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불청객 (1)
하룬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진료소 2층으로 올라갔다. 평소와는 달리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그가 멈춰선 곳은 아그네스의 방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는데, 안에서 콧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슬쩍 내밀어 보니 아그네스가 흥얼거리며 커다란 상자에 짐을 싸고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하룬은 들어갈까 말까 머뭇거렸다.
마음이 복잡했다.
처음 아그네스가 왕립 병원의 치유사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둘도 없는 친구의 성장이 부러웠다. 자신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문의 기사로 있는데 그녀는 왕실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그렇다고 시샘하는 건 아니었다.
조바심에 가까운 아쉬움이었다. 그리움과 부러움이 섞인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
작년 켈세타 성에 연수를 받으러 갈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함께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멀리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격차를 더 이상 좁히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룬. 거기서 뭐 하고 있니?”
“아아. 뭐, 그냥.”
아그네스가 짐 정리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곤,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찾아와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꿈 깨라.’
하룬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아마 왕도에 갈 생각으로 벌써부터 저렇게 들뜬 것이리라.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주군께 얘기 들었어. 왕도로 간다고?”
“응. 그렇게 됐어.”
“축하해. 너라면 꼭 성공할 줄 알았어.”
“영혼 하나도 없이 말하는 거 좀 봐. 가끔은 좀 진심을 담아서 축하해 주면 안 되니?”
“하하하! 들켰나?”
하룬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 문 근처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섰다.
“언제 출발하는데?”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없어. 국왕 폐하께서 사자를 보내셨다고 들었어. 교지 받으면 바로 올라가려고.”
“주군하고 같이 가지?”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래도 주군께서 저택을 사신 게 도움이 되네. 그게 아니었으면 외지에서 고생하는 거잖아. 네 집처럼 편하게 머물면 되겠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주 힘들 거라고 겁주시더라. 낮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야 하니까. 아마 여기가 그리워질지도 몰라.”
“그러게.”
물끄러미 하룬을 바라보던 아그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하다?”
“뭐가?”
“옛날엔 어딘가에 이상한 게 분명 있을 거라며 내 방도 막 뒤지고 그랬잖아. 침대에 드러눕기도 하고. 문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너답지 않아서.”
“흠흠…… 왜 쓸데없이 옛날이야기를. 그건 철없을 때나 하던 이야기지.”
“어머. 지금은 철 좀 들었니?”
하룬은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그네스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반면 그녀는 재밌다며 소리 내어 웃는다.
결국 하룬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아카데미 강의도 듣게 됐다며? 귀족 친구들 많이 만들겠다.”
“내가 대단한 출신은 아니라서 많이 어렵겠지만 노력해 볼 거야. 진심은 언젠가 통하는 법이니까.”
“대단한 출신은 아니어도 넌…….”
하룬은 말을 도중에 그만두었다. 차마 ‘누구보다 예쁘니까 괜찮아’라는, 그런 고백에 가까운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넌 뭐?”
“그냥. 뭐. 너 없으면 허전할 거 같고 그렇다고. 아, 여름도 아닌데 오늘 왜 이렇게 덥지?”
“괴롭힐 사람 없어서 벌써부터 걱정이니?”
“그러게. 하하하.”
다시 한번 코를 슥 문지른 하룬이 손을 들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그네스가 따라 나온 것이다.
“저기, 하룬.”
“왜?”
“선생님께 부탁드려 보는 게 어때? 왕도에 가게 해달라고. 너도 왕도에 가는 거 꿈이었잖아.”
예전의 하룬이었다면 좋은 생각이라며 반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젓하게 어깨를 폈다. 갑주와 망토를 걸쳐서 그런지 더욱 든든해 보였다.
“단장님도 없는데 나까지 마을을 떠날 순 없어. 왕도에 가고 싶긴 하지만 나중을 기약해야지.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겠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너 좀 멋있다?”
“하하핫! 이 몸의 진가를 이제야 파악하다니 서운하군.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누아 마을의 기사단의 에이스 하룬이라고!”
씨익 웃은 하룬은 다시 갈 길을 걸었다. 아그네스의 조언에 잠시 혹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바이런이 자리를 비운 마을을 어떻게 지킬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그네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아그네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오전 진료가 끝나자마자 진료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말에 오른 기사와 병사들이 나타났고, 그 사이로 고급스러운 마차가 보였다.
오늘의 주인공인 아그네스는 이미 밖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왕의 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준과 루치아, 하룬, 마리 등 진료소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뭘 저렇게 치렁치렁 달고 오는 게야? 하여간 인간들의 허례허식이란. 쯧쯧.”
레드 드래곤 로드 볼카누스의 모습도 보였다. 막 약초를 캐고 왔는지 약초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흙 묻은 옷을 보니 이제는 영락없는 촌부처럼 보였다.
그리고 뒤편에 있는 큰 나무 뒤에도 기척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계 대공 카이엔이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아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아그네스는 모르고 있지만, 그녀는 두 초월자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를 받고 있었다. 각자 다른 방법으로.
“와우! 어마어마하네요. 저게 왕실기사단입니까?”
“그래. 하지만 보이는 건 일부다. 본대는 저보다 더 엄격하지.”
“캬! 갑옷 번쩍거리는 것 좀 보십쇼. 우리 주군도 좀 보고 배우셔야…… 흠흠, 아. 농담입니다. 아무튼 저도 언젠가 저기에 설 수 있겠죠?”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룬이 감탄할 만큼 국왕이 보낸 사자는 실로 대단한 위엄을 보였다.
