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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25화 (125/175)

125화 진짜 귀족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여전히 좋아 보이시군요.”

“하하하.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군. 요즘 재미가 좋은 건 자네 아닌가?”

페르디낭 후작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중년. 신사 중의 신사. 그런 후작의 별명이 절로 떠오르는 그런 미소였다.

인사를 나눈 그는 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녀가 찻잔을 내려놓았고, 한옆에 있던 오브라이언은 꾸벅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이제 응접실 안엔 둘뿐이었다.

페르디낭 후작이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찻잔을 들었다.

“얘기는 들었네. 아인하르트 후작의 몹쓸 지병을 말끔히 고쳤다면서?”

“그거 비밀 아니었습니까?”

“그와 나는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냈지. 애인과 마누라 빼고는 모두 공유하는 사이니 걱정하지 마시게.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야. 부끄러운 병이 아니었다면 자네의 명성이 아주 널리 알려질 기회였는데 말이지.”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괜히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건 취향에 맞지 않아서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자네가 출세를 원했더라면 진즉 움직였겠지. 그 지긋지긋한 전원생활에서 벗어나서 말이네.”

은근히 웃은 페르디낭 후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몸을 편히 소파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귀족들이 워낙 비밀스러운 지병이 많아서 말이지. 다들 목은 뻣뻣하게 세우고 다니지만 속은 골골거리고 있거든. 먹는 건 먹는 것대로, 밤일은 밤일대로 열심히 하니까. 조만간 또 불려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네.”

“곧 다시 누아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바쁘게 움직이셔야겠군요.”

“음? 아예 왕도에 정착하려던 게 아니었나? 저택을 구입했다고 들었는데.”

“잠시 바람 쐬러 온 겁니다. 왕도에 올 때마다 숙소를 구하는 건 좀 번거로울 것 같아서 저택을 구입한 거지요.”

“그렇군.”

잠시 말이 끊겼다.

후작은 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보통의 경우라면 시선을 피해야 했지만, 준은 거리낌 없이 그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후, 후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체 자네의 목적은 뭔가?”

“목적이라 하시면?”

“왕도에 올라온 이유 말이야. 빈센트 녀석의 청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는데, 행적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말이네. 관직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목적이 없어 보이진 않고.”

“딱히 목적은 없습니다. 올라온 김에 여러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지요.”

사실 루치아 때문에 왕도행을 결정한 거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굳이 페르디낭 후작에게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언제 혼례를 치를 거냐는 난감한 질문이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국왕 폐하께 올라간 추천서도 그 일 중 하나였나?”

“그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아인하르트 후작께서 추천서를 써 주신 거지요. 그런데 소문이 꽤 빠르군요.”

“국왕 폐하께서 아비루나 왕립 병원에 자리를 하나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네. 왕립 병원은 왕립학술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내가 나설 수밖에.”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입니다.”

“아인하르트 후작이 추천서를 직접 올리는 경우가 많지 않거든. 올라오게 되면 즉시 진행되는 편이지. 국왕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니까.”

실제로 왕실에서 보낸 사자가 왕도를 떠나 누아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왕이 보낸 교지를 받아든 아그네스의 표정을 떠올리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치유술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왕실의 주목을 받다니.

자신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그네스의 노력과 정성이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일이 빠르게 잘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 일은 자네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다네. 돈으로도 사기 어려운 것 말이야.”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폐하의 관심을 끌었다는 거지. 자네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하셨다네. 누아 마을에서뿐만이 아니라 마르다 마을에서 보인 기적, 그리고 사우던 가문의 대공자를 치료한 일까지 모두 말이야. 로가리듬의 법칙은 덤이고.”

“이런, 이런. 서둘러 누아 마을로 돌아가야겠군요.”

페르디낭 후작은 재밌다며 큰소리로 웃었다. 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전에 각하께서 절 찾으신 이유를 듣고 가야겠습니다. 제가 왕립학술원에 출석하기를 바라신다는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요.”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나?”

농담 섞인 질책에 준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절 찾으실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혹시 그 이면에 다른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궁금해?”

잠시 말을 끊은 페르디낭 후작은 기댔던 등을 떼고 준이 앉아 있는 쪽을 향해 몸을 가까이 내밀었다.

“궁금하면 우선 앞선 문제부터 해결하고 넘어가는 게 좋지 않겠나?”

“좋습니다. 왕립학술원에 출석하지요.”

“오오.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드는군. 다음 정기 회합에서는 자네가 직접 발표를 해 주시게. 로가리듬의 법칙도 좋지만 다른 발견이 있다면 더 좋겠어.”

“고려해 보겠습니다.”

흡족하게 웃은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찬장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 중 하나를 꺼내 캡을 열었다. 그리고 잔에 따랐다.

“자네도 한잔할 텐가?”

“좋습니다.”

한 잔씩 잔을 챙긴 두 남자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후작은 와인을 음미하며 응접실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멈춰선 곳은 창가였다.

어느덧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곧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올 것 같았다.

페르디낭 후작은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의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 가고 있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어떤 문제라고 특정 짓는 건 불가능합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자네 같은 대단한 치유사들이 많아지면 가능할까?”

“이미 대단한 치유사들은 많습니다. 바꿔 말해 치유사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구조의 문제라…….”

