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혈마족의 흔적을 찾아서 (2)
준은 여유롭게 던전 내부를 탐색했다.
하지만 그 속도와 정확도는 굉장했다. 그는 자신의 기척과 힘을 숨기면서도 던전 내부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었다.
‘몬스터는 없는 것 같고. 일부러 풀어놓지 않은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던전의 존재는 폐쇄된 이후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몬스터를 풀어 버리면 폐쇄 정도로 끝나지 않게 된다. 정말로 교단에서 사제나 성기사를 파견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머리는 쓰는 친구라는 건데.’
문득 궁금해졌다.
혈마족이 추앙하는 혈마신 아크라사스는 자신이 백 년도 전에 처치했다. 그런데도 그를 추앙하는 사람이 남아있을 줄이야.
하긴, 보통의 인간이라면 혈마신이 소멸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준은 던전 깊숙한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유일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기척은 예전 하룬과 마리를 데리고 탐사를 나섰을 때 가고일을 만났던 그 홀 근처에 있었다.
준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우우웅!
주변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마나가 빠르게 움직이는 기운이었다.
그 속도가 매우 빨랐지만 준은 걸음을 멈추고 침착하게 주변의 변화를 살폈다.
그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곧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두컴컴한 던전의 내부가 하나둘 벗겨지며 사라지더니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과일과 꽃, 그리고 초식동물로 가득한 그런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 흐르는 개울에는 거의 헐벗다시피 한 아름다운 여인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생긋 웃은 여인들이 유혹하는 눈빛으로 손짓을 했다.
만약 준이 평범한 탐험가였다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환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제법 수준이 높은 환술이야.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거겠지.’
여기에 펼쳐진 환술은 일종의 진법이다. 즉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있고, 생문을 택하면 진법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사문을 택하면 생문이 사라져 죽게 된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준은 생문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어디에서 왔어요?”
“미남이네.”
“우리랑 같이 놀아요. 일단 옷 좀 벗고.”
루치아와 비견될 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이 달려들었다. 은은한 향취와 고혹적인 표정들. 남자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준은 가차 없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서걱!
“꺄아악!”
다가오던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검이 깊게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인들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대신 모래가 흩날리듯 입자가 되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할 뿐.
바로 그 여인들을 해치우는 것이 이 진법의 유일한 생문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진법이 완전히 깨지며 풍경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룬 녀석이 걸려들었다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했겠어.’
피식 웃은 준이 다시 검을 갈무리하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거대한 홀에 진입했다. 예전에 가고일을 만났던 바로 그곳이었다. 바닥을 살펴보니 여전히 가고일의 파편이 널려 있었다.
‘흐음. 역시 이상해.’
준은 흩어진 가고일 석상의 잔해를 살펴보았다. 분명 그때 해치운 가고일은 세 마리였는데, 잔해가 한 마리분도 안 되어 보였던 것이다.
잔해를 손에 쥐었다.
질감이나 외양은 일반적으로 석상에 쓰이는 돌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마기가 잠들어 있었다.
순간,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렇군. 그래서 강령술사가 이곳을 기점으로 삼은 거였어. 이 가고일의 잔해로 비약을 만들거나 술법을 부리는 게 분명해.’
준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카이엔의 비밀 방이 있던 그곳.
그곳에서 흉흉한 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손에 쥔 가고일 잔해를 내던진 준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과거 카이엔이 쓰던 밀실은 실험실로 바뀌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료가 전시되어 있는 것은 물론, 독가스를 풍기며 끓고 있는 액체도 있었다. 각종 쓰레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 척추가 휘고 몸집이 작은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물건들을 발로 차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체불명의 재료를 부어 넣고, 주걱으로 휘젓고, 또 맛을 보고.
거기에 마력까지 주입했다.
그런데 보통의 마나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나가 푸른색이고, 신성력을 띈 마나가 흰색이었는데, 이 노인이 사용하는 마나는 붉은색이었다.
마력이 주입되자 솥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동시에 끓고 있던 액체의 독기가 더욱 강해졌다.
노인은 걸쭉한 액체를 주걱으로 살짝 떠서 맛을 봤다.
“맛이 좋군. 아주 좋아. 곧 비약이 완성된다면 마을을 통째로 오염시킬 수 있겠어! 흐흐흐.”
주걱을 내팽개친 노인은 밀실의 벽을 열었다. 놀랍게도 옆에 또 다른 밀실이 있었는데, 맨 끝에 제단이 놓여 있는 기다란 공간이었다.
그런데 악취가 대단했다.
악취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수많은 동물들의 사체가 널려 있었는데, 그중엔 놀랍게도 인간의 시체 역시 두어 구 섞여 있었다. 모두가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한쪽 옆에는 살아 있는 사슴이 묶여 있었다.
노인은 칼을 들고 사슴의 목을 서슴없이 잘라 피를 받았다. 그리고 제단에 뿌렸다.
“위대하신 아크라사스여. 이 신실한 종의 목소리를 들어주시옵소서!”
혈마족의 기본 의례 중 하나였다. 살아 있는 것의 피를 뿌려 축복을 받는 것.
피를 뒤집어쓴 제단에서 붉은빛이 아른거렸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실패한 것이다. 신탁도, 축복도 내려오지 않았다.
연이은 실패에 노인이 이를 갈았다.
“끄윽! 역시 동물로는 안 되는 겐가? 인간의 피가 필요해. 더욱 많이!”
한참을 투덜거리던 노인이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다.
