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릴리의 참교육
“무슨 일입니까?”
“주군!”
경비병이 안절부절못했다. 때마침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방해를 한 꼴이 되었으니까. 그건 이곳의 책임자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오셨습니까. 주군.”
기사가 군례를 취하며 나섰다. 그는 누아 진료소 초기에 약초 채집에 도움을 주었던 툴리앙이었다. 그도 하룬처럼 기사 서임을 받아 이곳 경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소란스럽게 하여 죄송합니다. 어서 정리하겠습니다.”
“그건 됐고. 무슨 일인지 알고 싶군요.”
“이 여인이 다짜고짜 찾아와 주군을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수상하여 진입을 막고 있었습니다만 서둘러 정리하겠습니다.”
“툴리앙 경. 이 자가 누군지 몰라보겠습니까?”
준이 힌트를 주자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툴리앙이 움찔 놀랐다.
“설마…… 예전에 사이먼 놈과 함께 음모를 꾸몄던 그 여마법사입니까? 왠지 닮은 것 같습니다만.”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요. 기린 엘라드네스. 맞나?”
“…….”
여자는 침묵으로 긍정의 의미를 표했다.
그제야 툴리앙과 부하 병사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행색이 거지꼴이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그때 그 여마법사와 닮은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재미있는 일에 준은 미소를 지었다.
“왜 찾아왔지?”
“마나 서클의 봉인. 풀어주세요.”
“당돌하군.”
그녀는 드뇌르 백작이 꾸민 계략에 참여하긴 했지만, 마리에게 일찍 생포되어 큰 죄를 면했다. 당시 준이 마나 서클을 영구 봉인하고 사면했는데 그 이후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때 내가 마나 서클을 봉인할 때 했던 말, 기억하나?”
“충분히 반성하면 풀어준다고 했잖아요.”
“잘 기억하고 있군. 어디가 충분히 반성하는 태도인지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야.”
기린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그녀가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거지꼴에 엎드리기까지 하니 연민이 들었다.
“제발! 제발 풀어달라구요! 이대로는 더 못 살아요. 이러다가 언제 적들에게 당할지 모른다구요!”
“은원이 많은 모양이군.”
“도망치는 것도 이제 한계예요. 안 풀어줄 거면 차라리 날 죽이든가!”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제발! 살려 줘요!”
기린은 절규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참회의 눈물인지 증오의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를 안으로 들여라.”
생각지도 못한 명령이었다. 지켜보던 툴리앙이 깜짝 놀라 나섰다.
“주군! 우리 영지에 위해를 끼치려 했던 자입니다. 저택에 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사는 평범한 사람보다 못하니까. 무기를 쥘 힘도 없을 겁니다. 아, 이렇게만 얘기하면 곤란할 테니 편하게 해 드리지요. 이건 영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툴리앙이 손짓하자 두 경비병이 기린을 부축한 채 저택으로 향했다.
“무슨 속셈이에요?”
루치아가 작게 물었다. 그녀는 준과 함께 기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목소리가 앞에까지 들리진 않았다.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기회는 한번 줘야지.”
“설마 봉인을 풀어주려고?”
“그냥은 안 되고. 하는 거 봐서. 릴리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할 거야.”
준과 루치아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멀뚱히 서 있는 기린과 모여든 하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미리 전음을 받은 릴리도 나와 있었다.
기린은 긴장이 풀렸는지 체념한 표정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었다.
준이 지시했다.
“우선 이 자를 목욕시키고 하녀복으로 갈아입히도록.”
“넵. 그리고요?”
“당분간 우리 저택에서 일을 시켜라. 궂은일 가리지 말고.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당!”
릴리는 정령답게 이미 기린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음흉한 눈빛으로 기린을 훑어보았다.
기린은 잠시 반항적인 기색을 보였다. 귀족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겠다는 거였으니까. 그러나 준의 미소를 보곤 다시 체념에 빠졌다.
릴리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기린의 앞에 섰다.
“안녕? 나는 엘누아르 가문의 유력한 하녀장 후보 릴리라고 해. 반가워. 우리 구면이지? 호호호. 옛일은 잊고 앞으로 잘 지내 보자구. 우리 주인님이 사람이 좀 좋으셔야 말이지. 운 좋은 줄 알라구. 응? 얘. 너 벙어리니? 인사를 하면 받아야지?”
“……잘 부탁해.”
“말이 짧다?”
“자, 잘 부탁해요!”
준은 혀를 찼다. 저런 데에다 마나를 사용하다니. 기린은 마나가 섞인 살기에 깜짝 놀란 듯했다.
“호호호. 그래. 그래야지. 나도 잘 부탁해. 응? 킁킁. 어휴 이게 무슨 냄새니? 한 달은 안 씻은 듯한 냄새네. 너 빨리 씻어야겠다. 얘들아!”
릴리가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 두 명이 기린을 데리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이 감탄했다.
“잘하는군. 슬슬 하녀장으로 승진시켜도 괜찮겠어. 어때?”
“그럼요. 릴리는 유력한 페어리 퀸 후보이기도 했으니까.”
“엣헴!”
