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아비루나 왕국 아카데미 (2)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순식간에 왕도에 도착한 아그네스와 하룬은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고,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의 순서를 정하고.
순간이동 마법의 놀라움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그네스는 바로 아비루나 왕립 병원에 출근 준비를 해야 했으며, 하룬은 저택 및 요인 경호 임무 계획을 세웠다. 폴링과 릴리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모두 크게 헤맸을 것이다.
반면 준은 한가롭게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문의 모든 일을 폴링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실제로 할 일은 없었지만, 결과 보고 정도는 받고 있었다.
“다들 준비는 잘하고 있습니까?”
“예. 두 분 모두 금방 저택에 적응하신 것 같습니다. 하룬 경은 좀 지나치게 들떠 보이더군요. 하하하.”
“다들 왕도에 오는 게 꿈인 친구들이었으니까요.”
“저도 가끔 들었습니다. 사실 왕도에서 성공하는 거야 모든 사람들의 꿈이긴 하지요. 다시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염려되긴 합니다만…….”
폴링은 웃었지만 내심 걱정했다.
왕도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생존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이 잘 해낼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준은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였다.
“영주님께서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걱정이 되지요.”
준은 전혀 그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폴링이 나섰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스럽지만…… 너무 일이 갑작스레 진행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하룬 경은 그렇다 쳐도 서기관님은 너무 빨리 왕립 병원에서 일하게 됐으니까요.”
“잘 알고 있습니다.”
타당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경쟁이 심한 곳인 만큼, 출신과 가문의 배경 같은 것들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왕립 아카데미나 병원은 특히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심한 곳이지요. 그중 ‘로열 클럽’이 아주 악명이 높다고 하던데. 페르디낭 각하께서 조심하라고 귀띔을 하시더군요.”
“그 클럽이라면 저도 사우던 가문에서 일을 할 때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습니다.”
“앞으로 지내다 보면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해당되겠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능력과 재능이 있느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자신의 힘과 용기로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가. 결국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닐까요? 결과가 어떠하든.”
그 한마디에 폴링은 더는 걱정을 표하지 않았다. 충분히 숙고하고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폴링이 서류를 내밀었다. 그제야 준이 미소를 지었다.
“잡설이 길었군요. 바쁠 텐데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한번 확인해 주시지요.”
준은 서류를 훑었다. 폴링이 정리한 엘누아르 가문의 금광 사업 현황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엘누아르 가문의 금광 사업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단순히 금광석과 금괴를 생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귀금속공예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 효과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실적이 좋군요. 이대로라면 올해 내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다 영주님의 혜안 덕분이지요.”
“별말씀을.”
준은 가문명을 딴 ‘엘누아르’라는 귀금속 브랜드를 만들었고, 실력 있는 공예사들을 영입해 적극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엘누아르 가문의 귀금속 사업은 왕국 귀족과 부유층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차차 퍼져 나가고 있었다.
준은 검토한 서류를 다시 폴링에게 돌려주었다.
“이대로 진행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당분간은 제가 사업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겁니다. 페르디낭 각하와 재미있는 일을 좀 해야 해서.”
“맡겨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폴링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허리를 펴고 물었다.
“그런데 오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될 거 같군요. 여독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이 코앞에서 일어나서요. 세 분께서 갑자기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사실 부끄러워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준과 루치아가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을 때 너무 놀란 나머지 그 방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준이 웃으며 권했다.
“앞으로는 경도 자주 이용하도록 하시죠.”
“조금 무섭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폴링은 예를 취한 뒤 집무실을 나갔다.
오늘 저녁엔 페르디낭 후작과 아인하르트 후작을 만나기로 했다. 아카데미와 병원의 주요 인사였기 때문에 아그네스를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릴리가 따라붙었다.
“드레스는 어울리는 걸로 잘 준비했나?”
“보시면 아마 깜짝 놀랄걸요? 후후후. 저의 센스를 인정하셔야 할 거예요.”
“설레발은 여전하군.”
“설레발이 아니라구요! 딱 보면 루치아 님에서 아그네스 양으로 바로 갈아타실지도. 아, 여긴 일부다처제 세상이니 상관없으려나? 아얏!”
듣다 못 한 준은 릴리에게 꿀밤을 먹였다. 릴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기린은 요즘 어때?”
“그 계집이요? 처음엔 아주 독기가 올라서 막 때려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는데 요즘은 얌전해졌어요. 체념했다고 해야 하나. 청소도 열심히 하고 동료들 평판도 나쁘지 않아요.”
“다행이군.”
“그런데 정말 마나 서클 봉인한 거 풀어주실 건가요?”
“아직은. 언젠가 때가 오지 않겠어?”
계단을 함께 내려가며 릴리가 정색했다.
“이런! 역시 악독한 영주시군요. 이런 식으로 공짜로 인력을 부려먹다니!”
“마음대로 생각해.”
“절대악 케이아스가 마스터에게 패배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요.”
“뭔데?”
“절대악보다 더욱 악하기 때문이지!”
“하하하.”
