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혈마족의 흔적을 찾아서 (1)
아침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햇살이 침대에도 드리워졌다. 베개를 품에 껴안고 잠들어 있던 마리가 따뜻한 기운에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곧 그녀가 눈을 떴다.
어제 사이먼과 위험한 싸움을 벌인 뒤 처음 깨어나는 것이었다. 준이 깨끗이 치료해 줬음에도 마리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금제가 깨진 것뿐만 아니라 볼카누스의 힘까지 각성하게 됐으니까.
이제 마리는 마법사라는 간단한 말로 불릴 수 없게 되었다.
‘화염의 계승자’ 정도의 수식어가 어울렸다.
“여긴…….”
처음엔 저승이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싸움이 치열했으니까.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었다. 한옆에 평소에 쓰던 지팡이와 망토까지 보였다.
잠시 후, 마리는 이곳은 자신의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 돌아왔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옆에서 보드랍게 푹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하얗고 작은 고양이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나비야.”
마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사이먼에게 걷어차인 이후로 죽은 줄만 알았다. 이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 충격을 견뎌낸 걸까. 궁금했지만, 마리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야오옹.”
고양이도 잠에서 깼다. 눈을 끔뻑거리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마리의 배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몸을 엎드리곤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충분히 쉬었어. 이젠 괜찮아.”
“야옹.”
“그래도.”
마리는 고양이의 생각과 느낌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속성에 대한 친화력이 뛰어나다 보니 자연적 존재에 대한 감화력 또한 남달랐던 것이다.
“알았어. 좀 더 누워 있을게.”
“야오오.”
그제야 고양이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왠지 좋은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잠시 후 밖에서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아그네스였다. 그녀는 차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마리가 눈을 뜨고 있자 방긋 웃었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언제 일어났니?”
“한참 전에요.”
“아픈 곳은 없고?”
끄덕끄덕.
마리는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견습 치유사 시절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식으로 치유사가 된 몸이었다.
“선생님께서 응급처치를 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 괜찮지?”
“네.”
아그네스는 가까이 다가와 마리의 상처를 확인했다. 마리는 긴장을 풀고 아그네스가 진찰을 하도록 했다.
“혹시.”
“응?”
“스승님이 뭔가 놓쳤을 것 같아서 그러시는 거예요? 이제 언니는 존경받는 아비루나 왕립 병원의 치유사니까.”
“뭐라구? 아하하하. 농담하는 걸 보니까 정말 괜찮은 모양이네. 아니야. 그런 거.”
마리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그네스는 다시 진찰을 시작했다. 우선 외상을 살폈는데, 외상은 전혀 없었다. 마치 갓 목욕을 한 것처럼 피부가 곱고 하얬다.
뒤늦게 사실을 전해 들은 아그네스와 하룬도 전투가 벌어진 곳을 한번 살펴보았다. 말 그대로 혈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선생님의 치유술은 정말 어디까지가 한계인 건지.’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이 나오는 그런 한숨이었다.
마나를 쓸 수 없던 예전에는 그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마나를 쓸 수 있게 된 이후로,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일의 진짜 대단함을 알게 되었다.
‘됐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환자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다시 정신을 차린 아그네스가 꼼꼼히 진찰을 했다.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특별히 문제 되는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아그네스가 흐트러진 마리의 옷을 단정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아주 깨끗해. 긁힌 곳 하나 없을 정도야. 선생님께서 정말 신경 많이 써 주신 것 같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선생님께 해야지?”
끄덕끄덕.
진찰이 모두 끝났지만, 아그네스는 잠시 마리의 옆에 앉았다.
“내려가 보셔야 하는 거 아녜요? 벌써 오전 진료 시작했을 텐데…….”
“10분만. 아니, 딱 5분만 봐줘. 응?”
“알았어요.”
아그네스가 환자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마리였다. 가끔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그네스는 아예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다 한옆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응? 고양이가 있었네?”
“어제 절 지켜 줬어요. 제가 쓰러졌을 때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친구예요.”
“그렇구나. 생명의 은인이네. 잘해 줘야겠다.”
“그럴 거예요.”
오갈 곳이 없는 고양이라면 거둬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털이 보드라운, 매력적인 고양이었다. 누아 진료소의 마스코트가 될 자격이 있었다.
“이름은 뭐니?”
“아직 안 붙여 줬어요.”
“그래? 궁금하네. 어떤 이름을 지어 줄지.”
안타깝게도 휴식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계단을 급하게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그네스 선생님!”
벌떡 일어난 아그네스가 백의를 단정히 하고 차트를 들었다.
“마리. 오늘은 일하지 말고 푹 쉬어. 선생님 지시사항이야. 알았지?”
손을 흔든 아그네스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가만히 있을 마리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일은 둘째치고 어제 그 싸움터로 나가 흔적을 조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척.
고양이가 작은 앞발로 마리의 허벅지를 누른 것이다.
“알았어. 얌전히 누워서 쉴게.”
“야옹.”
* * *
마리가 한창 쉬고 있을 무렵, 준은 진료소를 나섰다. 루치아에게 대진을 맡기고.
진료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혈마족의 흔적을 찾는 게 더 중요했다. 그의 손에는 어제 사이먼이 남긴 빈 검은 병이 들려 있었다.
