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왕도 입성
왕도(王都) 아비룬.
아비루나 왕국의 초대 국왕의 이름을 딴 도시. 까마득히 먼 옛날에 세워진 곳인 만큼, 그 규모나 역사는 눈부시게 찬란했다.
게다가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졌기에 도시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아비루나 왕국은 대륙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대국 중 하나였다. 때문에 왕도 아비룬엔 늘 사람들이 몰렸고, 상업과 공업 등 다양한 분야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늘 문제가 끊이지 않는 법.
도시 자체는 평화롭지만 출입관리소는 사정이 좀 다르다.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고, 유사시를 대비해 검문검색이 철저했다.
가끔 신분을 입증하지 못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끌려가거나 즉결 심판을 받기도 한다.
오늘은 특히나 분위기가 삼엄했다.
바로 한 남자 때문이었다. 뺨에 기다란 흉터가 있는 중년이었는데, 그는 두꺼운 가죽 갑옷과 롱소드를 착용하고 있었다. 체격이 아주 듬직하니 좋았다.
그는 말에 오른 채 사람들이 출입하는 관문에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누군데 저기서 저렇게 폼을 잡고 있어? 신경 쓰여 죽겠네.”
“인마 말조심해! 저분이 누군지 몰라?”
“나 왕도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 거 알면서 그러냐.”
“미놀렌 경.”
“헉!”
그 이름 하나에 병사가 움찔했다.
얼굴은 몰라도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왕국 10대 마스터 중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를 모른다면 손가락질을 받아도 싸다.
“미놀렌 경이 여기엔 왜? 알프하이겐 공작가에 귀한 손님이라도 오나? 아니면 비밀 임무를?”
“나도 모르지. 궁금하면 가서 한번 물어봐라. 응?”
“괜히 심기 건드렸다가 칼 맞고 뒈지게?”
병사들은 몸을 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탄 사내는 알프하이겐 공작가의 기사단장이며 왕국의 위대한 검객이기도 했으니까. 그가 지금까지 세운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당직사관 기사가 혀를 차며 몸소 나섰다.
주변에 있는 모든 병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미놀렌 경.”
“당직사관인가?”
“그렇습니다.”
“고생이 많군. 어디 보자…… 왠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자네와는 예전에 인연이 있었군. 5년 만인가? 이름은 페론. 기사 아카데미 수업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지?”
말을 건 기사는 깜짝 놀랐다.
지금이 두 번째 만남이었고, 게다가 5년 만에 인사를 하는 건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사 아카데미 수업에서 만난 사실도 맞다. 정말 비상한 기억력이었다.
기사 페론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기사는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 법이라네.”
“아, 실례했습니다.”
5년 전의 가르침을 다시 상기한 페론이 고개를 당차게 들었다. 그제야 미놀렌 경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라면 훌륭한 기사가 될 거라 생각했네. 잘 성장했군. 사람들은 출입관리소 관리직을 한직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왕도의 심장으로 이어진 중요한 길이지. 이곳을 지키는 건 곧 왕국을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네.”
“명심하겠습니다.”
기사 페론은 감격에 찬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나 나눌까 했는데 받아 적어도 모자란 명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다른 게 아니라, 이곳에 홀로 계셔서 혹시 도와드릴 일이 없나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하하하! 내가 의심스러워 보였던 거군. 하긴, 기사단 정복을 입지 않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어. 오늘은 편히 나온 거라네.”
“괜찮으시면 안에서 차를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다음으로 미루지. 편히 나왔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알겠습니다.”
페론이 군례를 취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출입관리소에서 일하는 누구도 미놀렌 경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왕국을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 그들의 사기를 북돋은 것이다.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주 여유롭게 걸어오는 소리였다.
“오, 이게 누구십니까. 알프하이겐 공작가의 기사단장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요? 공사가 다망하신 분인데 말이지요.”
“오브라이언.”
예복을 걸친 사내, 오브라이언이 천천히 미놀렌 경에게 다가왔다.
순백의 말에 오른 그는 미놀렌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동그란 안경이 지적인 느낌을 풍겼고, 풍부한 블론드가 고귀한 혈통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실 두 남자는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 경쟁의 첨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오브라이언은 페르디낭 후작, 즉 메디치 가문의 책사였다. 비상한 두뇌와 지략으로 명성이 높다.
아비루나 왕국을 대표하는 가문의 명인들.
다시 말해, 이 상황은 알프하이겐 공작가와 메디치 후작가의 경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는 자네는 여기에 무슨 일로 왔나?”
“아마도 단장님과 같은 이유겠지요?”
“후작 각하께서 보냈군.”
“곧 강준 남작께서 왕도에 도착할 거라는 정보가 도착했지요. 가급적이면 빨리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애석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가급적이면 빨리 모셔오라는 페르디낭 각하의 명을 따를 수 없게 될 테니까. 강준 남작은 내가 먼저 모시겠다.”
“그렇게 된다면 저희 주군께서 많이 서운해하실 겁니다.”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낭 후작은 사교의 제왕이기도 하지만 교육 및 학술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강준이 고안한 ‘로가리듬의 법칙’을 어떻게든 정식으로 왕립학술원에서 발표시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로그 계산법은 실로 대단한 발견이었다.
비공식으로 그 계산법을 접한 많은 학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발견을 해낸 준과 대화를 나누기를 희망했다.
그건 페르디낭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발 벗고 나섰다.