어느새 아그네스의 방 앞에 선 준이 가볍게 노크했다.
안에서 하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그네스는 드레스로 환복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하녀들이 선망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준은 릴리의 호들갑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그네스의 머리색과 비슷한 분홍빛 드레스. 거기에 흰색으로 포인트를 줘 귀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모습을 잘 부각시켰다.
“잘 어울리네.”
“너무 불편해요. 역시 치유사복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데. 하지만 역시 잘 갖춰 입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거겠죠?”
아그네스는 투정을 부렸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준은 한쪽 문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왕립 병원의 치유사니까 치유사복을 입어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 어쨌든 두 분 모두 너의 후견인을 자처하셨으니까.”
“너무 긴장돼요.”
“긴장할 필요 없어. 다들 널 예뻐해 주실 거다. 부담 갖지 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그네스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에 드뇌르 백작을 만날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드뇌르 백작은 지방 영주였고, 두 후작은 왕도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아그네스는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준이 아그네스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는 머리핀을 주목했다.
“오랜만에 했네. 그거.”
“아, 이거요?”
아그네스는 볼을 붉히며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예전에 누아 마을 시장에서 준이 사줬던 5코퍼짜리 머리핀이었다.
“조금 화려한 느낌이라 안 하고 있다가, 드레스 입을 일이 있어서 해 봤어요. 어때요?”
“잘 어울려.”
“다행이네요.”
“슬슬 출발하지.”
그렇게 두 사람은 저택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폴링이 마차를 준비시켜 놓았다. 저 멀리서 하룬이 병사들을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병사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마차에 올랐다.
* * *
아인하르트 후작과 환담을 마친 두 사람은 저택을 나서 마차에 올랐다. 그때 뒤늦게 따라 나온 빈센트 대공자가 준을 불렀다.
그는 최근 신사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꽤 수척해 보였다.
“남작님. 다음 행선지가 페르디낭 각하의 저택이지요?”
“그렇습니다만.”
“아까 전령이 왔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로 와 주면 좋겠다고 하시는군요. 이렇게 일찍 가실 줄 몰라 이제야 알려드리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헛걸음을 할 뻔했군요.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만남은 아주 짧았다. 아인하르트 후작이 공무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그네스의 혼을 쏙 빼놓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아인하르트 후작은 아그네스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평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빛난다는 게 뭔지 잘 알겠다고 말할 정도로.
“아.”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자, 깜짝 정신을 차린 아그네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왜?”
“괜히 저 때문에 오해받으셨잖아요.”
아인하르트 후작이 아그네스를 보곤 큰 오해를 했다. 부인감으로 딱이라고. 가뜩이나 긴장한 터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준이 웃어넘겼다.
“걱정하지 마. 페르디낭 각하는 오해하지 않으실 테니까.”
“저를 잘 알고계신가요?”
“아니. 전에 루치아 선생과 만난 적이 있거든.”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뭔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했는데 바로 땅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정신이 너무 없어서일까.
아그네스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루치아 선생님하곤 어떤 사이예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애증의 관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루치아 선생님 말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요.”
뒤늦게 아그네스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혹여 준이 기분 나빠 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준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오래 함께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다 할 추억 같은 게 없거든. 늘 루치아 선생은 일거리를 한가득 들고 찾아오곤 했어.”
“어떤 일이요?”
“그냥 뭐 이것저것.”
문득 준은 궁금해졌다. 언젠가 모든 진실을 아그네스에게도 이야기해 줄 날이 올까?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한다고 한들 믿지도 않을 거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신의 선택을 받기 이전의 생이라면 모를까, 그 이후의 일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잘 어울려요. 선생님하고 루치아 선생님은요.”
“그래?”
오늘따라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이 막 나오는 아그네스였다. 가끔 술을 마실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그래서일까. 마차 안은 어색한 공기로 조용해졌다.
잠시 후 마차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건물로 들어섰다. 말에 오른 기사들과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비루나 왕립 아카데미였다.
“다 온 거 같다.”
“네!”
아그네스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긴장의 끈을 조였다.
두 사람은 본관 건물에 내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페르디낭 후작의 연구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어서 오시게. 강준 남작.”
“오, 이분이 이번에 새로 부임하시는 그분입니까?”
“그래. 자네도 인사하지.”
페르디낭 후작의 권유에 젊은 청년이 건성으로 인사했다. 청년은 거만하면서도 아니꼬운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의학부의 켈빈입니다. 힐데브란트 가문의 차남이죠.”
“잘 부탁하네.”
준이 악수를 청했다. 이례적으로 준은 경어 대신 반말을 썼다.
이곳 왕립 아카데미의 교칙 때문이었다. 귀족이든 왕족이든 학생이라면 이곳 교수에게는 경어를 사용해야 한다. 반대로 교수는 학생을 하대한다.
그게 켈빈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대공 가문인 힐데브란트 가의 차남이라고 해도 지엄한 아카데미의 교칙을 거스를 순 없었다.
“왕립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강준 교수님.”
켈빈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