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내조는 은밀하게 (2)
“누군데?”
“글쎄요. 누굴까요?”
루치아는 생긋 웃으며 말을 아꼈다.
누가 봐도 놀리는 말투와 행동이었지만, 준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차분히 응수했다.
“메디치 후작가와 알프하이겐 공작가에서 접촉을 해 왔나 보군.”
“뭐야. 어떻게 알았어요? 행정관이 그새 일러바친 건 아니죠?”
“행정관?”
아무래도 폴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제 그에게 루치아의 행방을 물었는데,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했었으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네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했지. 설마 이번 일에 폴링 경도 끌어들인 거야?”
“앗.”
루치아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한 번만 봐줘요.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내 잘못이에요.”
“가문의 주인은 난데 왠지 가신들은 당신 눈치를 더 보는 것 같군.”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니까요.”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준은 웃었다. 남작 부인 후보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름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루치아가 찻잔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준의 바로 옆자리였다.
부드러운 피부에서 전해지는 포근한 느낌과 향기가 좋았다.
그런 와중에 루치아는 준의 팔을 껴안듯 잡았다.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어떻게 알았냐니까?”
“나야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지만, 당신은 처음이잖아. 그렇다면 나와 관련된 인물들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겠지.”
“한마디로 찍었군요.”
“왕도에 들어올 때 관심을 보였던 두 사람이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서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어.”
“에이. 재미없네.”
루치아는 투덜거리며 찻잔에 입을 댔다. 꽤 허무하게 행적이 밝혀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번 일로 질투심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의 행적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통해 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조금 기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이왕 들킨 거 다 얘기해 줄게요. 어젯밤에는 알프하이겐 공작가에 다녀왔고, 오늘은 메디치 후작가에 다녀왔어요.”
“어땠어?”
“또 가고 싶던 걸요? 아주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왔지요. 좋은 차도 마실 수 있었고. 음식도 대단했고. 아, 역시 난 시골 생활보다 도시 생활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루치아는 두 손을 기도하듯 꼭 쥐며 가슴에 댔다. 그리고 준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마치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듯.
하지만 준이 누구던가.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여기 계속 머물면 되겠네. 아그네스도 곧 이곳에서 생활을 해야 할 테니 겸사겸사 의술도 가르쳐 주고.”
“알았어요.”
“뭐?”
“당신이 그러라면 그렇게 해야죠. 우리 영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그네스 양이 왕도에 유학을 온다는데 쩌리인 내가 뒷바라지나 해야지.”
“흠흠…….”
준은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오늘따라 그녀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농담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땐 화제를 돌리는 게 최고다.
“그건 그렇고, 가서 무슨 얘길 하고 왔어?”
“별 이야기는 없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랑 사교계 정보를 좀 얻었죠. 그냥 뻔한 이야기들이었어요.”
“누굴 만났는데?”
“부인들을 만나고 왔어요. 후작 각하와 공작 각하는 만나지 못했어요.”
“그렇군.”
당연한 일이었다.
유력한 남작 부인 후보라곤 해도 아직 혼사가 결정된 것도 아니니, 루치아는 잉그바르 준남작가의 장녀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부인들과 환담을 나눈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아레스 공작과 페르디낭 후작이 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는 그들의 측근인 미놀렌과 오브라이언이겠지만.
“두 분 모두 만나고 돌아갈 거죠?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은 비추는 게 좋지 않나?”
“글쎄. 기회가 된다면?”
“비싼 남자셔, 아주. 아인하르트 각하의 병을 치료했다는 소문을 낼 수는 없으니 이번 기회에 인맥 좀 만들어 놔요.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러지.”
“응? 웬일로 이렇게 말을 잘 들으실까?”
그녀는 눈을 감고 준의 팔에 몸을 기댔다. 마치 고양이가 이불에 몸을 파묻는 것처럼. 따뜻한 체온과 달콤한 체취가 물씬 느껴졌다.
“너무 가깝지 않나?”
“뭐 어때요. 우리 사이에. 만 년 정도 봤는데 이 정도는 약과지.”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이 맞다.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폴링은 대단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귀빈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두 사내 중 한쪽은 뺨에 흉터가 있는 자였다. 바로 출입관리소에서 준을 기다리고 있던 미놀렌 경이었다. 왕국 10대 마스터 중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력자.
그가 또 다른 손님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불청객이군.”
“불청객이요? 하하하. 이거 곤란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같은 손님인 입장인데 너무하십니다?”
“양보까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새치기는 곤란하지.”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네요. 정문을 먼저 통과한 건 경이지만 현관에 먼저 도착한 건 접니다.”
페르디낭 후작의 책사인 오브라이언이 여유 있게 대꾸했다. 한편 아레스 공작을 대신해 찾아온 미놀렌 경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사이에 낀 폴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허…….”
아비루나 왕국의 두 거물이 저택 로비에서 기 싸움을 하고 있으니, 폴링은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인상을 한 번 찌푸린 미놀렌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폴링이 움찔 놀랐다.
