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23화 (123/175)

123화 그림에서 찾은 단서 (1)

“그러셔도 괜찮은 겁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요. 저녁에 가겠다고 했지 후작 각하를 먼저 만나겠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뭐, 제때 찾아가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브라이언 경의 표정을 한번 보고 싶군요.”

그제야 근엄하던 미놀렌 경의 표정이 풀렸다. 훨씬 보기 좋았다. 뺨에 난 기다란 흉터만 아니면 미중년 소리를 들었으리라.

그가 가볍게 예를 취한 뒤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는 지금 저택에 계십니다. 아마 오후까지는 시간이 되실 겁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가시지요.”

“제가 저택까지 모실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영광입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알프하이겐 공작가에 초청을 받은 것도 모자라, 미놀렌 경의 호위를 받는다는 건 충분히 가십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물론 준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레스 공작이 어떤 말을 꺼낼지 생각해 볼 따름이었다.

미놀렌 경이 부하를 불렀다.

“어서 마차를 대기시켜라. 강준 남작을 모시고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

준비하는 시종과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엄격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말을 탄 병사 하나가 저택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준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알리는 전령 역을 맡은 것이다.

순식간에 마차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 미놀렌 경이 타고 온 마차였는데, 장식은 화려하지 않지만 굉장히 튼튼해 보였다.

준은 따라 나온 폴링에게 전언을 남겼다.

“루치아에겐 늦는다고 전해 주시지요. 나간 김에 메디치 가문에도 들러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걱정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폴링이 꾸벅 인사했고, 준은 마차의 문을 닫았다.

마차가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알프하이겐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 * *

알프하이겐 공작가의 저택은 크고 화려했다. 군무대신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어서인지 저택을 지키고 있는 병사의 수도 상당했다.

저택 입구에 잠시 멈춰 선 마차는 문이 열리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안이 철저했다. 미놀렌 경의 마차임이 확실한데도 그들은 다시 확인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동시에 누아 마을, 아니 켈세타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또 다른 도시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좌우로 녹음이 펼쳐졌고, 꽃이 핀 정원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차가 쉴 새 없이 달렸지만 목적지에 쉽게 도달하지 못했다.

사방으론 키가 큰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마치 숲 같았다. 그 안에 야생동물이 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상당히 인상적이군요. 이렇게 넓은 저택은 처음입니다.”

“아비루나 왕국에서 가장 넓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가끔 길을 잃는 시종들이 있을 정도지요.”

“길을 잃으면 큰일 날 정도인데요?”

“그래서 정원에서 용무를 볼 땐 신호탄을 하나씩 가지고 갑니다. 유사시에 쓸 수 있게끔 말입니다.”

기회를 잡은 미놀렌 경은 알프하이겐 가문의 전통을 설명했다. 내용은 뻔했지만, 준은 그 말투에 주목했다. 그는 가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준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대대로 왕국의 대신을 배출한 명문가라. 흥미롭군요. 사실 무슨 이유 때문에 부르시는 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공작 각하의 친서를 받았거든요.”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답장이 없으셔서 상당히 서운해하셨지요.”

“난감하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께서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분이 아닙니다. 늘 왕국을 위해 움직이는 분이지요. 절대 남작님께 곤란한 일은 없을 겁니다.”

대충 어떤 일인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예전 마이더스 상단의 알파가 아레스 공작의 친서를 전해 주었을 때, 그가 상처 연고와 응급처치 키트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던 게 단서였다.

‘그렇다면 군수물자 생산과 관련된 일을 하려는 것일 텐데. 군비 증강인가.’

의학과 군수 사업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목숨이 오가는 곳이기에.

전쟁이나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지면 전장에 치유사가 투입되긴 하지만, 그 수가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치유사 자체가 많지 않아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치료 시기를 놓쳐 부상이 더욱 심각해지면 병력 손실로 이어지니까.

물론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냈다.

응급처치 키트는 100년 전 대륙전쟁에서 처음 선을 보였으며, 덕분에 초기 대응이 어떠냐에 따라 환자들의 예후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응급처치 키트와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평화 시에는 기술의 발전이 더디고, 또 비리 등 부정부패가 만연해 목표로 삼은 기술적 지점까지 가기가 상당히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아레스 공작은 준이 만든 상처 연고와 응급처치 키트를 접했다.

당연히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 이제 슬슬 도착한 것 같습니다. 준비하시지요.”

미놀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속도를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정원을 다듬는 정원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준이 사뿐히 땅을 밟았고, 기다렸다는 듯 접대용 미소를 지은 노년의 집사가 다가왔다.

“남작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먼저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예.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공작 각하를 뵈러 왔습니다만.”

