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불청객 (2)
“그러니까 술 마시게 하지 말라니깐!”
기다렸다는 듯 아그네스가 하룬을 구박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다.
“에이. 겨우 두 잔 가지고 그래? 이거 그렇게 센 술도 아니라고. 말 그대로 잠깐 바람 쐬러 갔겠지.”
“취해서 비틀거리는 거 못 봤니?”
“일어설 땐 완전히 깼잖아? 마법으로 뭔가 했겠지. 왜. 넌 못 해? 전공서만 파지 말고 마리 선생님께 좀 가르쳐 달라고 하셔.”
“됐네요.”
인상을 쓴 아그네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제 잠깐 보였던 그 든든하고 멋있는 모습은 착각이었나.
그제야 하룬은 자신의 장난이 지나쳤다는 걸 자각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런 거 가지고 삐지기는. 딸꾹!”
“너도 취했니? 에휴, 내가 따라가 볼게. 아무튼 다음에 또 그러기만 해 봐.”
“쳇.”
입을 빼죽거린 하룬이 혼자 술을 홀짝였다. 일어선 아그네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리는 진료소 쪽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마리를 따라가려는 순간, 준이 그 앞에 나타났다.
“어, 선생님?”
“내가 다녀오마. 걱정하지 말고 하룬하고 좀 더 놀아 주도록 해.”
“알았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뭔가 좀 갑작스러웠지만, 곧 헤어질 친구를 배려하라는 말로 이해하고는 다시 하룬과 어울렸다.
물론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또다시 두 사람은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하, 진짜 잔소리 대마왕. 왕도엔 언제 가냐? 빨리 사라져 버려!”
“알게 뭐니? 나중에 왕도에 와서 아는 척하기만 해 봐!”
“딸꾹!”
동시에 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목적지는 화장실이 아니었다. 마리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목적지 부근에서는 명백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끈적거리는 어둠의 기운까지 동시에 느껴졌다. 준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 * *
신축 진료소 뒤쪽에 넓고 큰 벌판이 있다. 준이 진료소 별관을 세울 만한 곳으로 낙점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벌판 주변을 울창한 숲이 감싸고 있다. 뒷산까지 이어지는 숲이었다.
얼마 전 사이먼과 어쌔신들이 진료소를 습격한 이후, 준은 이곳에 경보 장치를 설치해 두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 있다면 마리가 알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진료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기사단원들은 걸리지 않게 손을 써 두었다. 마법공학의 정수를 깨우친 준에게는 쉬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지팡이가 무언가 기척을 느끼고 반응한 것이다.
‘설마 그 사람이?’
마리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느낌은 분명 전에 느꼈던 그 살기와 비슷했다.
불청객이 분명했다.
‘서둘러야겠어.’
다리에 마나를 실어 속도를 올리려던 마리가 우뚝 멈춰 섰다.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마리.”
준의 목소리였다.
돌아선 마리가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괜찮아요. 제가 처리할게요. 누군지는 대충 알 것 같아요.”
“술 마신 거 같던데?”
“술기운은 모두 배출했어요.”
마리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 손끝으로 주기를 배출한 모양이다. 가르쳐 주지 않은 마법이었지만,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평소라면 준은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이 느낀 상대의 기운은 보통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끈적거리는 어둠의 기운까지.
“조심해야 한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만큼 무서운 상대는 없는 법이니.”
“스승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무사히 돌아와라.”
“명심할게요.”
준은 마리를 보내 주었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실전 경험만큼 진귀한 기회는 없다. 그간 누아 마을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마리의 금제는 아직 남아 있는 상황. 준은 이번 기회에 그녀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를 바랐다.
‘걱정하지 마라. 볼카누스의 축복이 너를 지켜 줄 거야.’
혼자가 된 마리는 다리에 마나를 주입했다.
순간 그녀의 몸이 용수철처럼 바닥을 튀어 올랐다. 평범한 인간이 보일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잠시 후.
마리가 잔디를 밟으며 사뿐히 착지했다. 동시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했다.
대신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마리의 시선을 끌었다.
“야오옹.”
고양이었다.
작고 귀여운, 새하얀 고양이가 총총 걸어오더니 마리의 발치에 서서 머리를 부비기 시작했다.
평소 무표정일 때가 많은 마리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입가에 미소가 걸리게 할 만큼 귀여웠다.
“엄마를 잃어버렸니?”
“야옹.”
“안됐구나.”
안쓰러운 마음에 마리는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고양이는 마치 어미를 만난 것처럼 머리를 몇 번 부비더니 눈을 감았다.
마리는 로브를 벗어 고양이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마력이 깃들어 있는 로브라 고양이는 숙면을 취했다.
이름 모를 고양이를 한번 쓰다듬어 준 마리가 다시 지팡이를 쥐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침입자 경보는 고양이 때문에 울린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천천히 돌렸다.
“이런, 이런. 고양이한테 시선을 빼앗기다니. 내가 그렇게 하찮게 보였나?”
놀랍게도 그곳엔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기척을 완벽하게 숨기면서.
실력에 비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인지 넝마인지 알 수 없는 천을 걸치고 있는 사내였다. 나이는 제법 있어 보였는데, 때와 피가 섞여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사이먼.”
마리가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우던 가문의 제2기사단장으로 권세를 누렸던 사내. 그는 정기를 잃은 눈으로 마리를 노려보고 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이곳엔 왜 찾아온 거죠?”
위협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사이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료소 쪽으로.
아니, 어쩌면 저 멀리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목표는 진료소구나. 복수를 하러 온 게 분명해.’
마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지팡이를 꼭 쥐었다.