“폴링이라고 했소?”
“그, 그렇습니다. 엘누아르 가문의 행정관을 맡고 있지요. 당분간 이곳의 집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지금 바로 남작님을 뵙고 싶소. 아뢰어 줄 수 있소?”
“그게…… 송구합니다. 주인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계셔서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허윽!”
그때, 오브라이언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그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컥! 커억!”
발작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숨이 매우 가빴고,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질식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유일하게 릴리가 반응했다.
“응급 상황이야! 어서 이분을 진료실로 옮겨!”
“예!”
진료소 출신답게 릴리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하녀 둘이 오브라이언을 부축했다.
“너는 가서 주인님을 모셔와! 호흡 곤란을 일으킨 응급 환자가 생겼다고 전해 드리고!”
릴리의 지휘하에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폴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두 팔 거두고 오브라이언의 부축을 도왔다.
“끄어어억!”
“꺄악!”
오브라이언이 발작하자 하녀들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안 되겠는지 폴링이 오브라이언을 업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평소에 지병도 없는 친구가 갑자기?”
일에 방해를 받긴 했지만 미놀렌 경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브라이언은 젊은 천재로 왕국의 유능한 인재이기도 했으니까.
미놀렌 경은 별일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복도 저 멀리 사라져가던 오브라이언이 업힌 채로 고개를 슥 들더니 이쪽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뭣?”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던 미놀렌 경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젠장. 이 쥐새끼 같은 놈!”
하지만 이미 늦었다. 로비는 텅 빈 뒤였다.
* * *
“응급 환자가 생겼다고?”
빈센트 공자가 보낸 정보를 살펴보던 준이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하녀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당황하지 말고 자세히 설명해 봐요.”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셨어요! 많이 괴로우신 거 같아요! 호흡 곤란도 있고요! 바로 진료실로 옮겼습니다!”
“심장 발작인가?”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준은 즉시 백의를 걸치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 넓지 않은 저택이었기에 진료실까지는 금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급스러운 블론드의 젊은 사내가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헝겊으로 안경을 닦고 있었다.
“오, 반갑습니다! 다시 뵙게 됐군요. 혹시 절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마도 출입관리소에서 봤던 분이겠지요.”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하하.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페르디낭 각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오브라이언이라고 합니다.”
그는 정중히 예를 취했다. 준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호흡 곤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방해꾼이 있어서 머리를 좀 썼지요. 남작께서 환자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치유사라는 걸 떠올리니 절로 방법이 보이더군요. 보시다시피 전 아주 건강합니다.”
“다행이군요.”
준은 청진기를 한쪽으로 치웠다.
기분이 나쁠 만한 상황이었지만, 준은 가벼이 웃어넘겼다. 이렇게 머리를 쓰면서까지 자신을 불러낸 노력이 가상했다.
“남작님.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그러시지요.”
“왜 각하를 뵈러 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수없이 전령을 보냈습니다만…….”
“고의는 아닙니다.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서류이기에?”
준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오브라이언은 궁금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미놀렌 경보다 먼저 준을 페르디낭 후작에게 데려가면 된다.
“오늘 저녁 잠시 저택에 들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군께서 긴히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준은 고민했다.
서류 검토를 모두 마친 다음 가장 먼저 아레스 공작을 만나려고 했다. 그런데 오브라이언이 이렇게 먼저 나서니 청을 물리치기가 곤란했다.
그때, 좋은 생각을 떠올린 준이 재차 확인했다.
“후작 각하께서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시는 겁니까?”
“예. 남작님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비워 두셨지요.”
“좋습니다.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넘어가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각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준은 웃으며 그를 현관 밖까지 배웅했다.
그곳엔 미놀렌 경이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멀쩡히 두 발로 저택을 나서는 오브라이언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분노를 터트렸다.
“쥐새끼 같은 놈!”
“그럼 경께서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쥐새끼한테 진 인간이 될 테니까요. 하하하!”
미놀렌 경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지 그는 무기를 꺼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오브라이언이 돌아가자 준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미놀렌 경이시지요? 반갑습니다. 엘누아르의 영주, 강준입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놀렌 경은 바이런 경과 비슷한 부류였다. 기사도의 정점을 보는 것 같은 깍듯함이 있었다.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맞습니다. 잔꾀에 넘어가 선수를 뺏기긴 했지만 말이죠.”
“상황을 지켜보니 평소에도 자주 당하시는 것 같군요.”
“검술이라면 몰라도 머리로는 저 친구를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뭐, 이번엔 한 방 먹었지만. 다음엔 돌려줘야겠지요.”
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터라면 모를까. 이런 일상에서는 머리 좋은 쪽이 훨씬 유리한 일이 많다.
“오늘 저녁에 페르디낭 각하를 뵙기로 했습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안 갈 수가 없더군요.”
“모든 것은 남작님의 뜻대로.”
“하지만 먼저 뵙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말인데, 지금 아레스 각하를 뵐 수 있겠습니까? 한 방 먹은 걸 돌려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