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의뢰하다
강령술사를 처치한 준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뒷산 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물론, 이곳은 평범한 동굴이 아니었다. 카이엔이 거주하는 바로 그 던전이었다.
던전 입구에 들어선 준은 한쪽에 숨겨진 포털 위에 올랐다. 그리고 던전 코어로 바로 이동했다.
코어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잘 꾸며 놨네.”
마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이한 장식 대신 인간들의 소품으로 꾸며진 커다란 방이었다. 던전을 가동시키는 코어는 뒤쪽에 숨겨져 있어 저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구조로 되어 있었다.
준은 딱히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마계가 소멸한 뒤로 인간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카이엔이었다. 인간들의 풍속과 문화에 감화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해야 하는 준이나 진료소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벌써 처치한 건가?”
책장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던 카이엔이 물었다. 준이 의자에 앉았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 중요한 건 놈을 처치하는 게 아니니까.”
“배후가 있었던 모양이군.”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 배후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쉽게 입을 열지 않더라고.”
“그럴 때는 고문이 최고지. 이곳으로 데려오지 그랬나?”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카이엔은 씨익 웃으며 정리를 끝마쳤다. 마계의 대공다운, 아주 무서운 미소였다.
곧 카이엔이 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아무래도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연관이 없는 두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데, 뭔가 마음에 걸린다.”
“연관 없는 두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볼카누스였다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겠지만, 카이엔은 진지하게 그 말을 받았다. 은퇴했다고는 해도 준은 전직 절대자였으니까.
턱을 쓸어 만진 카이엔이 물었다.
“즉, 혈마신이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소멸시키긴 했지만 다른 존재가 혈마신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는 거니까.”
“연관이 없는 두 가지 일 중 나머지 하나는?”
“숲의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과연 흥미롭군.”
기본적으로 엘프는 천족의 편이다. 그랬기에, 적대관계에 있는 카이엔에게 있어 엘프의 출현은 호기심을 자극할 만했다.
“그러니까, 강령술사의 활동과 엘프의 등장에 뭔가 연관성이 있다는 추론인가?”
“추론까지는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놈은 혈마신을 강림시키려고 했다. 다른 마을에도 이런 놈들이 있다면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할 거야.”
“대책은?”
준은 품에서 미니 플라스크를 꺼냈다. 마르다 던전의 강령술사가 만들고 있던 그 비약이 담긴 것이었다.
준은 비약 샘플을 카이엔에게 건넸다.
“놈이 만들던 비약이다. 이걸 단서로 배후를 밝혀 줬으면 해.”
“왜 그대가 처리하지 않고서?”
“마음 같아서는 내 손으로 일망타진하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왕도로 돌아가야 하거든.”
준이 아비루나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의 교수가 되었다는 것과, 아그네스와 함께 왕도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은 카이엔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뻔뻔하게 부탁할 줄이야.
카이엔이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이런 시시한 일을 맡기다니. 하긴. 그대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 신세 진 것도 있고 말이야.”
“잘못 짚었어.”
“뭐라?”
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히려 시시한 일이 아닐 것 같아서 네게 부탁하는 거지. 가능하면 교단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하고. 아무튼 부탁한다. 볼카누스와 함께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고려해 보지.”
“기왕 부탁 들어줄 거면 다 들어줘.”
준은 미련 없이 던전 코어를 나섰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카이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불도마뱀 놈과 얽히는 건가? 격이 뚝뚝 떨어지는군.”
깊은 회의감을 느끼는 카이엔이었다.
* * *
사이먼이 일으킨 소동이 진정되고, 준과 아그네스는 차분히 왕도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출발 전날, 왕도에 머물고 있던 기사단장 바이런이 말을 몰고 누아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하룬은 깜짝 놀랐다.
“헉! 단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신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영주님의 급서를 받고 왔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이럇!”
“단장님!”
바이런은 즉시 말을 몰고 진료소로 향했다.
단장의 귀환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근처에 있던 기사단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기회를 놓칠 하룬이 아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사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미안한데 단장님께서 따라와 보라고 하시네. 잠시 대타 좀 뛰어 주라.”
“단장님이? 뭐, 알았어. 대신 바로 와라. 나 이따 비번인 거 알지?”
“걱정 붙들어 매셔.”
하룬은 말에 올라 바이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룬에게 속았다는 걸 눈치챈 동료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만, 하룬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난 뒤였다.
곧 하룬은 진료소에 도착했다.
내부는 한산했다. 이미 오후 진료가 끝나고, 견습들이 대기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그네스도 견습들을 도와 정리를 함께했다.
“네아. 단장님은?”
“준 선생님 진료실에 계셔. 근데 너 또 농땡이 피우니? 오늘 당직이라고 하지 않았어?”
“에헤이! 농땡이라니. 사람 서운하게. 합법적으로 교대하고 왔다고. 잠깐 앨런한테 부탁하고 왔어.”
“수상한데.”
하룬은 시선을 슬쩍 돌리며 헛기침했다. 그걸 보며 아그네스는 확신했다. 농땡이라고.
겉으로는 까불고 장난기가 많지만 순진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거짓말엔 소질이 없었다.
“근데 무슨 일로 오신 거래? 왕도에 뭔 일 났어?”