인간의 피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동물을 유인하는 것과 인간을 유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마르다 마을은 제법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한두 명 정도 어떻게 하는 건 쉬워도, 여러 사람들이 실종되면 이곳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밤중 몰래 숲으로 나가 동물을 잡아 오곤 했다. 하지만 효과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결국 그는 다시 실험실로 돌아와 팔팔 끊는 솥 앞에 섰다.
“역시 이 비약을 완성시키는 수밖에 없겠어. 우물에 잔뜩 풀고 마르다 마을 사람들을 던전으로 오게 만들어야지. 흐흐.”
지금 노인이 만들고 있는 비약은 강력한 정신 계열 약물이었다. 일정 시간 동안 의지를 상실하고 술자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납치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이곳으로 유인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피를 모두 모은다면 가능할 게야. 혈마신의 강림! 혈마신을 이 세상에 강림시켜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리라! 끌끌끌.”
“누구 맘대로?”
“허헉!”
너무 놀란 나머지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잘생긴 젊은 청년이 묵묵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노인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꽥 질렀다.
“네놈은 누구냐?”
“누아 마을의 치유사다.”
“치유사?”
뜻밖의 대답에 노인의 표정이 멍해졌다. 하지만 독기가 금세 돌아왔다.
“개소리! 그런 자가 어떻게 나의 연구실에 침입한단 거냐! 감히!”
“던전에 무단으로 침입한 건 너지. 분명 이곳은 영주의 명령으로 폐쇄되었다. 누가 봐도 불법 실험실인데. 자경단의 허가는 받은 건가?”
“이런 미친…… 분명 진법을 깔아 뒀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미안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준은 미리 챙겨온 휴대용 미니 플라스크에 솥에서 끓고 있는 액체를 담았다. 그리고 뚜껑을 잘 닫고 다시 품속에 넣었다.
“샘플은 확보했고. 일단 이것부터 처리해 볼까.”
준은 가차 없이 솥을 발길질로 날려 버렸다.
콰당!
“안 돼애애애!”
보기에는 역하지만, 그 안엔 실로 영물이라 불릴 수 있는 재료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걸 준이 한 번에 엎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준은 쏟아진 액체를 재활용하지 못하도록, 물의 중급 정령 아쿠아를 불러 깨끗이 치웠다.
“고생했다. 아쿠아. 다음에 또 보지.”
「자주 불러 주셔요. 마스터.」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물의 정령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비약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노인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게 무슨…….”
“배후에 누가 있나?”
“개 같은 일이야…….”
“역시 말로는 안 되는 건가.”
준은 가만히 있었다.
스릉!
움직인 것은 그의 검이었다. 놀랍게도 검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채, 검집에서 몸을 빼더니 홱 돌아 날카로운 끝을 노인에게 향했다.
“허헉!”
그제야 노인은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 되었다.
상대는 우연히 던전에 굴러들어온 청년이 아니다.
자신의 환술도 깨 버릴 만큼의 대단한 실력자였던 것이다.
“교단에서 나왔나?”
“말했잖아. 누아 마을의 치유사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입 아프니까. 다시 묻지. 배후에 누가 있나? 혼자 꾸밀 만한 짓은 아닌 것 같은데.”
“흐흥. 알 게 뭐냐?”
그때 준의 눈이 꿈틀거렸다.
서컥!
순식간에 날아간 검이 노인의 어깨에 상처를 냈다. 한 마디 정도 파였는데, 목숨엔 지장이 없었지만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노인이 극심한 고통에 발버둥 쳤다.
“크어어!”
“좋은 말할 때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가야 하거든.”
“말한다고 해도 죽일 거잖아!”
“당연하지.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꿈을 네가 짓밟지 않았나? 편히 죽지는 못할 거다. 대신, 배후를 밝히면 고통을 좀 줄여 주지.”
하지만 노인도 보통이 아니었다.
평화로운 죽음보다는 항전을 택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혈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나가 요동쳤고, 노인의 몸이 붉게 변했다.
“흐흥, 내가 이대로 죽을 줄 아나? 위대하신 혈마신 아크라사스께서 굽어살펴 주실 것이다!”
“그럴 리는 없어.”
“뭣이?”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지? 옆에 제단을 보니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거 같던데.”
“네놈이 그걸 어떻게…….”
“내가 죽였거든. 그 아크라사스라는 놈.”
잠시 침묵이 돌았다.
실로 믿을 수 없는 한마디가 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너무나 믿을 수 없는 말이라, 노인은 배를 잡고 웃고 말았다.
“크하하하하! 이런 미친놈을 봤나. 술이라도 처먹은 게냐? 누가 누굴 죽인다고? 하하하하!”
“하긴.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프지. 다음 생에서는 부디 착하게 살길 바란다.”
푸욱!
준의 검이 노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일격을 허용했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노인이 주저앉았다.
“아크……라…사스…… 만……세!”
100여 년 전, 준에게 소멸당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윽고 노인은 허망하게 눈을 감았다.
준은 품에서 다시 피리를 꺼내 불었다.
이번에 나타난 정령은 프레어였다. 릴리가 무서워하는 근육질의 중급 정령이었다.
「부르셨소?」
“이곳을 모두 불로 정화해 버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알겠소. 마스터.」
그렇게 준은 조용히 마르다 던전을 빠져나왔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하네. 일단 저녁을 먹고 볼카누스와 카이엔을 만나야겠어.’
준은 이번 일이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령술사의 등장. 그리고 숲의 아이의 출현.
‘이 두 사건에 뭔가 연관점이 있을지도 몰라.’
아직 뚜렷한 정황은 없지만, 한번 조사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