“바로 모셔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친절 이상의 기품이 느껴지는 집사였다. 그것은 집사뿐만이 아니라 따라나선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시선을 놀리는 사람이 없었다.

‘흐음. 릴리를 데려올 걸 그랬나? 보고 배울 게 많아 보이는데.’

하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숨 막힐 정도로 예를 갖추는 건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준은 집사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웅장한 내부에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난간에서부터 바닥은 물론, 내부를 채우고 있는 장식품들 모두 최고급의 물건이었다.

“오. 정말 대단하군요.”

진짜는 따로 있었다.

한쪽 벽에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수많은 인물화가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집사가 직접 나서 준의 호기심을 해결해 주었다.

“그건 역대 가주님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가문을 일으킨 업적을 기리고, 또 추모를 하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가끔 초상화도 섞여 있었다. 개성에 따라 포즈도 다양했는데, 마치 알프하이겐 공작가의 역사를 한 곳에 집약시킨 듯했다.

그때 준이 그림 하나를 주목했다.

“이분이 아레스 공작 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준이 가리킨 것은 가장 최근에 그려진 듯한 생생함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아레스 공작은 갑옷을 입은 채 그림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체구는 작지만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 좌우로 뾰족하게 뻗은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작년에 새로 바꾼 그림이지요. 왕실 화가인 미카엘 경이 직접 그렸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그림에도 취미가 있으셔서 정물화를 자주 그리시곤 하는데 저쪽을 보시면…….”

집사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양한 그림이 보였다. 취미치고는 제법 그럴듯했다.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기에 준은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생각보다 오래 그림을 살펴보자 집사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나섰다.

“남작님.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쪽으로.”

“아, 이거 실례.”

공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준은 그림에서 눈을 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으니 원목으로 된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기사 두 명이 무표정으로 지키고 있었는데, 준이 도착하자 문을 열어 주었다.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발이 무성한 공작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자 준은 미카엘이라는 화가가 얼마나 실력이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림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군.’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검은 점.

오른쪽 볼에 나 있는 점은 분명 그림엔 없었다. 꽤 크기가 컸는데 경계가 불분명해 독특한 느낌을 주는 점이었다.

‘작년에 새로 그린 그림이라고 했던가?’

준의 눈매가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공작이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걸어왔기 때문에.

“처음 뵙겠습니다. 강준입니다.”

“어서 오시오. 남작. 기다리던 편지보다 먼저 이렇게 나타나 주시니 기분이 묘하군.”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오. 괜찮소. 우리는 글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 자, 이쪽으로 앉으시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준이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다과를 준비했다. 이 또한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었다. 심지어 초콜릿도 있었다.

그러나 준의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준은 다과가 아닌 공작의 오른쪽 뺨에 난 점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보는 거요?”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습니까?”

“보기와는 달리 성미가 급하시군. 시간은 많소. 일단 차 한잔 드시지.”

준은 손을 뻗어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루치아가 왜 도시 생활이 잘 맞는다고 했는지 바로 이해될 정도로 좋은 차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준이 지나가듯 물었다.

“저택이 아주 좋더군요. 인상적인 장식품이 많았습니다. 제 저택은 저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지요.”

“그런 말씀 마시오. 경의 저택은 크기는 작아도 입지가 아주 좋지요. 왕궁과 가깝기도 하고. 듣기론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처분하고 구입했다던데?”

“예전에 사업을 좀 했었습니다.”

“사업이라면, 상단?”

“비슷합니다.”

준은 말을 아꼈다. 자신에게 친서를 보낼 정도라면 뒷조사는 다 끝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아끼는 게 낫다.

다행히 공작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올라오면서 아주 인상적인 그림을 봤습니다. 역대 가주님들의 인물화가 걸려 있더군요. 알프하이겐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다들 남작과 비슷한 감상평을 내놓는다오.”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각하의 인물화도 있던데…… 정확히 언제 그려진 겁니까? 작년이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아마 작년 여름이었을 거요.”

고개를 끄덕이며 준은 재빨리 기간을 계산했다.

작년 여름이라면 거의 1년.

이제 남은 수수께끼는 하나였다. 준은 진지하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볼에 난 점은 일부러 화가에게 그리지 말라고 하신 겁니까? 그림엔 점이 보이지 않던데요.”

“그때는 점이 없었소. 어느 날 갑자기 점이 나더니 점점 커지더군. 뭐, 늙어서 그런 거겠지. 그림에 넣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소?”

“글쎄요.”

준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돌발 행동에 공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나?”

“지금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각하. 잠시 저와 함께 가 보셔야 할 것 같군요.”

“어디를?”

“병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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