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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33화 (133/175)

133화 아비루나 왕립 아카데미 (1)

“그런데 행차가 너무 허술한 게 아닐까요?”

하룬의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

“보급이야 마을에 들러서 하면 된다 치지만, 호위가 많이 부실합니다. 아니, 부실한 게 아니라 아예 없네요.”

기사 하룬은 말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준의 명령으로 마차 안에 탑승했다. 무장도 최대한 가볍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하룬의 입장에서는 편했지만 마음은 그러지 않았다. 어쨌든 엘누아르 가문의 기사인 이상 영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차를 지킬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호위 병사들도 없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왕도에 가지 않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다른 걸 타고 가나요?”

창밖을 내다보던 아그네스도 관심을 보였다. 두 제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준이 말했다.

“마차보다 더욱 쉽고 빠른 방법이 있지. 자세한 건 도착해서 알려 주도록 하마.”

“그러지 말고 지금 알려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궁금한 건 못 참아요.”

“그렇게 말해 버리면 더 안 알려 주실걸?”

“아, 그런가?”

하룬은 아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그네스의 예상대로 준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일 텐데 미리 이야기해서 좋을 게 없었다.

때마침 마차가 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돌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하룬이 물었다.

“여긴 마르다 마을 쪽 길이 아닌데요?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 보면 알아. 거의 다 왔다.”

하룬의 말대로 마차는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차는, 아무도 오가지 않는 한적한 공터에 멈춰 섰다. 아직 개발되지 않는 곳이었다.

“도착했군. 다들 짐을 챙겨라.”

아그네스와 하룬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일단 준의 말대로 소지품을 모두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또 다른 마차로 갈아타고 왕도로 떠나는 줄 알았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마차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준은 말없이 앞서 걸었다. 그가 향하는 방향으로 버려진 집 한 채가 보였다.

때마침 타고 온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것을 본 하룬이 흠칫 놀랐다.

“이럴 수가.”

하룬이 걸음을 멈추자 아그네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니?”

“혹시 우리 유괴된 건 아닐까? 저길 봐. 우리 태우고 온 마차가 떠나 버렸다고.”

그러면 그렇지. 아그네스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따라온 하룬이 옆에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저 폐가에 인신매매범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 어쩌지? 어딘가로 팔려 갈지도 몰라!”

“아휴, 진짜. 너의 그 빈곤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하룬. 선생님이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우릴 팔아넘기시겠어? 어마어마한 금광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아그네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수준 낮은 대화를 받아 주고 있는 내 처지가 불쌍하다.”

“쳇.”

세 사람은 폐가에 도착했다.

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아그네스와 하룬은 미리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마리?”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인신매매범이 아닌 마리였다.

“설마 주군과 공범이었나!”

“공범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냐. 신경 쓰지 마. 얘 오늘 상태가 좀 메롱인 거 같거든.”

“냐옹.”

마리의 어깨에 앉아 있던 흰 고양이가 동의하듯 울었다. 인연을 맺은 지 얼마 안 됐지만 한 몸처럼 움직였다. 마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준이 물었다.

“준비는 끝났나?”

“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확인했어요. 확인할 겸 잠시 저택에 갔는데 폴링 경이 무척 놀라시던걸요.”

“그럴 만도 하지. 워프는 고위 마법이니까.”

“워프요?”

마법적 지식을 쌓고 있던 아그네스가 준이 꺼낸 단어 하나에 흥미를 보였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리가 대신 설명했다.

“이 폐가와 왕도에 있는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은 서로 이어져 있어요. 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저택으로 갈 수 있죠. 반대로 저택에서도 이쪽으로 바로 올 수 있고요.”

“세상에…… 그게 가능하니?”

“저는 할 수 없어요. 스승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워프 마법을 변형시킨 거예요.”

하룬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아그네스는 달랐다. 워프 마법이 얼마나 높은 차원의 마법인지 할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변형까지 시키다니?

기본적으로 마법은 변형시키거나 사물에 적용시킬 때 더욱 난도가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마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준은 엄청난 마법적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적어도 워프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거니까.

준이 말했다.

“누아 마을과 왕도는 거리가 멀어. 마차로 오가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만 이 워프 게이트를 쓸 수 있게 할 생각이다.”

“그럼 이 폐가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야겠네요.”

“그렇지.”

아그네스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일단 편하게 오갈 수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아그네스가 겁에 질렸다.

“그런데 워프하다 잘못해서 차원의 틈새에 끼면 어떡하죠?”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내가 구하러 갈 테니까.”

“아…….”

구하러 간다는 준의 말에 아그네스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아그네스는 준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뭐, 그 전에 볼카누스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준의 한마디 농담에 어수선해진 분위기가 바로잡혔다. 하지만 마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슬슬 출발하셔야죠? 제가 안내할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야옹.”

