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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16화 (116/175)

116화 질투는 나의 힘

다행히 세 귀족은 준을 따라오지 않았다.

덕분에 준 일행은 마차에서 아비룬의 거리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관문을 지나자 멋진 건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단연 으뜸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아비룬 왕궁이었다.

왕실의 권위.

그 단어가 절로 생각나는 멋진 건물이었다. 첨탑의 끝에선 신비로운 빛이 번쩍였는데, 그래서 밤이 되어도 왕궁은 늘 환하게 빛났다.

실제로 아비룬 왕궁은 아비루나 왕국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대륙의 명소였다.

“정말 예쁜 도시네요. 아 참, 당신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했었죠?”

“맞아. 꽤 최근이었던 것 같은데. 막상 보니 상당히 변한 것 같은 느낌이군.”

“나이를 먹는다는 건 늘 그런 느낌이죠.”

농담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자신도 루치아도 진짜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생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아무튼 좋네요. 진작 오자고 조를 걸 그랬네.”

“그러게요! 너무 신나요! 저기 좀 보세요! 우와아! 상점가가 엄청나게 커요. 안 파는 게 없을 거 같은데?”

“밤에 쇼핑갈까?”

“콜!”

마차 안이 시끄러워졌다. 준은 신경을 끄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도시 곳곳에서 질서정연함이 느껴졌다.

멀리 솟아 있는 첨탑과 고층 건물, 그리고 그 주변으로 질서 있게 늘어선 주택을 보니 잘 정비된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라 건물 사이에 놓인 도로도 굉장히 넓고 쾌적했다. 마차가 지나다녀도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이상한데. 도로에 뭔가 특별한 처리를 한 건가?’

준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도로를 살폈다.

울퉁불퉁한 곳 없는 반듯한 길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현재의 기술로는 쉽게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혹시 마법공학을 응용한 건가?’

준은 가볍게 마나를 흘렸다.

땅에 닿은 마나가 다시 손으로 돌아왔다. 마력을 분석해 보니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도로가 맞았다. 충격을 흡수하고 변성을 막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누아 마을에 정착한 이후로는 현재의 기술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골 마을이었으니까. 켈세타도 큰 도시이긴 하지만 왕도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자세한 건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기술의 진보가 빠른 느낌이었다.

‘흥미롭군. 이 세계의 마법공학은 단순히 장치를 만드는 것을 넘어 거대한 건축물이나 구조물을 건설하는 데까지 나아간 모양이야.’

마법은 마법사의 삶에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마법공학은 다르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물론 마법공학도 마나가 중심을 이루는 만큼 마법사나 마법공학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마법공학 기술이 아무리 진보했다고 해도, 그것을 만들고 유지할 역량이 부족하다면 기술이 널리 퍼지기 어렵다. 머릿수가 적어도 마찬가지고.

유지 비용을 줄이고 보다 대중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현재 마법공학의 과제인 셈이다.

‘조만간 마법공학도 손을 대야겠어. 당분간은 상비약에 집중하되 시간을 쪼개서 의료용 기계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문득 빈센트 대공자가 떠올랐다. 그와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 다양한 경우의 수가 준의 머릿속에서 계산되기 시작했다.

‘꽤 시끄러워질 거야. 너도 나도 줄을 설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한 가지였다.

어떤 협상에도 우선권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 단순히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준도 속이 타겠지만 오히려 아무런 욕심이 없으니 협상하는 상대가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쯤 가스톤 후작가에 방문해야겠군. 내일은 일단 진료만 하고 대공자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천천히 떠봐야겠어.’

계획이 선명해질 무렵,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사람으로 북적이던 광장을 벗어나 고급 저택 단지에 들어선 것이다.

마부는 천천히 말을 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폴링이 보내 준 약도를 살폈다. 그가 약도를 자세히 그려 준 덕분에 마부는 금방 저택을 찾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문의 문양을 알아본 병사들이 마차를 향해 군례를 취했다. 그리고 정문을 활짝 열었다.

마차가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정원이 딸린 아담한 저택이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저택이었다면 정원이 넓어 건물까지 꽤 달려야 했겠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현관이 열리더니 폴링이 달려 나왔다.

“영주님!”

준이 마차에서 내렸다. 루치아와 릴리도 함께 내려 폴링과 인사를 나눴다.

폴링은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저택을 고르긴 했는데 과연 준이 마음에 들어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오다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우리 가문의 금광을 노리던 자들이었지요.”

습격이라는 말에 폴링이 깜짝 놀랐다.

“저런!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우리 쪽 피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슬슬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진료소나 금광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이런 단장과 의논해서 즉시 대책을 수립하겠습니다.”

든든한 한마디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준은 한 발자국 물러나 저택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저택의 외관을 한번 살펴본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담하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잘 살아 있는 저택이었다. 그리고 과하지 않게 꾸며진 정원도 마음에 쏙 들었다.

“과연. 엘누아르의 행정관이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왕도에 퍼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그 이상이군요. 흠잡을 곳 하나 없는 멋진 곳입니다. 아직까지는. 이제 안을 좀 살펴보고 싶은데.”

“이쪽으로 오십시오.”

폴링은 한층 여유로운 표정으로 준을 안으로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도열해 있던 하녀들이 앞치마에 손을 모으며 꾸벅 인사했다.

