산하기 위해서 자네만 한 적임자는 없었지. 실력도 출중하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전혀 없으니 말이네. 자네도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나?”
“그렇지요.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로 반감이 있을 줄은 몰랐어. 자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지.”
페르디낭 후작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신들린 연기력이 아니라면, 저 표정엔 꾸밈이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숨기지 말고 바로 알려 주시길.”
“정말 괜찮겠나?”
“상대가 무슨 패를 쥐고 있는지 알면 적어도 질 일은 없지 않습니까? 제가 게임을 포기하기 전까지는요.”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을 위해 페르디낭 후작도 그를 따라나섰다.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괜찮습니다. 제 일이니 제가 알아서 해결하지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준은 바로 건물을 나섰다.
아그네스는 마차 옆에 있었다. 그녀는 소심하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준이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어? 벌써 끝나셨어요?”
“그래. 캠퍼스는 마음에 들어?”
“정말 최고예요. 이런 곳에서 공부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겠지. 공부가 취미인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누군가를 떠올렸고, 놀랍게도 같은 인물이었다. 바로 하룬이었다.
“그래도 의술 공부는 매일 해도 질리지 않아요. 정말 배울 게 많으니까요.”
문득 그녀를 보며 켈빈의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아니라 아그네스 같은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면 훨씬 더 훌륭한 치유사가 되었을 텐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다면 왕국의 의료 체계도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기회의 불균형이 극심한 곳이었다.
신분이라는, 자신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나요?”
“아니. 일이 좀 생겨서 어딜 가 봐야겠구나. 먼저 돌아가거라.”
“아뇨. 여기서 기다릴게요.”
준은 직원을 불러 아그네스에게 캠퍼스 안내를 부탁했다. 이미 교수로 임용된 터라 직원은 아그네스를 깍듯하게 모셨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준이 옷깃을 여몄다.
“조용히 있다 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군. 이르긴 하지만 첫 강의를 시작해 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 * *
‘로열 클럽’ 회원들이 캠퍼스 내에 위치한 살롱에 모였다. 여기엔 학생들을 위한 상주 직원들이 있어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회원과 직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야. 우리 대장 사고 한번 크게 쳤는데? 정말 학생들 서명을 전부 받아 낸 거야? 그걸 또 페르디낭 각하께 제출했고?”
“별로 어렵지는 않더군.”
켈빈은 다리를 꼬며 여유를 부렸다. 그때 샤넬이 켈빈의 팔을 어루만지며 유혹했다.
“공자님 배경이 배경이니까. 누가 힐데브란트 대공가의 차남을 건드려?”
“그것보다 샤넬 네 이름을 좀 팔았다. 차기 국왕의 누이께서 관심을 보인다니 알아서들 서명을 하더군.”
“어머, 내 허락도 없이?”
“하하하!”
유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켈빈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데 정신이 없었다. 청원서를 들이밀었을 때의 페르디낭 후작의 표정을 봤어야 했다면서.
그는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었다.
페르디낭 후작이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표정 관리는 완벽했다. 오히려 후작은 켈빈에게 경고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거라며.
하지만 그 이야기는 쏙 빼놓고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낼 수 있게끔 편집했다.
“그런데 서명은 어떻게 받은 거야? 평소에 우리 쪽에 은근 거부감 드러내는 놈들 있었잖아. 그놈들은 서명을 안 하려고 했을 텐데.”
정보통 엔도버가 묻자 켈빈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우리 넷이 주도하는 일인데 누가 반대를 해? 슬쩍 밟아 주면 다들 서명을 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놈들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컸을 텐데. 여차하면 책임을 져야 하니까.”
“괜히 깝죽대다 집안 말아먹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때, 뒤에서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군. 모두의 진심이 담긴 청원서가 아니라서.”
“응?”
깜짝 놀란 클럽 회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청년이 살롱 직원에게 와인잔을 받아 들고 있었다. 향을 한번 음미한 그는 씨익 웃으며 여유롭게 걸어와 그들과 합석했다.
합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열 클럽’은 네 명에게만 허락된 모임이니까.
엔도버가 나섰다.
“넌 뭐야?”
“교수.”
“뭐?”
뜬금없는 대답에 학생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눈앞의 사내가 아카데미의 교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에다 나이도 또래라고 생각될 정도로 젊었으니까.
“이런. 다들 입이 거칠군. 내가 알기로 왕립 아카데미에선 교수에게 예의를 표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켈빈 학생.”
“…….”
“뭐야. 켈빈. 어떻게 된 거야?”
회원들이 추궁했다.
켈빈은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방금 페르디낭 후작의 연구실에서 그의 얼굴을 봤으니까.
켈빈이 동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실례가 많았군요.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강준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