혈마족을 숭상하는 강령술사가 만든 비약이 틀림없다.
준과 카이엔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곧 왕도로 올라가야 하니 빠르게 흔적을 찾아야겠군.’
마침 이 일에 적합한 존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준은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휘익!
순간 폭풍처럼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준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등장 한번 요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낱 정령이 나타나는 것치고는.
그런데.
「이거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음? 너는…….”
굵직한 목소리에 준은 살짝 놀랐다. 중급 정령인 윈디를 불렀는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람의 정령왕이었던 것이다.
하늘거리는 실크를 걸친 뚱보의 모습이었다. 나름 위엄을 갖추려 노력했지만 크기가 워낙 작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여웠다.
‘뜻밖의 일이군.’
아무리 계약자의 정신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정령왕을 호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정령왕의 의지가 발현되었다는 의미.
「허허. 설마 제 이름을 잊은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놀랐을 뿐이야. 지금까지 윈디가 노력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릴리 고 녀석은 잘하고 있습니까?」
“페어리 퀸이 못 됐다고 칭얼거리기 바쁘지.”
「역시.」
한차례 웃은 정령왕이 출렁거리는 뱃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부르신 겁니까?」
“조사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일엔 바람의 힘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말씀하시지요.」
“윈디를 불러. 괜히 너에게 부탁하기 부담스럽다.”
「허허허.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마스터 얼굴이나 한번 볼까 싶어서 나온 것뿐이니까요.」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설마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준이 그에게 부탁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검은 병에 남은 냄새를 추적해 달라는 것.
「똑같은 냄새를 찾는 거라면 쉬운 일이군요. 곧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지요.」
휘익!
바람의 정령왕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만약 그가 중급 정령인 윈디였다면 조심하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상대는 강령술사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준은 강령술사가 무사하지 못할까를 걱정해야 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흐른 후, 바람의 정령왕이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
「놈을 찾았습니다.」
“위치는?”
「마르다 마을입니다. 마을 북쪽에 던전이 있는데, 거기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더군요. 꽤 음험하게 생긴 강령술사였습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지요.」
“던전?”
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르다 마을 던전은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마계 대공 카이엔과 만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강령술사가 터를 잡았다고?
‘드뇌르 백작이 던전을 폐쇄시키지 않은 건가?’
잠시 생각하던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던전을 폐쇄하더라도 강령술사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잠입해서 일을 벌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전직 기사단장 정도 되는 사람을 폭주시켜 태워버릴 정도의 비약을 만들었다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혹시 알고 계신 곳입니까?」
“예전에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었지. 거기에 교단 사제나 성기사의 흔적이 있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막아두고 방치만 해 둔 모양이군.”
「사제나 성기사를 파견할 여력이 되지 않았겠지요. 이곳도 그렇지만 그곳도 시골 마을이니까.」
“알았다. 고생했다.”
소환을 해제하려고 했지만, 바람의 정령왕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 둥둥 뜬 채 조용히 준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용건이 남았나?”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윈디 대신 소환에 응한 겁니다.」
“아까 내가 물었을 때 정령계에 무슨 일 없다고 대답했던 건 내 착각이었나?”
「허허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징후가 있어서.」
준이 흥미를 보였다. 바람의 정령왕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대답했다.
「숲의 아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왜?”
「그건 저도 모르지요. 그래서 징후라고 말씀드린 거지요.」
“무책임하군.”
「그건 오히려 릴리가 들으면 서운해할 말씀 아닙니까? 허허허.」
과연 정령왕이었다. 농담을 하면서도 의표를 찌르고 들어왔다. 준은 피식 웃어넘겼다. 하긴, 무책임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
준은 잡념을 떨치고 바람의 정령왕이 꺼낸 말에 집중했다.
숲의 아이들이라면, 요정족을 의미한다.
흔히들 말하는 엘프(Elf).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 이후로 자취를 감춘 종족들인데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까?
“아무튼 알았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릴 날이 오기를.」
“다음엔 좋은 일로 보자.”
바람의 정령왕이 사라지자마자 루치아가 나타났다. 해가 저물고 있는 걸 보니 오후 진료까지 모두 마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정령왕이 왔다 간 거 같은데.”
“실프에게 심부름을 좀 시키려고 했는데 본인이 소환에 응하더군.”
“무슨 일이래요?”
“숲의 아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해?”
“답답했나 보죠, 뭐. 가끔 그런 애들 있잖아요. 인간 세상을 동경해서 모험을 떠나려는 철없는 아이들.”
루치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준은 쉽게 긍정하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흔적은 찾았대요?”
“예전 마르다 마을 던전 안에 강령술사가 있다고 해.”
“적당한 곳이네요. 마계 노친네가 남긴 것들을 그대로 이어받으면 되니까.”
“뒤끝은. 아무튼 다녀올게.”
“저녁 식사 전엔 돌아와요.”
고개를 끄덕인 준은 포털을 열고 순식간에 마르다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기척을 숨긴 채 마을 북쪽에 위치한 던전으로 발을 내디뎠다.
‘과연.’
던전 깊숙한 곳으로 다가갈 때마다 혈향이 점점 지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