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림에서 찾은 단서 (2)
물끄러미 준을 바라보던 공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강준 남작. 비범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엉뚱할 줄은 몰랐군. 병원을 가야 한다는 건가? 내가?”
“그렇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준은 자신의 오른쪽 볼을 툭툭 건드렸다. 공작의 입장에서는 예의 그 검은 점이 있는 자리였다.
“각하의 볼에 난 점 때문입니다.”
“왜. 보기 흉해서 그러나?”
“아뇨. 그건 점이 아닙니다. 흑색종이라고 하는 종양이지요. 형태를 보건대 악성 종양일 가능성이 큽니다.”
“종양?”
공작이 깜짝 놀랐다. 점이 종양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처음엔 농담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했다.
왕국의 군무대신이자 공작인 자신에게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령 아비루나 왕국의 국왕이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닐 터.
공작의 표정이 근엄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 볼에 있는 이 점이 악성 종양이란 말인가?”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악성일 경우엔 암이 내부 장기에 전이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렇게 된다면 손을 쓰기가 어려워지죠.”
“으음.”
준의 고향에서도 그랬듯, 이곳에서도 암은 중병이었다. 암을 억제할 수 있는 약도 구하기 힘든데 치료제를 구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그나마 준이 카누의 암을 치료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전직 절대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치유사라고 해도 암영초의 존재를 알기도 어렵고, 그걸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공작이 주저하자 준이 채근했다.
“발병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으니 서둘러 제거하면 전이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이곳엔 왕립 병원이 있으니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암이라면 아파야 할 텐데 이렇게 멀쩡하잖소.”
“죽기 직전에 통증이 시작되는 암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췌장에 생기는 암이 대표적이죠.”
준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공작의 의구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 의문을 제기했다.
“이상하군. 나를 만났던 치유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데?”
“이 대륙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암입니다. 아마 알아볼 수 있는 치유사는 몇 없을 겁니다.”
“그중 하나가 그대라는 말인가?”
“예.”
공작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손을 홰홰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준이 본인의 실력을 지나치게 내세우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은 정반대였지만.
“경의 걱정은 고맙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병원은 시간이 될 때 한번 들러 보지.”
“그렇게 쉽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하하하. 이봐. 강준 경.”
아레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목에 힘을 주고 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약 준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리를 후들거렸을 것이다.
그만큼 공작의 기세는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준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그 눈빛과 기세를 받아 냈다. 곧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엔 젊은이의 치기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시골에서 왔다더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르나 보군.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네. 한 왕국의 군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응? 설령 이게 악성 종양이라고 해도, 그보다 시급한 일이 많다는 얘기지.”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까?”
“있지. 얼마든지. 자네 같은 부류들은 부정하네만,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네.”
“그렇군요.”
“그러니까 우린 보다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야 해. 내 말 알아듣겠나?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누아 마을이 아니란 걸 분명히 하고 싶군.”
그 한마디에 준은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를 간파했다.
귀족의 탈을 쓴 세속적인 인간.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
한편으로는 참회를 앞둔 미련한 인간.
문득 미놀렌 경이 왜 이런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뭐, 각자의 사연은 사람의 숫자만큼 있는 법이니까.’
시간이 아깝다는 느낌에 준은 상념을 치웠다. 그리고 가벼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하시는 사업 다 잘되기를 바라지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허. 기회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리시겠다?”
“각하와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골 출신인 저보다 더 좋은 분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후회하게 될 걸세.”
“후회만 하게 된다면 다행이겠지요.”
주어가 불분명한 한마디를 던진 준이 방을 나섰다.
“…….”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는 공작의 눈에는 흉흉한 기운이 돌았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물론 준은 그 기운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 흉흉한 기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공작은 준에게 아예 관심을 끊어 버렸다.
‘역시 공작급이라 다르다는 건가? 사람을 비교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아인하르트 후작이 자비로운 편이었군.’
준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진단은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치료할 수도 없는 노릇.
“남작님?”
때마침 복도에 미놀렌 경이 서 있었다.
그는 준이 생각보다 일찍 나오자 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벌써 접견이 끝나신 겁니까?”
“예.”
미놀렌 경이 의문을 표했다.
그가 알기로 공작은 상처 치료용 연고와 응급처치 키트 개발 등 군비 증강 사업에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렇게 일찍 끝날 리가 없었다.
그 기색을 읽은 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각하와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이야기가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아쉽습니다.”
“세상일이 뭐 그렇지요. 아, 배웅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움을 드린 것도 없는데 폐 끼치고 싶지 않군요.”
“아닙니다. 오브라이언 경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주셨는데 배웅 정도야 일도 아니지요. 자, 가시지요.”
두 사람은 저택 복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곧 준이 마차에 올랐다. 미놀렌 경은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오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누아 마을로 오시면 극진히 대접하지요.”
“꽤 멀군요.”