“나도 잘 모르겠어. 인사도 제대로 못 했거든. 급한 일인가 봐.”
하룬은 슬그머니 준의 진료실로 다가갔다. 문 근처에 가니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워낙 작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덜컥!
그때, 문이 확 열렸다. 엄한 눈으로 하룬을 노려본 바이런이 고개를 까딱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크흠.”
“죄송합니다!”
바이런이 헛기침으로 경고했다. 만약 준이 눈앞에 있지 않았더라면 뒤통수로 손이 날아갔을 것이다.
준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안 그래도 널 부르려던 참이었으니까.”
“혹시 큰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 사이먼의 잔당이 나타난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바이런 단장과 임무를 교대해 줬으면 해서.”
“임무 교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룬은 잠시 멍해졌다.
가만, 바이런 단장님의 임무가 뭐였더라?
모든 단원들의 임무를 외우고 있던 그였다. 제정신을 차리기에 시간이 좀 필요했다. 곧 하룬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면 제가?”
“그래. 네가 왕도에 있는 저택의 경비를 책임져 줬으면 한다.”
“정말입니까? 그럼 저도 왕도로 갈 수 있는 건가요?”
“미덥진 못하지만 주군의 특별 명령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임무에 임하도록 해라.”
“옛! 단장님!”
하룬은 뛸 듯이 기뻤다.
사실 누아 같은 시골 마을에서 근사한 갑옷을 입고 망토를 휘날려 봐야 봐 줄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왕도가 어디인가?
인구가 어마어마한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였다. 자신이 기사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는 무대인 것이다.
물론 가장 기뻤던 건 아그네스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헤벌쭉 웃던 하룬이 표정을 근엄히 하며 군례를 취했다.
“명을 받듭니다! 목숨을 바쳐 저택을 지키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내일 바로 왕도로 출발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룬이 재빨리 진료실에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바이런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주군. 정말 저 녀석으로 괜찮겠습니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 걱정이 큽니다.”
“오히려 그러니 기회를 줘야지요. 실수도 하고 위험한 일도 겪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녀석은 더 성장하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걱정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는 것도 걱정이 됐지만, 아직 미숙한 부하가 뜻하지 않은 위험에 휘말리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하룬을 제자로 뒀다는 걸 자랑스러워할 날이 올 겁니다. 반드시.”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아그네스도 든든한 조력자가 필요할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지요.”
그제야 바이런은 준의 속내를 눈치챘다.
단순히 하룬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딸인 아그네스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다.
왕도는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닐 테니까.
“아무튼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제 딸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예?”
“제가 없어도 아그네스는 언젠가 훌륭한 치유사가 됐을 겁니다. 다만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지요. 이는 온전히 아그네스를 바르고 성실하게 키운 경의 노고입니다.”
“주군…….”
어떻게 이 젊은 사람이 이런 속 깊은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이런은 감격스러운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엔 굳건한 충성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 혹시 하룬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윗감으로.”
“하하하. 글쎄요?”
바이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왕도로 떠나는 아침이 밝았다.
마을에 드문 겹경사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실제로 누아 마을은 졸지에 유명해졌는데, 아카데미 교수와 왕립 병원 치유사를 동시에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는 웬만한 도시에서도 보기 드문 그런 영광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각지로 퍼져 나갔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켈세타의 드뇌르 백작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금광으로 대박이 난 상황에서 명예까지 얻었으니 배가 몹시 아플 만도 했다.
“돌팔이! 대체 패잔병에게 무슨 말을 한 게야?”
어김없이 볼카누스가 약초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준은 그의 팔과 다리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가만히 있으면 심심할까 봐 소일거리를 좀 줬지.”
“불쾌하다!”
“그러면 안 하면 되잖아? 왜 성질을 내고 그래?”
“큭.”
준의 일침에 볼카누스가 입을 씰룩였다. 맞는 말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 없으니 본론부터 말해.”
“설마 독심술까지 익힌 게야?”
“아니. 넌 얼굴에 속내가 다 드러나는 타입이거든.”
“젠장!”
하지만 정말 시간이 없었다. 마차에 짐이 다 실렸고, 마지막으로 하룬이 호위 점검을 하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이제 쭉 왕도에서 사는 게냐?”
“그건 녀석이 선택할 문제지. 너도 알다시피 왕립 병원은 인간들에게 상징적인 곳이다. 평생 눌러 있는 경우가 많지. 교수직을 겸임하면서.”
“그럼 아그네스도 그렇게 되겠군.”
“글쎄. 녀석도 나름 목표가 있으니 그러진 않을 거 같은데?”
누아 마을엔 오래도록 치유사가 없었다. 그나마 촌장 아론이 환자가 생길 때마다 봐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 왔던 아그네스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치유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최근 마을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유입 인구가 늘어나는 상황.
그랬기에 준은 아그네스가 왕도에 그렇게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자신과 루치아가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외지인이었으니까.
“주군! 출발 준비 모두 끝났습니다!”
“알았다.”
하룬에게 신호를 보내며, 준은 볼카누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가 없는 동안 마을을 잘 부탁한다.”
“내가 집 지키는 개냐?”
“전직 절대자의 영지를 지키는 수호룡 역할도 나쁘지 않잖아?”
“꺼져라.”
피식 웃은 준은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곤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