고양이가 아그네스를 향해 한번 경고하듯 울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폐가의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방.

게이트는 그곳에 있었다. 예전에는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는 방식을 썼지만, 이곳은 혹시나 마을 사람들이 올 수도 있기에 방법을 바꿨다.

마리는 허름한 벽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벽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왕도에 있는 저택으로 갈 수 있어요.”

마리는 직접 문을 열었다.

화악!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푸른색으로 넘실거리는 게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그네스와 하룬은 한동안 말없이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대박 신기하네! 역시 마법이 짱이라니까. 주군. 저도 마법사로 전직하면 안 됩니까?”

“넌 마법에 소질이 없다.”

“단호하시네. 단호박인 줄. 때론 선의의 거짓말 좀 해 주시면 안 됩니까?”

하룬의 너스레에 일행이 웃었다. 아그네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게이트를 어루만졌다. 신비로운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선생님. 저도 열심히 수련하면 이런 게이트를 만들 수 있을까요?”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 언제 달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

“열심히 해야겠어요.”

“너도 마법사로 전직할 생각인가?”

아그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 보였다. 준은 문득 궁금했다.

“이걸 잘 이용하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병원이나 진료소로 오는 도중에 목숨을 잃는 위급한 환자들이 종종 있잖아요. 곳곳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고 진료소로 이어지게 한다면 소중한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확실히 그렇구나. 좋은 생각이다.”

준은 내심 기뻤다.

단순히 의술의 향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입장을 생각하며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아그네스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그네스의 향상심은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리에게도, 그리고 하룬에게도.

또래인 두 사람도 아그네스에게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의의 경쟁이었다.

준은 문득 아그네스가 가진 잠재력이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기를 바랐다.

“슬슬 들어가 볼까? 마리.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호출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스승님. 걱정하지 마세요.”

준이 먼저 게이트를 통과했다. 믿을 수 없게도 준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주군?”

이어 아그네스도 게이트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

“네아?”

하룬은 섣불리 게이트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나를 느낄 수 없는 몸이기도 하고, 순간이동이라는 게 막상 하려니 겁이 났던 것이다.

“아, 이것 참. 나는 여행하면서 왕도에 가고 싶었는데. 주군께는 죄송하지만 마차를 타고 떠나 볼까나. 하하하.”

하룬이 한발 뒤로 내빼자 마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빠는 겁쟁이.”

“야옹.”

이젠 동물에게까지 무시당할 줄이야.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주먹을 꽉 쥔 하룬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게이트에 뛰어들었다.

파팟!

하룬의 모습도 사라졌다.

순간 푸른 게이트가 사라지며 벽장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리는 조용히 벽장의 문을 닫았다.

* * *

고급스러운 살롱에 스무 명 남짓한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나이가 어려 보였는데, 그들은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 학생들이었다.

왕립 아카데미는 대부분 귀족들의 엘리트 코스로 인식된다. 실제로 평민은 입학 자체가 쉽지 않다.

매년 두어 명 선발하는 특별 전형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정도.

그중 의학부는 대단한 경쟁률을 자랑한다. 실제로 현재 등록된 의학부 학생 중 평민 출신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곳 살롱에 모인 의학부 학생들은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주류파와 비주류파로.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살롱 한구석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는 네 명의 학생들의 근처엔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왕족이거나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이었다.

이름하여 ‘로열 클럽’.

그중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의 청년 하나가 말문을 텄다.

“얘기 들었냐?”

나머지 셋이 일제히 관심을 보였다. 엔도버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모임의 정보통이라 종종 재미있는 소식을 물어오곤 했다.

“의학부에 신임 교수가 온다던데. 뭐라더라. 엘누아르 가문의 강준 남작?”

“시시한 이야기지.”

켈빈이 말을 딱 잘랐다. 시니컬한 표정의 말수 적은 청년. 그가 이 ‘로열 클럽’의 리더였다.

그러자 이 모임의 유일한 여성이 나섰다.

“시시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꽤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 왕국 어르신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

“우리 왕녀 마마께서 그러시다면야 뭐 그런 거겠지.”

“비꼬지 말아 줄래?”

켈빈이 피식 웃었다. 아비루나 왕국의 왕녀 샤넬은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삐딱하게 다리를 꼰 켈빈이 말했다.

“이곳은 실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연줄도 필요하고 정치력도 필요하지. 페르디낭 후작의 추천을 받았다고 해서 마음 놓을 수 없을걸?”

“하긴. 우리도 뭐 치유사가 되려고 의학부에 입학한 건 아니니까.”

“맞아.”

엔도버와 무어가 말을 받았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켈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와인잔을 내밀었다.

“시시한 이야기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친구들. 더 재미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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