“이번에 새로 채용한 하녀들입니다. 모두 왕도 출신으로 야무진 아이들로 뽑았습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주님.”

미리 연습했는지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폴링이 잘 가르친 덕에 체계가 잘 잡혀 있는 듯했다. 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강준입니다.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잘 부탁합니다.”

준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인사에 하녀들의 눈이 반짝였다. 게다가 외모까지 받쳐 주니 머릿속에서 먼저 진도를 빼고 있는 대담한 하녀들이 속출했다.

당연히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루치아가 아니었다.

“폴링 경. 스무 명은 너무 많지 않아요? 이 작은 저택에 말이죠. 아무리 사업이 잘 풀리고 있다고 해도 낭비가 아닐까?”

“교대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 인원은 절반입니다. 오늘은 영주님께서 오신다고 해서 특별히 모두 불러들였지요.”

“그래요?”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루치아는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냈다.

“그럼 어디 한번 지켜봐야겠네요. 제 몫을 잘해 내는지. 폴링 경이 직접 뽑으셨으니 일들은 잘하겠지만.”

루치아는 존재감을 충분히 발휘했다. 하녀들은 루치아의 서슬 퍼런 눈빛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모두 들은 상황이었다.

폴링도 루치아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했다. 언제 남작 부인이 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때, 저 멀리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정관. 루치아 선생에게 먹을 걸 좀 준비해 주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먹을 거?”

“기분이 나쁠 땐 먹는 게 최고 아냐?”

“당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아는 루치아 선생은 합리적인 사람인데 지나치게 감정적인 거 같아서. 일은 못 하면 못하는 대로 가르치면 되잖아? 일 못 하는 게 죄도 아니고.”

지나가듯 툭 던진 준은 뒷짐을 진 채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뜻하지 않게 하녀들에게 또다시 점수를 따고 만 준이었다.

하지만 하녀들은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보다 못한 릴리가 나섰다.

“안녕? 내 이름은 릴리라고 해. 엘누아르 본가의 시녀지. 거기 너! 그래. 너 말이야. 파랑 머리! 주인님 그만 보고 날 좀 봐 줄래? 좋아. 이번은 처음이니 한번 봐주지. 엣헴. 우리 가문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으니 내가 특별히 교육해 줄게. 주제를 모르고 까불었다간 아주 혼쭐이 날 거라구!”

멀리서 그 목소리를 들은 준은 혀를 찼다.

* * *

저택을 둘러보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준이 워낙 꼼꼼하게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폴링은 내부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썼다. 돈을 아끼지 않고, 준이 최대한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합당한 보상으로 돌아왔다.

“좋군요. 아주 좋습니다. 마치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집을 구한 것 같군요. 이번 일을 행정관에게 맡기길 잘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래도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하하하!”

이제야 소리 내어 웃는 폴링이었다. 그간 고생한 것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준은 소파에 몸을 묻고 편히 앉았다. 그리고 폴링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하녀들이 준비한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출입사무소에서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요즘 통행이 쉽지 않다더군요.”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가문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당직사관이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서류를 보여 줬고.”

“예? 서류를 미리 준비하셨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미리 손을 썼지요.”

“잘하셨습니다! 원칙이야말로 명문가를 만드는 지름길이지요.”

폴링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차를 홀짝였다.

준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빈센트 공작을 만류하고 서류를 보여 준 사건은 출입사무소에서 꽤나 화제가 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권위와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준귀족인 기사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일이 많다.

그런데 그곳을 통과하며 준이 보여 주었던 행동은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어찌 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덕분의 준의 이름과 엘누아르 가문은 출입사무소에서 일하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분명히 각인되고 있었다.

“찾아온 손님들은 어땠습니까? 귀족들이 왔었다고 들었는데.”

“다들 호의적이었습니다. 인사차 온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느 분들은 진료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진료를?”

“예.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진료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꽤 늘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가스톤 후작가에 왕진을 다녀오신다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후작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폴링은 준이 그 병을 분명히 치료할 거라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망 있는 귀족의 병을 고친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에 맡길 필요도 없다. 너무나도 자명하니까.

“그래서 저택에 진료실을 만든 겁니까?”

“그게…… 마지막까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만, 역시 하나 만들어 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영주님의 저택인데 진료실 하나 없다니, 뭔가 허전해서요.”

“재미있군요. 이렇게 된 거 비밀 진료소를 한번 열어 볼까요? 앞으로 절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지 마십시오. 귀족이든 천민이든.”

“천민까지 말입니까?”

폴링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지만, 이내 납득하곤 고개를 숙였다. 준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생명의 무게에는 경중이 없다고.

“알겠습니다.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티타임이 끝나고 준은 침실로 돌아왔다. 하녀를 물리고 바닥에 마법진을 깔았다. 마나를 불어넣어 누아 진료소에 깔아 둔 것과 연결했다.

“들리나?”

― 네, 스승님. 잘 들려요.

“진료소엔 별일 없지?”

― 볼카누스 씨가 스승님 언제 오냐고 매일 물어보시는 거 빼고는 없어요.

“하하하. 나름 큰일이군. 알았다.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해.”

통신을 끊은 준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 파묻히니 절로 눈이 감겼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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