“그만큼 보람이 있을 겁니다.”
준은 문을 닫으려다 생각을 바꾸곤 다시 문을 열었다.
무지는 죄가 아니다.
공작의 태도가 괘씸하긴 했지만 그대로 두기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미놀렌 경. 당신은 공작 각하의 안위를 책임지는 사람이지요?”
“당연한 말씀을.”
“그렇다면 기회를 드리죠. 주군의 목숨을 구할 기회를.”
목숨이라는 한마디에 미놀렌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 *
“응? 일찍 왔네요? 늦는다고 선전포고하고 갔으면서.”
“선전포고는 무슨.”
피식 웃은 준은 루치아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곳은 집무실이다. 루치아는 준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들어와 있었다.
준은 왕진 가방을 열고 짐을 하나둘 풀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루치아가 팔짱을 끼며 은근히 물었다.
“공작이 무슨 제안을 했나요?”
“아무런 제안도 못 받았어.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
“무슨 일 있었군요?”
“좀 뜻밖의 일이었는데.”
잠시 정리를 멈추고, 준은 공작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루치아는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흥미보다는 걱정을 표했다.
“당신.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거예요? 상대는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알프하이겐 공작가인데. 세상 혼자 살 분이네, 이거. 그러다 죄 없는 제자들 앞길 막히면 어쩌려고 그래요?”
“무례가 아니라 당당한 거겠지. 신세 진 것도 없는데 비굴하게 굴 필요 뭐가 있어?”
“핵심을 잘못 짚으시네.”
“무슨 핵심?”
“환자를 잘 달래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것도 치유사의 미덕 중 하나라고요.”
준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요즘 루치아의 논리가 제법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아카식 레코드를 열람한 전직 천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준이 당하기만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예 손 놓은 건 아니야.”
“그럼?”
“수호기사에게 단서를 던져 주고 왔어. 뺨에 난 점이 악성 종양일 수 있으니 주군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발품을 팔라고. 인맥을 최대한 동원에서 실력 좋은 치유사를 섭외하라고 했다.”
“어머, 참 잘했어요!”
루치아가 박수를 치며 빙긋 웃었다. 준은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칭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공작이 암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어서 부랴부랴 당신을 찾아오면 몸값을 세 배, 아니 삼십 배로 부풀린다. 혹시 이런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죠?”
“가만 보면 무서울 때가 있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 봐. 나 때문에 강림한 거 아니지? 새로운 퀘스트를 숨기고 있는 거 아냐?”
“제가요? 에이. 농담은. 프라가라흐도 소환 못 하는 연약한 사람한테 어떻게 퀘스트를 줘요. 격 떨어지게.”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루치아가 슬쩍 준의 옆에서 스킨십을 시도했다. 하지만 준은 왕진 가방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어디 가요?”
“메디치 후작가에.”
“아직 저녁 되려면 멀었는데?”
“가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뭐.”
“설마 연약하다고 한 거 가지고 삐친 건 아니죠?”
“과연?”
준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자리를 떠났다.
* * *
다시 준을 만난 오브라이언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표정만 보더라도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서운합니다. 남작님. 아까 알프하이겐 가문에 먼저 들르셨다지요?”
“정보가 제법 빠르시군요.”
“칭찬해 주시는 겁니까? 반어법은 아니지요? 후우, 설마 했는데 이럴 줄이야. 덕분에 주군께 꾸중을 듣게 생겼습니다.”
준이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자 남자 시종이 그의 가방을 대신 받아들었다.
“이번 기회에 연극배우로 전직하시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환자 역은 아주 잘하실 겁니다.”
준의 농담에 오브라이언이 유쾌하게 웃었다.
“자,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잠시 용무 중이시라.”
오브라이언은 직접 준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사교의 제왕이라는 별명답게 저택의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하녀들의 미모도 평균 이상이었다.
페르디낭 후작과 켈세타 성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낯설지 않았다. 준은 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후작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오브라이언이 장단을 맞춰 줘서 지루하진 않았다.
“공작가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오브라이언 경 정도라면 이미 내막 정도야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궁금한 건 그 결과지요.”
“인사만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찍 올 수 있었지요.”
“안타깝군요.”
말과는 달리 오브라이언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메디치 가문에서는 어떤 구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저를 그냥 부른 건 아닐 테고.”
“표면적으로는 남작께서 왕립학술원에 출석한 다음 ‘로가리듬의 법칙’에 대해 공개 강연을 해 주시는 걸 바라고 있지요.”
“그 이면으로는?”
“그건 저희 주군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겁니다. 궁금하시더라도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준은 내심 궁금했다. 아레스 공작 같은 경우는 군무대신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그 제안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페르디낭 후작은 경우가 달랐다.
‘왕립학술원에 출석하는 거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건가?’
준의 궁금증이 점점 깊어져 갈 무렵, 문이 열리고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르디낭 후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