“왜 이곳에 온 거죠? 전 두 번 묻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대답해요.”
콧방귀를 뀐 사이먼은 손에 든 병을 입에 대고 쭉 들이켰다. 액체가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끄윽. 어으, 좋다. 후후후. 왜 이곳에 왔냐고? 이유야 간단하지. 이젠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돌아갈 곳이 없어진 건 당신 탓이에요. 당신의 추악한 욕심 때문이죠.”
“크하하하! 추악한 욕심? 맞아.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마법사 나으리! 크큭. 크크크크큭!”
사이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굴의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절망을 넘어,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소름이 돋았을 터.
하지만 상대는 마리였다. 그녀는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사이먼을 몰아붙였다.
“돌아가세요. 오늘은 마을에 경사가 있는 날이에요. 조용히 물러간다면 자비를 베풀겠어요.”
“이런 시펄! 돌아갈 곳이 없다고!”
켈세타의 주인인 드뇌르 백작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자객을 풀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이먼을 추격했고, 궁지에 모는 데 성공했다.
오늘도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누아 마을까지 온 이상, 이제는 도망칠 곳이 없다. 자객들은 하나같이 고수들이었다.
물론 사이먼도 백작가의 기사단장 출신인 만큼 고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량 공세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산에 숨어든다고 해서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마을에 집이라도 한 채 내어달라는 건가요?”
“크크크큭. 그거 좋은 생각이군.”
“좋아요. 알겠어요. 뜻대로 해 드리죠.”
마리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순간 강맹한 마나가 몰아치더니, 지팡이에 달린 큐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리의 두 눈이 신비로운 푸른빛을 머금었다.
마치 마나의 여신이 강림한 듯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렴.”
마리가 손을 뻗어 바람을 일으켰다.
새끼 고양이를 포근히 감싸던 망토가 바람에 쓸려 저 멀리 날아갔다. 워낙 부드러운 마법이라 고양이는 잠에서 깨지 않고 바닥에 착지했다.
마리가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젠장! 술이 다 떨어졌나?”
혀를 내밀고 술병을 툭툭 흔들던 사이먼이 술병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쨍그랑. 바위에 부딪힌 병은 산산조각이 났다.
“좋아…… 그럼 이제 다른 걸 마셔야겠군.”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불길한 느낌의 검은 병이었다. 악취가 대단했는데, 사이먼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 액체를 한 번에 들이켰다.
독약이 아닐까 싶은 그런 액체였다.
그런데.
“컥! 으으! 으으윽!”
사이먼이 눈을 부릅뜨며 목을 부여잡았다.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식도와 위장이 차례대로 녹아내리는 절망적인 느낌.
하지만 그 끝없는 고통 뒤에 찾아온 것은 강력한 힘이었다.
투두둑!
고통은 사라지고 팔과 다리의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이먼의 몸은 근육질로 변했다.
“호오. 노친네 말이 사실이었군. 아주 좋아. 하하하! 힘이 넘쳐흐르고 있어!”
스릉!
사이먼이 검을 뽑았다.
거친 쇳소리와 함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저승길을 함께해 준다니 고맙구나. 그게 계집이라면 더 좋겠지. 흐흐흐!”
흐리멍던하던 사이먼의 눈에 색욕이 들끓었다. 지독한 살기를 품은 그가 검날을 혀로 핥았다.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
파파파파파파파팟!
마리의 마법이 전개되며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땅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칼날이 회전했다. 손을 대기만 해도 벨 것 같이 예리했다. 곧 마리가 지팡이로 사이먼을 가리키자 수십 개의 칼날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흥! 애들 장난이군!”
휘휙! 따다다다당!
금속음과 함께 함께 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잠시간의 정적. 시간이 흐르며 뽀얀 흙먼지 너머로 사이먼의 실루엣이 보였다.
마법은 실패했다. 그는 멀쩡했다.
어느새 사이먼의 검엔 시퍼런 검기가 서려 있었다. 몇 개는 피하고, 나머지는 모두 튕겨 낸 것이다.
마리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매직 미사일.”
우우웅!
지팡이의 큐브가 좀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수십 개의 마력탄이 뿜어져 나가 허공을 맴돌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멀티 캐스팅으로 강화된 매직 미사일은 막대한 물량으로 당장이라도 사방을 폭격할 기세였다.
그런데도 사이먼은 여유를 부렸다.
“귀여운 아이로군. 그렇게 느려서 옷깃 하나 스치겠나?”
“아?”
순간 전방에 있던 사이먼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리가 움찔 놀랐다.
허공을 떠다니던 마력탄이 일제히 사라졌다. 마법을 취소시킨 마리가 뒤로 힘껏 물러났다.
부웅!
찰나의 순간 마리가 있던 곳이 잘려나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검기에 몸이 베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크하하하!”
무섭게 튀어 나간 사이먼이 다시금 흉하게 검을 휘둘렀다. 마리는 마나를 일으켜 지팡이를 뻗었다.
까앙!
지팡이가 공격을 간신히 막아 냈다.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엄청난 통증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했다.
‘대체 뭐지? 이 어두운 힘은…….’
마리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잠시 손이 가벼워지나 싶더니 머리 위에서 빛처럼 검이 떨어지고 있었다.
서걱!
아슬아슬하게 사이먼의 공격이 빗나갔다.
대신 마리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잘려나갔다. 공격은 이어졌고, 마리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실드.”
쩌저적!
사이먼의 검이 흉폭하게 실드를 찢어발겼다.
그 강력한 힘을 감당하지 못한 마리가 뒤로 나뒹굴었다. 언제나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지팡이도 멀리 굴러가 버렸다.
마리의 몸 위로 스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