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내조는 은밀하게 (1)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아래로 쏟아졌다. 아인하르트 후작이 약물에 발을 담근 지 한 시간이 지난 것이다.
준이 시계를 회수했다.
“이제 발을 빼셔도 됩니다.”
후작이 물에서 발을 꺼내자 준이 깨끗한 수건으로 직접 닦아 주었다. 하녀들이 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것도 치료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환부를 관찰한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행히 약이 잘 들었군요. 이제 치료가 모두 끝났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럴 수가…….”
오래도록 전장을 누비며 명성을 떨친 아인하르트 후작이었지만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더러운 물집도, 넝마 같은 피부 껍질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후작은 손을 뻗어 발을 어루만졌다.
무좀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두껍게 쌓여 있던 각질도 완전히 벗겨져 부들부들했다. 마치 젊음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빈센트 공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좀 어떠십니까? 아버지.”
“아주 좋구나! 하하하. 간지럽지도 않고 시원해. 이제 다시 춤을 출 수 있겠어!”
“정말 다행입니다. 빠른 시일 내로 파티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당연히 그래야지! 그간 애썼다. 빈센트. 역시 든든하구나.”
목숨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환은 아니었지만, 후작은 새로운 삶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공을 세운 빈센트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물론, 그와 경쟁하고 있는 둘째와 셋째 공자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대공자 자리를 빼앗을 새로운 기회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겠지. 상대가 빈센트 공자라면.’
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빈센트 공자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배팅을 할 정도의 안목과 기백을 갖췄다. 아마 쉽게 자리를 내주진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귀족 가문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일이니까.
“고맙소. 강준 남작.”
아인하르트 후작이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준의 앞에 섰다. 그는 악수를 청하려다 빙긋 웃고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발을 만진 손이라.
“역시 소문대로였군. 그대의 의술은 왕국 최고일세. 단두대로 보내겠다는 말은 취소하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함세.”
“저도 각하께 무례하게 대가를 청구했으니 서로 빚진 걸로 하지요.”
“좋아. 마음에 드는군!”
“일단 일주일 정도는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전까지는 왕도에 머물 예정이니 다시 가렵거나 이상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알겠네. 자,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인가? 하하하하.”
시원하게 웃은 아인하르트 후작은 즉시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이를 꺼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상단에 ‘추천서’라고 적은 뒤 준에게 물었다.
“제자 이름이 뭔가?”
“아그네스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누아 진료소의 치유사라고 했지?”
“예.”
“몇 살인가?”
“올해로 열아홉 살입니다.”
“아비루나 왕립 병원에 들어가기엔 상당히 어린 나이군.”
후작은 유려한 필체로 아그네스의 이름을 넣은 뒤 본문을 쓰기 시작했다.
화려한 수식과 찬사로 내용이 채워졌다. 과연 왕국의 중진다운 필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신인을 적기 전에 후작이 한마디 했다.
“그대가 해묵은 각질까지 없애 줬으니 나도 선심 좀 써야겠지?”
원래라면 수신인에 아비루나 왕립 병원장의 이름이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후작이 적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칭호였다.
아인하르트 후작은 그 이유에 대해 친절히 설명했다.
“이 추천서는 병원장이 아니라 국왕 폐하께 전달될 걸세. 오해하지는 말게. 나한테도 흔한 일은 아니니까. 일 년에 많아야 한 번 해 주는 정도야. 내 특별히 힘 좀 써 보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그네스가 무척 좋아하겠군요.”
“당연히 좋아해야지! 언제든 좋으니 데리고 오게. 평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빛난다고 했던 자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졌어.”
준이 처음 그 말을 했을 때 아인하르트 후작은 자신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을 떠올렸다.
대장군이었던 그는 고집불통으로 유명했지만, 병사들을 아끼고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추운 겨울, 보급이 끊겨 추위에 떠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막사에 식사와 난방을 끊은 건 아주 유명한 미담 중 하나였다.
당시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은 힘을 모아 적의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라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지만, 준이 했던 말은 마법처럼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후작에게 있어 평범하기 때문에 빛나는 존재들은 바로 병사들이었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이제 은인이 되셨으니 꼭 데려와 인사를 시키겠습니다. 시간이 늦었군요. 쉬십시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벌써 돌아가겠다고?”
“볼일이 더 있으십니까?”
준이 묻자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인하르트 후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정말 아무런 욕심이 없는 모양이군. 보통 그 나이라면 차라도 한잔하면서 왕실의 중요한 정보를 얻어 갔을 텐데 말이야.”
“그런 쪽엔 관심이 없습니다. 덕분에 엉뚱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지요.”
“그 정도면 엉뚱한 정도가 아니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 으음, 마치 은퇴한 노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달까? 나처럼.”
확실히 전장에서 쌓은 관록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확히 보셨다고 칭찬하고 싶었지만 준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조만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세. 빈센트. 저택 밖까지 예를 갖춰 모셔라. 앞으로 강준 남작은 우리 가문의 중요한 손님이다.”
