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26화 (126/175)

126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누아 마을 진료소는 오늘도 환자로 북적였다.

준과 루치아가 당분간 휴진한다는 소문이 퍼져 환자가 좀 줄긴 했지만, 아그네스가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 선생에 그 제자’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환자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정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보람차기도 했는데, 결국엔 더 열심히 해서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럼 준 선생은 오려면 아직 멀었남?”

“잘은 모르겠어요. 왕도에서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으셔서요.”

“응? 놀러 간 거 아니여?”

“아니에요. 일하러 가신 거예요. 왕도에서 진료 의뢰가 있었거든요.”

“역시 우리 선생이구먼. 이제 유명한 분이 됐으니 우리가 보기는 어려울랑가?”

“에이, 설마요.”

아그네스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진료에 집중했다.

중년의 부인은 내리막길에서 넘어져서 부상을 당했다. 무릎 주변이 완전히 까졌고,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아그네스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약물을 묻힌 거즈로 상처를 슬슬 닦아 냈다.

“많이 아프세요?”

“참을 만혀.”

“일단 지저분해진 부분부터 닦아 내고 마법으로 치료해 드릴게요. 조금만 참아 주세요.”

단순 찰과상이었지만 아그네스는 꼼꼼히 살폈다.

환자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뼈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아그네스를 지켜봐 온 부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주 그냥 든든허네. 이제 진료소를 물려받아도 되것는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선생님께 배워야 할 게 아직 산더미예요. 지금은 선생님 대신 진찰을 하고 있는 거구요.”

아그네스는 손을 뻗어 마나를 일으켰다.

새하얗고 신성한 기운이 천천히 상처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리지만 중년 부인의 상처는 분명히 아물고 있었다.

“아이구. 션하다.”

잠시 후 치료가 모두 끝났다.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었다. 아그네스는 거즈로 남은 핏자국을 말끔히 닦았다.

“잠시 일어나 보시겠어요?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 보세요. 편하게.”

“이렇게?”

“네! 아주 잘하셨어요. 불편하시진 않아요?”

“괜찮네.”

“다행이네요. 약은 필요 없을 거 같으니 푹 쉬세요.”

걷는 데 이상도 없고, 통증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아그네스가 차트에 기록한 뒤 진료를 마무리했다.

그때, 중년 부인이 팔꿈치로 아그네스를 은근히 찌르며 물었다.

“근데 준 선생이랑은 요즘 어뗘? 떨어져 있으니 더 애틋한감?”

“예? 그게 무슨…….”

“준 선생 정도면 신랑감으로 아주 훌륭허지. 둘이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하구.”

“아이참. 아주머니도.”

“어떻게 진도는 좀 뺐남?”

“지, 진도요?”

아그네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가끔 이렇게 농담을 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두 사람이 썩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호흡도 잘 맞았고.

그때, 뜬금없이 나타난 하룬이 진료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봐요, 아주머니! 진료 다 보셨으면 그만 가셔야죠. 여기서 잡담하시면 뒤에 환자분 기다린다구요. 커흠!”

“아이구야. 쯧쯧. 니도 참 고생이다. 응? 그래서 장가나 가겠나?”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조심히 가십쇼! 흥.”

“너만 흥이나? 나도 흥이다!”

찰싹!

“으악!”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중년 부인은 하룬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고 진료실을 나섰다.

엄살로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하룬이었다. 손찌검에 펄쩍 뛰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휴. 기사가 되면 뭐하나. 이렇게 사람들에게 무시 받으면서 사는데. 아윽. 손 겁나 매우시네. 아주머니 장수하시겠어.”

“오히려 그게 좋지 않니? 준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윗사람 노릇 하는 것도 웃기잖아. 이 조그마한 마을에서.”

“뭐, 그건 그래.”

손가락으로 코를 한번 쓱 문지른 하룬이 슬그머니 아그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그네스는 차트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군께 뭐 연락 온 건 없었어?”

“없는데. 왜?”

“아니. 그냥.”

중년 부인이 했던 말이 신경이 쓰여 물었다.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싶어서.

루치아가 나타난 이후로 좀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룬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방심하고 있다가 아그네스를 빼앗길 것 같아서.

정작 당사자인 아그네스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듯한 눈치이긴 하지만.

“한가해 보여서 부럽네. 누군 이렇게 하루 종일 진료실에서 나가질 못하고 있는데. 훈련 없니?”

“없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겠지.”

“그럼 나가서 일이나 좀 돕든가.”

“진료 끝나고 뭐해? 저녁에.”

아그네스는 대답 대신 두꺼운 중급 치유술 전공서를 흔들어 보였다.

“아~ 맞아! 그렇지. 중급 치유사가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하하. 바쁘겠네. 그래도 좀 쉬엄쉬엄하는 게 좋지 않아?”

멋쩍게 웃은 하룬이 데이트 신청을 하려던 바로 그때, 견습 치유사 하나가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아까 복통으로 입원하신 지크 씨요. 증세가 심해졌어요! 구토 증상도 있고요!”

“예? 약은요?”

“한 시간 전에 드셨어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즉시 환자가 있는 입원실로 달렸다.

“아이고! 나 죽네!”

“지크 씨. 괜찮으세요?”

“좀 어떻게 해 줘 봐! 너무 아파!”

환자는 상당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옆구리를 손으로 잡으며 뒹굴고 있었다.

경험이 많지 않았던 아그네스는 머리가 엉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환자는 소리치고, 보호자는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사정하고, 시간은 촉박하고.

아그네스가 멍하니 있자 견습이 채근했다.

“아그네스 선생님!”

