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불청객 (3)
“크크큭! 이렇게 쉽다니. 진즉 그 노친네를 만났어야 했는데.”
노친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반복됐다.
마리는 직감했다. 이 비정상적인 힘의 배후에 어떤 사람이 관계되어 있음을. 그리고 방금 사이먼이 마신 액체가 발단이 되었음을.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마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마나가 모이질 않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이먼의 공격을 받아 실드가 파괴된 이후 마나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과 힘이 부딪칠 때 발생하는 반탄력.
공격을 막을 때 사이먼이 내뿜는 어둠의 힘에 내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마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누워만 있으면 사이먼의 검에 목숨이 끊길 테니까.
― 무사히 돌아와라.
순간 머릿속에서 생생히 떠오른 준의 목소리.
마리가 눈을 번쩍 떴다. 텅 빈 것 같던 가슴이 격동하며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맞아. 무사히 돌아가야 해. 무사히 돌아가서 스승님과…….’
하지만 그 바람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가녀린 몸을 파르르 떨며 일어나는 마리의 모습을 본 사이먼이 씨익 웃으며 다가왔던 것.
“제법 명줄이 길구나? 지난번에 진 빚은 갚아야겠지? 이자가 쌓이기 전에 말이다.”
퍽!
사이먼이 발길질했다. 마리는 짧은 탄식과 함께 다시 바닥을 굴렀다.
바로 그때였다.
“야옹!”
바람을 일으켜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놨던 그 아기고양이였다. 작은 발을 열심히 놀리며 마리의 옆으로 달려왔다.
긴 은빛 머리카락이 바닥에 뒤엉켜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는 마리의 뺨에 얼굴을 부비더니 혀로 핥기 시작했다.
“……응?”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마리가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비야. 여긴 위험해.”
“야오옹.”
고양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울었다. 마치 힘을 내라는 듯 마리의 뺨을 계속 핥았다.
하지만 그 평화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앞쪽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 벌레 같은 건 또 뭐야?”
“안 돼!”
퍽!
사이먼의 발길질에 고양이가 한쪽으로 날아갔다. 화들짝 놀란 마리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고양이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걸까.
“나비야…….”
마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무런 죄 없는 연약한 존재를 짓밟아야 하는 걸까.
문득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제에 걸려 매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던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사이먼의 발길질에 날아간 고양이와 겹쳐 보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절망감.
저 이름 모를 하얀 고양이도 똑같이 느끼고 있지 않을까. 만약 숨이 붙어 있다면.
“왜…….”
마리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한줄기 궤적을 그렸다.
톡.
그때, 믿기 힘든 일이 펼쳐졌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처음에는 작은 파문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붉은 기운이 점차 커져 가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뭐, 뭐야? 불인가?”
사이먼은 당황했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붉은 기운은 일정한 패턴을 그렸다. 어느새 마리를 중심으로 한, 복잡한 모양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검을 휘저어 보아도, 검기를 날려 보아도 그 붉은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젠장!”
그제야 사이먼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마리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리가 고개를 들며 눈을 부릅떴다. 용암보다 더욱 붉은 안광에 소름이 돋았다.
터엉!
“크어억!”
사이먼이 뒤로 튕겨 나갔다.
굴러간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튕겨 나갔다. 미증유의 힘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적중당하는 순간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두 번 다시 눈을 뜰 수 없었을 것이다.
“커헉! 쿨럭! 크허억! 이게 대체…….”
사이먼은 검은 피를 토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그는 집중하며 안력을 돋웠다.
멀리 떨어진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은 이제 완연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붉은 오라가 펼쳐졌다. 인간이 낼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이었다.
“이대로 당할쏘냐!”
사이먼도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끈적거리는 검은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곧 비릿한 미소를 지은 그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우웅!
마리의 쉴드를 깨부순 그 검기보다 훨씬 강한 힘이 그의 검을 감쌌다.
검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내질러지던 찰나.
무표정의 마리가 손을 뻗었다.
까앙!
캐스팅도 없이 발현된 미지의 실드가 사이먼의 공격을 막아 냈다. 실드는 깨지지 않았고, 오히려 공격을 펼친 사이먼이 내상을 입었다.
그는 또다시 검은 피를 한 움큼 내뱉었다.
“크어어…….”
사이먼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거리는 오히려 더 좁혀졌다.
마리가 움직였다.
화르륵!
그녀가 손을 뻗자 화염이 치솟았다. 뱀처럼 꿈틀거리던 화염은 길고 강력한 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말 그대로 화염의 검.
마리는 그것을 힘차게 휘둘렀다.
사이먼도 또다시 극한의 힘을 발휘했다. 모든 힘을 검에 실어 그녀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스컹!
믿을 수 없게도, 사이먼의 검은 깨끗이 잘려 나갔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경험한 사이먼은 화염의 검 앞에서 전의를 상실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젠장! 어떻게 이런 일이…… 크억!”