“예. 아버지.”
준은 왕진 가방을 들고 후작의 방을 나섰다. 마차까지의 배웅은 빈센트 공자가 맡았다.
처음 누아 마을에 찾아왔을 때의 건방진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도 했고, 준의 치유술과 인품에 매료된 것이다.
그가 예상하던 최선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남작님 덕분에 가문에서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거기까진 제 일이 아닙니다. 저는 무좀 환자를 치료했을 뿐이지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모쪼록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마차에 도착했고, 준은 마차에 오르기 전 그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각하께서 무좀을 앓았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파티에서 멋지게 춤 한번 추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사교계는 소문에 민감합니다.”
“아픈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위로받고 격려받아야 할 일이지요.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앞으로 저와 함께 일을 하시려면 이 말의 의미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주셨으면 하네요. 진지하게.”
“뭔가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더. 그때 부탁드린 정보는 잊지 말고 준비해 주십시오.”
준이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문을 닫고 마부석에 올라 마차를 몰았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며 빈센트 공자는 준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어 보았다.
* * *
저택에 도착한 준은 로비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기린과 마주쳤다. 그녀는 기운 빠진 표정으로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갈까 했지만, 마침 눈이 마주쳤다.
“어때. 청소는 할 만한가?”
“…….”
기린이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자 곁에서 감시하던 릴리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요망한 것! 주인님께서 물으셨는데 대답을 안 해? 그리고 그 반항적인 눈빛은 뭐니? 한번 해 보자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봉인이 걸린 일이었다. 정신을 퍼뜩 차린 기린이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릴리.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한때 마법사로 귀족 대우를 받았던 사람인데 적응할 시간은 줘야지.”
“흥. 주인님은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피식 웃은 준은 다시 기린에게 물었다.
“반성은 많이 했나?”
“네!”
“대답이 너무 빠른데.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그게…….”
기린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을 굴리며 그럴듯한 변명을 찾기에 바빴다. 교묘하게 감추고 있지만, 아직도 얼굴에는 탐욕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기린에게 원하는 것은 단순한 반성이 아니었다. 힘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었다.
“봉인을 풀려면 아직 먼 것 같군. 청소를 하면서 좀 더 수양하도록 해. 욕심을 버리는 게 우선이야. 그게 힌트다.”
기대감에 잠시 반짝이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숨을 내쉰 기린은 걸레를 꽉 쥐었다.
“정말 봉인을 풀어주긴 하는 건가요?”
“그러지 않을 거라면 굳이 이렇게 일을 벌이진 않았겠지. 아직도 나의 기사들은 네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왜 저를…….”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어쨌든 그때 너와 그렇게 약속을 했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릴리가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 감흥이 없었는지 묵묵히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대화는 자연스레 끝났다.
준은 계단을 올랐다. 옆으로 릴리가 따라붙었다.
“루치아는?”
“아까 돌아오신 것 같던데요? 방으로 올라가시는 걸 봤어요.”
“그래?”
“아주 꽃단장을 하고 나가시던데. 혹시 다른 남자가 생긴 걸까요? 확실히 루치아 님이라면 마스터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겠죠.”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워 둔 것 같군. 릴리. 오늘 오후에 바로 진료소로 가 줘야겠어.”
“헐! 마스터 뒤끝 없는 사람이었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쉽게 변해도 되는 건가요?”
“농담이야.”
“아 쫌! 농담 좀 하지 말라니까요. 마스터는 농담하고 진담하고 구별이 안 간다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준은 그길로 루치아의 방으로 올라갔다.
어제 외출을 하겠다고 한 뒤로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처음엔 외박을 한 줄 알았는데 밤늦게 들어오고 아침 일찍 다시 나갔다고 들었다.
‘비밀이라는 한마디가 이렇게 마음에 걸릴 줄이야.’
루치아의 방에 도착한 준은 노크했다.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었다.
“루치아.”
잠시 못 봤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치아가 그 모습 그대로 소파에 앉아 있어서.
문득 준은 자신의 감정이 예전처럼 잔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호수에 파문이 일듯, 뭔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잘 다녀왔어요? 응?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와서 앉아요. 당신답지 않게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준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새 찻잔을 테이블에 놓은 뒤 주전자를 기울였다. 차가 또르륵 쏟아졌다. 은은한 차향에 기분이 편안해졌다.
“어때요? 성공했어요?”
“마계의 대공과 드래곤 로드가 협력해서 만든 약초인데 실패할 리가 없지.”
“그럼 추천서를 받았을 테고. 아그네스는 조만간 왕도로 오겠네요. 선물치고는 꽤 크네.”
“그렇지. 그런데 어제부터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 거야?”
“궁금해요?”
“궁금한 게 아니고…….”
“솔직하지 못하긴. 왜요. 내가 다른 남자랑 놀아날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요?”
“흠.”
작게 헛기침을 한 준은 눈을 감고 차를 음미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루치아는 오히려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누굴 좀 만나고 온 건 사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