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카이엔의 던전
준의 목적지는 누아 마을 뒷산에 위치한 던전이었다. 카이엔이 얼마 전에 만들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은밀히 던전 안으로 들어간 준은 잠시 멈춰선 뒤 기감을 끌어 올렸다.
보통 사람에겐 조용하기만 한 곳이었지만, 준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생각보다 빠르군. 아니, 부지런하다고 해야 하나?’
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펼친 기감에 여러 기척이 걸렸다. 그중엔 하룬의 것도 있었다. 엘누아르의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던전 탐사를 시작한 듯했다.
‘웬만하면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어. 잔뜩 긴장해 있는 상황일 테니까.’
작전을 수행할 땐 평소 실력을 유지하는 게 좋다. 괜히 변수를 만들어 난도를 올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 던전에 특별한 트랩이 설치되진 않았다. 자연이 만든 함정과 구덩이 같은 것들만 있을 뿐.
문제는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준과 카이엔뿐이라는 것에 있었다.
탐사대를 지휘하는 하룬은 마르다 마을 던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던전 탐사에 나설 것이다.
그렇다면 탐사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때 경험했던 트랩은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카이엔이 몬스터를 풀어놓았기 때문에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상황. 몬스터와 처음 대면한 이후로는 아마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그래도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지? 어차피 이곳에서 약초를 채집해야 하니.’
준은 동굴 입구 근처에 마련된 포털에 발을 내디뎠다. 이것도 준과 카이엔만 아는 비밀 이동 장치였다.
파팟!
그의 모습이 일순간 자취를 감췄다.
다시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탐사대가 있는 근처였다. 정확히는 2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1층 공략을 거의 끝냈군. 처음치곤 제법인데?’
준은 벽에 은신한 채 조용히 탐사대 쪽을 살폈다. 마침 탐사대는 휴식 중이었는지 바닥에 둘러앉아 있었다.
빛이 하나도 들어올 수 없는 깊숙한 동굴이었지만, 주변은 밝았다. 빛의 구체가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마리가 도움을 준 결과였다. 그녀의 마나가 분명히 느껴졌다.
최근 마리는 마법적인 경지가 점점 올라가며 마법부여 기술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천장에서 빛을 발하는 저 신비한 돌도 마리의 손을 거치기 전엔 평범한 돌멩이였을 것이다.
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기사단원들을 살폈다.
‘부상을 당한 건가?’
하룬과 두어 명의 단원들이 어떤 젊은 병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준은 안력을 끌어올려 그쪽을 자세히 살폈다.
젊은 병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쪽 다리를 노출시켰다. 이어 하룬이 응급처치 키트를 열어 병사의 오른쪽 다리에 약재를 발랐다.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양이 많진 않았고, 전투 중에 입은 부상 같았다.
‘다행히 깊은 부상은 아닌 것 같군.’
준은 다른 단원들의 모습도 살폈다.
자리에 앉아 쉬고 있었지만 모두가 긴장한 표정이었고, 하룬도 평소에 즐겨 하던 농담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응급처치를 해 나갔다.
곧 붕대 감기가 끝났다. 하룬이 손을 떼고 한숨 돌렸다.
“휴우. 끝났다. 통증은?”
“괜찮습니다!”
“진료소에서 만든 키트는 정말 효과가 좋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 후미에 서지 말고 중간에 서. 천천히 이동한다.”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봐 신병. 우리의 목표는 이 던전을 탐사하는 거지만 모두가 무사히 이곳을 나가는 거기도 해. 가족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할 일 없게 해 달라고. 난 그런 데 소질 없으니까. 알았지?”
“예엣!”
얼마 전에 징집된 신병인 것 같았다. 부상을 당했는데도 목소리가 우렁찼다. 하룬은 그를 잘 타이르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좋아 좋아! 조금만 더 쉬고 이동하자고! 고지가 멀지 않았어! 다들 힘내자!”
“옛!”
그중엔 기사들도 있고 나이가 하룬보다 많은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하룬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인성과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분위기. 나쁘지 않았다.
규율을 세워 억지로 따르게 하는 것보다 내부에서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게 훨씬 좋다.
‘너도 잘하고 있구나. 내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훌쩍 왕도로 떠난 것 같아 아그네스와 하룬에게 미안하던 그였다.
하지만 혼자서도 잘하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자신의 그림자 때문에 제자들이 스스로 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좀 더 기회를 줘도 되겠어. 힘내라. 하룬.’
그때, 하룬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준이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익숙한 기운을 느꼈던 하룬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기분 탓인가?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왠지 뒤통수가 뜨거워서. 응? 야. 인마. 맨날 혼자 맛있는 거 먹냐? 좀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먹자고.”
하룬은 부하에게 육포를 받아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면서도 한동안 준이 있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준은 탐사대를 앞질러 2층으로 내려갔다. 1층은 이미 탐사대가 채집을 마쳤기에 약초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끼룩? 인간?”
“인간이다!”
갈림길을 눈앞에 두고 몬스터가 나타났다.
고블린이었다. 그런데 1층에 있는 것들보다 체구가 훨씬 크고 튼실해 보였다. 일반 고블린이 아니라 진화한 놈들인 것 같았다.
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몬스터들을 살폈다.
수가 적지 않았다.
물론 손 하나 까딱하면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 몬스터들은 단원들의 경험치가 되어야 했다.
‘재우는 게 좋겠어.’
준이 수면 마법을 준비할 바로 그때, 고블린들이 그를 무시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호전적인 진화종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준은 마나를 거두었다.