“아…… 미안해요. 스캐너. 일단 스캐너를. 검사해야겠어요.”

“예!”

아그네스는 다시 환자를 살폈다. 환자의 통증은 충수가 있는 옆구리 쪽이었다. 충수염을 의심해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처방했었다.

일단 아그네스는 마나를 흘렸다.

환자의 호흡이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이었다. 병소를 찾아야만 한다.

“스캐너 왔습니다!”

“핸들.”

슬라임 정제액을 듬뿍 바른 뒤, 핸들을 환자의 옆구리에 밀착시켰다.

아그네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검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환자의 통증이 다시 격렬해질 때까지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다급한 마음에 평소보다 시야가 좁아진 탓이다.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고개를 가로저은 아그네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은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 준의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왜 그렇게 당황하고 있어? 치유사가 당황하면 환자들은 더 겁먹는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선생……님?”

믿을 수 없었다.

온다는 소식도 없었는데 언제 도착한 걸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크 씨가 예전부터 물을 잘 안 드신다는 거, 잊었나?”

“아!”

“잘 봐.”

준은 환자에게 이제 괜찮을 거라고 잘 타이른 다음, 등을 노출시켰다. 그리고 척추와 갈비뼈가 만나는 부분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어윽!”

환자의 통증이 심해졌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로결석이다. 신장과 요관 쪽을 살펴봐.”

아그네스가 재빨리 스캐너를 조작했다. 병소가 잘 보이지 않아 각도를 바꿔 보았다. 곧 작은 덩어리가 화면에 잡혔다.

“결석이에요!”

“좋아. 크기가 애매해서 잘 안 보였겠군. 위치 확인하고 마나 요법으로 치료해.”

“…….”

긴장이 확 풀어졌다.

아그네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기색이었다. 준은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고 밖으로 나왔다. 루치아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치아 선생님도…….”

두 스승이 모두 돌아왔다.

아그네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표정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 * *

환자가 안정을 되찾은 걸 확인한 아그네스는 준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맸다. 그런데 방에도 없고 집무실에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진료실로 달려갔다.

준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잘 마무리했어?”

준은 책을 덮었다. 환하게 웃은 아그네스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대체 언제 오신 거예요? 온다는 연락도 못 받았는데.”

“방금 왔어.”

“왕도는 어떠셨어요?”

“그냥 그랬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더군.”

“에이, 거짓말.”

준은 옆쪽 의자로 눈짓했다. 아그네스가 자리에 앉자 직접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은은한 향기가 진료실을 가득 메웠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몸살이 날 정도로 바빴다는 거 빼고요. 아, 고맙습니다.”

아그네스는 호호 불며 차를 마셨다. 같은 찻잎을 쓰는데도 준이 타 주는 차는 늘 맛있었다.

준은 천 주머니를 아그네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선물.”

그 안엔 사탕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전에 잠시 약초를 구하러 누아 마을에 왔을 때, 그녀가 투덜거린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그네스는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준이 물었다.

“지크 씨를 치료해 보니 어때?”

“역시 경험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어쨌을까 싶기도 하고요. 늑골척추각 통증도 분명 책에서 읽었었는데.”

“머릿속 지식을 응용하기는 쉽지 않아. 혼란스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무슨 말?

순간 아그네스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준이 찻잔에서 입을 떼고 이어 말했다.

“당분간 왕도에서 연수를 좀 받는 게 좋겠다.”

“왕도에서요?”

“그래. 아비루나 왕립 병원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놨다. 그곳에서 치유사로 일하며 경험을 쌓아.”

아그네스는 하마터면 잔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만큼 아비루나 왕립 병원은 그녀에게 꿈만 같은 곳이었다.

“저, 정말이에요?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혼자 진료소 지키느라 애썼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곧 왕실에서 사자가 올 거다. 국왕 폐하께서 직접 교지를 보내셨다니 놀라지 말고.”

그런데 아그네스의 표정이 점차 시무룩해졌다. 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뇨. 그게…… 이제야 사람들하고 많이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다시 헤어지게 되니까 뭔가 아쉬워서요.”

“종종 놀러 오면 되잖아.”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가 아니잖아요. 위험하기도 하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많이 서운해하실 거예요.”

“쉽게 오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뭐, 그건 나중에 알려주도록 하고. 실은 나도 당분간은 왕도에서 지내야 할 것 같구나.”

“예? 왜요?”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에서 강의를 맡게 됐다. 아마 왕립 병원 연수의들 지도도 하게 될 것 같고. 페르디낭 후작 각하와 뜻을 모았다.”

그 말에 아그네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선생님도, 저도 저택에서 같이 지내는 건가요?”

“그렇지.”

“다행이에요. 외롭지는 않겠어요.”

준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바리한 아그네스를 바라보는 것도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참, 행정관이 저택에 진료실을 하나 만들어 뒀더구나. 환자들이 찾아오면 진료도 해야 할 거 같아. 그때는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

“맡겨 주세요. 왠지 옛날 생각나는데요? 선생님 조수로 한창 일할 때요.”

“그때가 좋았어?”

아그네스는 싱긋 웃었다.

“지금도 좋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더 좋을 거 같고요.”

“힘들다고 뛰쳐나가는 일 없길 바란다.”

“설마요!”

아그네스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가볍게 넘겨 버린 준이었다. 그때 아그네스가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그럼 저도 아카데미에서 선생님 강의 청강해도 돼요?”

“뭐, 안 될 건 없겠지?”

“와! 신난다!”

두 손을 번쩍 들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그네스를 보며, 문득 준은 누아 마을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그때를 떠올렸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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