아비루나 왕국의 위상이 대륙에서 어느 정도인지 모르던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선두에 선 수석 기사가 명령을 내렸다.
“도열!”
기사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통로를 만들었다. 얼마나 연습을 한 건지, 말에서 내림과 동시에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곧 시종이 붉은 융단을 깔았다. 자로 잰 듯 진료소 입구에 정확히 도달했다.
시종이 마차의 문을 슬쩍 열었다.
“나으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만.”
“으음.”
살집이 있는 중년 사내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곳 누아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금빛의 무척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융단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준이 아그네스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제야 아그네스가 앞서 나가 사내를 맞았다.
“그대가 아그네스 선생인가?”
“네.”
“국왕 폐하의 전언을 모시고 왔다.”
헛기침을 한 중년 사내가 느긋하게 교지를 펼치더니 읽어 나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아비루나 왕국과 신민을 위해 의술을 펼쳐 달라는 말이었다.
교지를 돌돌 말은 중년 사내는 그것을 아그네스에게 건넸다.
“이제 자네는 아비루나 왕국이 자랑하는 왕립 병원의 치유사라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아그네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꾸벅 인사하려다 멈칫했다. 사자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하라는 준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교지를 받은 다음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근데 이게 끝인가요?”
“뭐 궁금한 점이라도?”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후후. 귀여운 아가씨군. 그럼 왕도에서 만나지.”
사자는 여유를 부리며 마차로 돌아갔다.
기사들이 호위를 시작했다. 그렇게 왕의 사자를 태운 마차는 조용히 진료소를 떠났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모여든 사람들이 일제히 아그네스에게 달려들었다.
“축하해요! 아그네스 선생님!”
“거봐! 내가 뭐랬어? 나중에 크면 훌륭한 치유사가 될 거라고 했잖아!”
“약이 잘 안 듣는다고 투덜거릴 땐 언제고?”
“하하하하!”
마을 사람들과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아그네스는 다시 교지를 펼쳐 보았다.
두 눈이 떨렸다.
물기가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감격하고 있었다.
“선생님……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죠?”
“꿈이면 뭐 어때.”
“맞아요. 꿈이면 뭐 어때요? 안 깨면 되지. 늦잠 자버릴 테다! 진료는 선생님이 대신 봐 주세요. 알았죠?”
모인 사람들이 좋다며 웃었다.
그때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모인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지팡이를 든 촌장 아론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할아버지!”
아그네스가 뛰어가 할아버지를 꼭 안았다. 아론은 허허 웃으며 손녀의 등을 다독였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이제 우리 마을의 자랑이 되었구나.”
“다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원 녀석도. 영주님께서 들으시면 무척 서운해하시겠구나.”
“앗!”
아그네스가 입을 가린 채 배시시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날 밤, 누아 마을에 잔치가 열렸다.
준과 아그네스의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다. 호프만은 주류 창고를 과감히 열었고, 다른 마을 사람들도 각자 먹을 만한 것들을 챙겨 왔다.
그러다 보니 자리가 더욱 풍성해졌다.
마침 날씨도 따뜻하니 좋았다. 거대한 모닥불이 펼쳐졌고, 흥겨운 잔치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마리의 지팡이가 울기 전까지는.
* * *
“왜 애한테 술을 먹이고 그러니?”
어른들의 틈에서 겨우 빠져나온 아그네스가 하룬을 타박했다. 마리에게 술을 따라 주던 하룬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마리가 무슨 애야? 우리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래도. 술 마셔 본 적은 없잖아.”
“저 마실 수 있어요.”
가득 찬 술잔을 내려다본 마리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그네스는 왠지 걱정이 됐다.
“괜히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요.”
“에휴. 하여튼 오빠한테 나쁜 것만 잔뜩 배우고…… 그럼 딱 한 잔만 마셔. 알겠지?”
끄덕끄덕.
귀엽게 고개를 끄덕인 마리가 심호흡을 하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크으.”
“오오! 원샷을!”
두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썼다. 마리는 한참이나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아그네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하룬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하! 드디어 우리 마리가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됐구나! 어른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한다.”
“으으…….”
순식간에 양 볼이 새빨개졌다. 누가 봐도 술이 올라온 게 분명했다.
“마리야. 괜찮니?”
끄덕끄덕.
기분 탓일까.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머리의 움직임이 취한 듯 흔들리는 것 같았다.
마리가 손에 쥔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주세요.”
“안 돼. 언니랑 한 잔만 마시기로 약속했잖아?”
“한 잔으론 술의 맛을 알 수 없어요.”
워낙 진지해 아그네스는 더는 말리지 못했다.
하룬이 술을 다시 채워 주었다. 이번에도 잔을 진지하게 응시하던 마리는 눈을 꼭 감고 술을 마셨다.
“크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썼다.
그때, 눈앞이 핑 돌았다. 정확히는 눈앞의 풍경이 한 바퀴 뱅글 돌았다.
“어…….”
“괜찮니?”
마리가 몸을 휘청이자 아그네스가 그녀를 부축했다.
바로 그때였다.
마리가 눈을 번쩍 뜨더니 똑바로 앉았다.
드드드드!
한옆에 놓인 지팡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준도 뭔가를 느꼈는지 마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지팡이를 쥔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