그동안 오랜 친구인 파비안 남작을 통해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누아 마을에서 도통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왕도에 저택을 구입하고, 또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는 소식은 페르디낭 후작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책사인 오브라이언이 출입관리소까지 나온 것이다.
“자네는 지략이 출중하니 각하의 서운함을 잘 달랠 수 있을 것이네.”
“선택은 강준 남작께서 하시겠지요. 그러나 아무런 접점이 없는 아레스 각하의 청을 들으실까요? 실제로 저희 주군께서는 켈세타에서 남작님을 만난 적이 있지요.”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건 손에 무엇을 쥐여주느냐가 아니겠나? 우리 가문은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네.”
치열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기 전까진.
“아무래도 이 경쟁에서 제가 빠질 수는 없겠군요.”
날을 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스톤 후작가의 대공자인 빈센트였다.
준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그는 한껏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다.
미놀렌 경이 눈매를 좁혔다.
“대공자께선 또 무슨 일로?”
“얼마 전에 엘누아르에 다녀왔지요. 풍광이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엘누아르라면 준의 영지였다. 순간 미놀렌 경과 오브라이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때 강준 남작께서는 왕도에 저택을 하나 구입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문에서 좀 도와드렸지요. 그렇다면 마땅히 제가 모시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랬군. 엄청난 다이아몬드가 경매에 풀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후후.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군.”
오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빈센트 대공자는 미소를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브라이언이 물었다.
“그런데 가스톤 후작가에서는 왜 강준 남작에게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한번 멋진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멋진 세상? 하하하! 지금까지 대공자께 들었던 말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나중에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덜커덩!
그때, 엘누아르 가문의 문양을 단 마차가 귀족 출입소에 도착했다. 기사들이 앞을 막아 세우고 마부에게 내리라 지시했다.
“그럼 전 용무가 있어서 이만. 다음에 또 뵙지요.”
엘누아르 가문의 문양을 알고 있는 건 빈센트 공자뿐이었다.
공자가 재빨리 움직였다. 나머지 두 사람도 뒤늦게 눈치를 채고 그의 뒤를 따랐지만 선두를 뺏지 못했다.
때마침 출입 수속이 시작되었다.
평민 이하의 수속은 병사들이 하지만 귀족이나 준귀족들의 수속은 기사들이 맡는다.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직사관인 페론이 직접 나섰다.
“어디서 오셨소?”
마부가 내려와 공손히 보고했다.
“엘누아르 가문의 강준 남작님을 모시고 왔습니다요.”
“음? 엘…… 뭐요?”
“엘누아르 가문입니다.”
처음 듣는 가문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페론이 가문의 문양을 다시 살폈다. 아무리 봐도 본 기억이 없었다. 매뉴얼에도 나와 있지 않고.
“처음 듣는 가문인데. 어느 지역에서 오셨소?”
“켈세타에서 왔습니다. 누아 마을을 거점으로 한 작은 영지입죠.”
“켈세타에서? 이상하군. 엘누아르 가문은 처음 듣는 곳인데.”
시간이 지체되자 결국 준이 마차에서 내렸다. 준은 백의를 걸치고 있어 전혀 귀족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그게…… 기사님께서 엘누아르 가문을 잘 모르겠다고 하셔서.”
“그럴 만도 하지.”
예상했던 일이었다. 남작위를 받은 지도 얼마 안 됐고, 사교계에서 전혀 활동하지 않았으니까.
관심을 보였던 빈센트 대공자도 그가 아직 준남작인 줄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준은 품에서 작위 관련 서류를 꺼내 페론에게 건네려 했다. 그때, 뒤에서 빈센트 대공자가 나섰다.
“그분은 엘누아르 가문의 가주인 강준 남작이 맞다. 내가 보증하지.”
“대공자님?”
“우리 가문에서 특별히 초청한 분이다. 어서 길을 열도록!”
“옛!”
“잠깐.”
그때 준이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러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중간에 낀 기사 페론은 오도 가도 못 한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준이 빈센트 공자에게 말했다.
“배려는 감사한 일이나 절차를 따르고 싶습니다. 이분의 임무를 방해하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잠깐이면 됩니다. 서류를 챙겨 왔으니 확인해 보시지요.”
준이 서류를 페론에게 전했다. 그것은 사우던 가문의 드뇌르 백작이 직접 작성한 서류로, 준의 작위와 봉토를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확인을 마친 기사 페론이 군례를 취했다.
“시간이 지체된 점 송구합니다. 확인되었으니 지나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준은 마차에 오르기 전 빈센트 공자에게 말했다.
“가스톤 후작가엔 나중에 들르겠습니다. 먼저 우리 가문의 저택을 둘러보고 싶군요. 따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준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다시 말을 재촉해 그곳을 빠져나갔다.
빈센트 공자는 준을 데려가지 못해 의기소침했지만, 미놀렌 경과 오브라이언은 전혀 달랐다. 두 사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귀족다운 귀족이 나타난 것 같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페르디낭 각하께서 왜 강준 남작을 찾으셨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보통의 귀족이었다면 절차를 생략하고 편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준은 그러지 않았다. 그 부분이 두 사내의 관심을 끈 것이다.
“오랜만에 왕도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군요. 가스톤 후작가까지 나선다면 스케일이 제법 크지 않습니까?”
“건투를 비네.”
“죄송하지만 이번엔 봐드리지 않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요.”
각 가문을 대표하는 두 사내는 말을 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