로비에 세 사람만 남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준의 칭찬에 루치아까지 맞장구를 쳐 주자 릴리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때, 소란을 뒤늦게 자각한 폴링이 로비로 나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행정관.”
“무슨 일이 있습니까? 꽤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만.”
준은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폴링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관용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명문가가 갖춰야 할 미덕이지요.”
“나머지는 릴리가 알아서 할 겁니다.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릴리를 하녀장으로 승진시키지요. 누아 마을에도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폴링이 예를 취한 뒤 자리를 떠났다. 릴리는 겉으로는 쿨한 척 도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술 끝이 꿈틀거리는 걸 보니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좋아해도 돼.”
“이얏호! 이제 마음껏 권력을 휘둘러도 되겠군요! 후후후. 응? 마스터. 왜 그렇게 웃어요? 뭔가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고 하네.”
“아니. 전엔 시종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했잖아? 근데 꽤 좋아하는 거 같아서.”
“마스터가 제 깊은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페어리 퀸이 되기는 틀렸으니 하녀장이라도 해 먹어야지.”
“페어리 퀸 얘기는 언제까지 우려먹을 건데?”
“평생!”
두고 보란 듯 자신을 노려보는 릴리를 바라보며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을 돌아보니 루치아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일상이겠지.
준도 결국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기린이 하녀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깨끗이 씻고 옷을 갖춰 입으니 훨씬 보기 좋았다.
준이 말했다.
“충분히 반성한 걸 행동으로 보여 주길 바란다.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너의 봉인을 풀어주지.”
“알겠어요.”
“어디서 주인님께 고개를 바짝 들고 있어?”
릴리가 타박하자 기린이 움찔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주인님. 이 아이는 제가 맡기시고 가서 볼일 보셔요. 후작 각하께 좋은 소식을 전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잘 부탁한다.”
릴리가 기린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준도 집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지만, 루치아가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그냥 가게요? 못다 한 데이트는 마저 해야지.”
“다음에. 슬슬 가스톤 가문에 전령을 보내야 해.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아직 엿새나 남았다고 했잖아요?”
“꽉 채울까 했는데 하루라도 빨리 치료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괜히 환자를 고통스럽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요. 그럼. 난 잠깐 외출할 테니 저녁 식사 때 봐요.”
“어디 가게?”
“비밀.”
루치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집무실로 들어온 준은 전령을 불러 편지를 아인하르트 후작에게 전하게 했다.
* * *
다음 날, 준을 태운 마차가 가스톤 후작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준은 어제 전달한 편지가 굉장한 효과를 발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지체 높은 아인하르트 후작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가스톤 후작가의 후계자들도 모두 모였다.
준은 자신의 입지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서 오시게. 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감사합니다. 각하. 안에서 편히 쉬고 계시지 그러셨습니까? 몸도 편치 않으신데.”
“치료제가 완성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어제 편지를 받고 바로 달려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네.”
아인하르트 후작은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료제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난치병을 오래 앓은 환자로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아마 어제 오셨더라도 치료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루 정도 숙성을 시켜야 해서요.”
“그렇군. 그런데 정말 완치시킬 수 있는 겐가?”
“저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 드리는 걸 좋아합니다. 자,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시죠.”
준이 안쪽으로 손짓하자 아인하르트 후작이 큰소리로 웃었다. 곧 그가 앞장을 서며 준을 방으로 인도했다.
“깨끗한 물을 준비해 주시죠. 그리고 후작 각하께서 쓰시는 양말과 신발 등 발에 닿는 건 모두 모아 주십시오. 한쪽으로.”
“알겠습니다.”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우선 깨끗한 물이 먼저 준비되었다. 준은 어제 만들어 둔 비약 두어 방울을 물속으로 떨어트렸다.
가벼운 파문만 일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발을 담그십시오. 한 시간 정도면 될 겁니다.”
“그러지.”
후작이 발을 물에 담갔다.
짜릿!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에 후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지근한 물이었음에도 후끈거리는 열기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오오…….”
상당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후작이 족욕을 하는 사이, 준은 하녀들이 준비해 온 양말을 쇠그릇에 던져 넣고 모조리 태워 버렸다.
갑작스레 불이 치솟자 후작이 깜짝 놀랐다.
“지금 뭐 하는 겐가?”
“무좀은 재발할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쓰던 양말은 태워 버리고 새로 준비하는 게 좋습니다. 신발은 귀한 것들이 있을 테니 소독을 하지요.”
“그러세.”
이어 준비된 신발에는 비약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 마나를 일으켜 소독했다. 확실히 태워 버리기에는 고급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모든 처리를 마치고 준이 후작에게 물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묘하군. 마치 물고기들이 내 발을 콕콕 뜯어먹는 것 같아.”
“통증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프진 않네. 간질간질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후작은 다시 한번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물이 투명했기에 두 발이 선명하게 보였다.
“음?”
그때, 후작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뭔가 이상했다.
벗겨지고 찢어진 시뻘건 상처가 아까보다 색이 연해진 것 같았다. 어느 부분은 상처가 없어지기도 했다.
‘기분 탓인가?’
후작은 조용히 발을 내려다보며 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 그는 깨달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음을.
오래도록 후작을 괴롭혀 온 무좀에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