마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이먼을 내려다보았다.
화염의 검은 그의 목을 향해 있었다.
사이먼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채 계속 피를 토했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렸지만, 마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어어어!”
순간 사이먼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마치 눈알이 터질 것 같이 시뻘게졌다.
그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그게 사이먼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마리가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이먼은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목숨이 끊어진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마법처럼 몸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모든 싸움이 끝났다.
마리의 손에서 화염의 검이 소멸되었다. 그녀의 새빨간 눈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대로 그녀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렸다.
하지만 이번만은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난 준이 쓰러지려는 그녀를 사뿐히 안았다.
“정말 고생했구나.”
“…….”
마리는 대답이 없었다.
준은 그녀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뒤 상태를 살폈다. 마나를 흘려 내상을 살피던 준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또 하나의 결계가 깨졌군. 거기에 볼카누스의 힘까지 각성하게 됐어.’
그가 원하던 최상의 결과가 나왔다.
전에 한 번 각성하긴 했지만, 마리의 심장을 감싸던 결계는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그녀의 힘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더 이상 강해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최근 마리는 생활 마법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준은 그녀를 돕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도록.
물론 정말 위험한 순간엔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가벼운 타박상 정도야. 잘했다. 이제 곧 편안해질 거다.’
준은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아낌없이 마나를 쏟아부었다. 곧 마리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참, 고양이가 있었지?’
준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마리에게 덮어 준 다음, 자리에서 벗어났다. 고양이는 얌전히 쓰러져 있었는데, 운 좋게도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위독한 상황이었다. 뼈가 부스러졌고,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너도 고생했다. 조금만 참아라.’
준이 손을 뻗자 강렬한 치유 마법이 고양이의 전신을 감쌌다. 부서진 뼈와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곧 고양이의 숨이 편안해졌다.
‘이 정도면 됐고.’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다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돌아온 준은 사이먼이 남긴 흔적을 살폈다. 그중 가장 커다란 재를 집어 들었다.
그가 물끄러미 재를 살펴보던 그 무렵.
“그건 혈마족의 힘이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사이로 마계 대공 카이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이 물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나?”
“한참 됐지. 혈향이 너무 독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더군.”
“왜 나서지 않았지?”
“그대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서로 눈빛만 봐도 어떤 의중인지 알 정도가 됐다. 고수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혈마족이 나타날 줄은 몰랐어.”
“나도 마찬가지다. 마계와 함께 소멸한 줄 알았는데. 탈주한 존재가 있는 모양이군.”
혈마족은 한마디로 타락한 마족이 모인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광기에 사로잡힌 채 살육을 즐긴다. 전통적으로 마족과 척지고 있다.
때문에 마계의 고위 귀족인 카이엔의 입장에서도 탐탁지 않은 존재가 나타난 셈이다.
“이래서 패잔병 놈들은 안 된다니까!”
그때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과 카이엔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을 향했다. 볼카누스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카이엔이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패잔병이라 부르는 건 좋지만 구분은 확실히 해라. 혈마족 놈들과는 다르다는 걸.”
“패잔병이나 패잔병의 패잔병이나 거기서 거기지.”
“…….”
“커흠! 감히 위대한 레드 드래곤 로드의 편린을 이어받은 자를 공격하다니. 이런 무모한 새끼를 봤나.”
슬쩍 말을 돌린 볼카누스가 마리의 상태를 살폈다. 카이엔이 혈마족의 힘을 느끼고 나타났다면, 볼카누스는 마리의 힘이 개방된 것을 느끼고 나타난 것이었다.
“호오. 드디어 나의 힘을 제대로 이어받았군!”
“넌 언제 왔냐?”
“지금 그게 중요해? 그 짝퉁 마족 새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부터 알아내야 할 거 아니냐?”
“오.”
“뭐냐? 그 감탄사는.”
“간만에 생각 있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뭣이!”
설마 이 상황에서 도발할 줄이야.
잔뜩 흥분한 볼카누스를 뒤로한 채, 준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흔적을 쫓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검은 병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사이먼이 이 병에 담긴 액체를 마신 것 같은데.”
준과 카이엔이 머리를 맞댔다.
“어떤 것 같나?”
“흐음.”
카이엔이 손가락으로 병을 휘젓더니 남은 액체를 자신의 혀에 댔다. 그가 눈을 감으며 맛을 음미했다.
“혈마족이 직접 나선 것 같지는 않군. 완성되지 않은 비약이다. 진짜 혈마족의 힘이 깃들면 재로 변하는 이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지.”
“힘의 폭주를 이기지 못하고 타 버린 건가?”
“쉽게 말하면 그렇다.”
“그럼 얼치기 강령술사의 짓이겠군.”
“그럴 확률이 높다. 아무튼 이번 일은 내가 맡지. 혈마족은 우리의 적이기도 하니까.”
준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하마. 제자가 받은 빚은 돌려줘야지. 딱 백 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