‘흐음. 카이엔이 미리 손을 써둔 건가?’
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곳마다 몬스터들이 나타났지만 아무도 준을 건들지 않았다. 아예 그를 인식하지 못하는 몬스터들도 있었다.
‘확실하군. 역시 마계 대공이 만든 던전이라 그런지 편리해. 몬스터들이 말을 잘 듣는군.’
그렇게 준은 약초 자생 지역에 조용히 도착할 수 있었다.
기분 나쁜 기운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이었다. 퀴퀴한 곰팡내와 함께.
치유사에겐 익숙한 냄새라 준은 개의치 않고 주변을 살폈다.
늪 주변으로 약초들이 퍼져 있었다. 동굴에서 쉽게 자랄 수 있는 버섯류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한눈에 봐도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좋아. 필요한 건 이곳에 다 모여 있는 것 같고. 슬슬 채집을 시작해 볼까?’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허리를 굽히고 호미를 꺼내려던 준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인간의 모습을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바로 카이엔이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군. 그대가 어쩐 일로?”
“왜 왔겠어? 약초 채집하러 왔지.”
준은 호미를 까딱였다. 카이엔은 팔짱을 끼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은 위층에 있는 거 같던데 왜 따로 움직이지?”
“몰래 왔으니까. 나 왕도에 갔다는 소식 못 들었나? 단원들은 내가 왕도에 있는 줄 알 거다.”
“그렇군.”
카이엔은 뒷산에 사는 누구와는 달리 지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어때. 약초는 마음에 드나?”
“아주 훌륭해. 이 정도면 웬만한 병은 다스릴 수 있겠어. 확실히 볼카누스가 힘을 보태니 결과가 좋군. 앞으로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
“그건 불가하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노력 정도는 해 보라고.”
서걱서걱.
준은 약초 채집을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손놀림이었다. 깨끗이 손질된 약초가 가방에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카이엔은 한옆에 솟아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한가롭게 구경했다.
“부하들이 아주 잘 싸우더군. 1층 몬스터는 거의 정리되었다. 시골 기사단이라고 해서 얕보고 있었는데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더군.”
“훈련을 시킨 사람이 아주 독하거든. 왕도에서 뭔가 비밀리에 활동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부하들이 몇 층까지 내려갈 수 있겠어? 네가 보기에.”
“그 정도 전력이라면 2층까지는 문제없을 거다. 하지만 부상자가 있어서 곧 돌아갈 거 같더군. 방금 2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오, 그럼 보물 상자를 열었겠네?”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던전을 만들 때 한 층을 클리어하면 보물 상자를 열 수 있게 설계해 놨다. 신비감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 던전 탐사에 대한 의욕을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준이 물었다.
“근데 1층 보물 상자에 뭐 넣었었지?”
“무기와 방어구를 넣었지. 볼카누스가 준 쓰레기들을 적당히 섞어 넣었다.”
“너무 좋은 건 넣지 마라. 소문나면 곤란하니까.”
카이엔이 쓰레기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건 마계 대공의 시선에서 평가한 것이지 평범한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예전에 하룬에게 선물한 ‘얀센의 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수준의 무구들이었다.
경험도 쌓고 좋은 아이템도 얻고.
그렇게 엘누아르 기사단은 하루하루 착실히 전력을 보강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영지전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
“떠날 계획인가?”
“글쎄. 아직 계획엔 없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사람 일이라는 거. 마을을 이렇게 키워 놨으면 어느 정도 책임은 져야겠지.”
약초 채집을 끝낸 준이 가방을 확인했다. 필요한 약재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었다. 수확을 마친 농부들의 심정이 이럴까. 왠지 뿌듯했다.
“그럼 난 이만. 수고해.”
“준. 언제 누아로 돌아오지?”
“왠지 요즘 언제 돌아오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진 거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장난스럽게 웃은 준이 돌아서며 말했다.
“보고 싶으면 볼카누스랑 손잡고 왕도로 오든지. 마리에게 얘기하면 포탈을 열어 줄 거야.”
“기다리고 있겠다.”
“나이 먹으면 쓸데없이 고집이 생긴다던데 정말인 모양이군. 그럼 진짜 간다. 수고.”
준은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곤 약초 자생지에서 벗어났다.
* * *
왕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준은 진료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후작의 무좀을 치료할 회심의 비약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이미 폴링이 시설을 잘 갖춰 놓았기 때문에 필요한 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여러 약재를 섞고 마나로 정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때, 문이 열렸다.
이 저택에서 노크도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언제 왔어요?”
“방금.”
“정말 금방 왔네. 포탈이 편하긴 하네요. 다른 사람들도 쓸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요. 폴링 경도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하니까.”
“고려해 보지.”
곧 준의 손에서 비약이 완성되었다.
순도 높은 마력으로 정제된 약은 무색무취의 액체였다. 준은 완성된 비약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플라스크의 뚜껑을 닫았다.
“잠시 나갈까? 식사 전에 바람이라도 쐬지.”
“어머, 웬일?”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잖아.”
“좋아요!”
두 사람은 사이좋게 정원을 거닐었다. 바람도 선선하고 날씨도 좋았다. 정원은 좁았지만 두 사람이 시간을 보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바로 그때, 정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정문 쪽으로 향했다. 두 경비병이 어떤 사람을 붙들고 있었다.
거지꼴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이 문 열라고! 비켜!”
“어디서 행패를 부리는 거냐? 썩 꺼지지 못해?”
“비키라고!”
순간,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거지꼴을 한 그녀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