페르디낭 후작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노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없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바람기 있고 유흥을 좋아하는 귀족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지적인 모습이 있을 줄이야.

어쩌면 이것이 그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디치 가문은 대대로 교육 및 학술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었으니까.

“멀리 가지 않아도, 제가 살고 있는 누아 마을만 해도 15년 넘게 제대로 된 치유사가 없었습니다. 이는 누아 마을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치유사의 수도 부족하지만 왕도나 도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문제지. 하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기도 해. 치유사들도 인간인 이상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 않나? 자네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시골 마을에서 머물길 원하는 치유사는 거의 없겠지.”

“맞습니다.”

페르디낭 후작이 와인으로 목을 축였고, 준도 따라 한잔 마셨다.

“흐음. 왕국의 의료제도는 낙후되어 있네. 제대로 된 투자도 없어 치유사들의 희생만 강요되는 상황이지. 재정적,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해.”

“각하라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높게 평가해 줘서 고맙군. 하지만 내 부친께서도 결국 실패한 일이야. 내가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잠시 말을 끊은 페르디낭 후작이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인병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준의 빈 잔을 붉은 와인으로 채웠다.

또르륵. 청량한 소리가 들렸다.

“자네가 도와준다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

“글쎄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국가를 지탱하는 건 위정자가 아닌 백성들이라고. 그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네. 부국강병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자네의 생각도 그렇지 않나?”

“메디치 가문에서 교육 사업을 펼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까?”

“멀리 보자면 그렇다네. 언젠가는 지식이 강력한 무기가 되는 사회가 도래할 거야. 천천히 그때를 준비하고 있는 거라네.”

그제야 준은 페르디낭 후작의 진면목을 깨달았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왕국의 귀족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지.’

이런 귀족은 참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배와 금고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여타 귀족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사회지도층으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책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자연스레 준은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구체적으로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이것저것 일을 벌이지 않아도 자네라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야. 앞으로도 여러 귀족들과 치유사들을 상대할 거니까. 기금을 마련하고 자네의 월등한 기술을 최대한 많은 치유사들에게 전수해야겠지.”

“좋습니다. 협력하지요.”

준이 바로 결정을 내리자 페르디낭 후작이 살짝 놀랐다.

“그렇게 쉽게 결정을 해도 되는 건가?”

“인생을 살면서 뜻을 함께할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쉽게 찾았군요.”

“하하하! 동감하는 바이네. 앞으로 잘 부탁하지.”

페르디낭 후작이 악수를 청했다. 준은 기꺼이 손을 뻗어 후작의 손을 잡았다.

“그럼 자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을 알려 주지. 마침 왕립 아카데미에 자리가 하나 비어 있네. 의학부, 거기서 강의를 좀 맡아 주시게.”

* * *

“영주님! 왕립 아카데미 교수가 되셨다지요? 감축드립니다! 가문의 경사로군요!”

폴링이 호들갑을 떨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루치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준은 가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소식이 왔습니까?”

“방금 왕립학술원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미리 말씀 좀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렇게 좋은 일인데!”

“확실히 정해진 게 없어서 그랬습니다. 미안하게 됐군요.”

“아닙니다. 하하하! 어서 서류를 확인해 보시지요. 부임확인서입니다.”

폴링은 국왕의 인장이 찍힌 부임확인서를 준에게 공손히 건넸다.

슬쩍 훑어본 준은 책상에 내려놓았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준에게 왕립 아카데미 교수직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직은 이름 있는 가문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명예도 명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귀족들이라 인맥을 만들기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

루치아가 물었다.

“언제부터 강의 시작이에요?”

“다음 달부터.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한데? 일단 누아 마을로 돌아가서 정리를 좀 하고 와야겠어.”

“기분은 어때요?”

“그냥 그래.”

“파릇파릇한 애들하고 어울리고 좋겠네요. 부럽다.”

“누가 들으면 할아버지인 줄 알겠군.”

폴링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오실 때는 아그네스 님과 같이 오시면 되겠군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일단 누아 진료소 상황이 어떤지 보고 와야겠습니다.”

“에휴. 아그네스 선생도, 당신도 왕도 생활을 시작하면 이제 누아 마을 진료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지켜야겠네요.”

“잘 부탁해.”

“대가는 톡톡히 지불해야 할 거예요. 남작 부인 타이틀 정도면 적당하려나?”

준은 말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누아에 가야겠어.”

“어서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아니. 괜찮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갈 거니까.”

준과 루치아, 그리고 폴링은 자리를 옮겼다. 포탈이 설치된 방으로.

준이 마법진 위로 올라서며 말했다.

“앞으로는 누아 마을을 오갈 때 마차를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예? 그럼 어떻게 가시려는 겁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누아 마을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마법진 위에 서면 마법의 힘을 빌려 누아 마을로 갈 수 있지요.”

“허…….”

폴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준이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참, 이 방에 포탈이 설치되어 있다는 건 비밀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또 봐요. 행정관.”

루치아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파팟!

순간 푸른빛이 번쩍이며 두 사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폴링이 천천히 마법진으로 다가왔다.

“여, 영주님……? 루치아 님!”

폴링은 조심스럽게 마법진 쪽으로 손을 휘저어 보였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지?”

한동안 폴링은 준과 루치아가 사라진 그 자리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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