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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14화 (114/175)

114화 추억의 민속놀이

“으응?”

뭔가 사라졌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준이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두목은 배틀 엑스를 꺼내지도 못한 채 기겁했다.

“헉!”

손 하나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것이다.

그가 보여 준 놀라운 신위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 경직되었다. 정확하게는 반응할 틈도 없이 준이 움직였다.

하지만 준은 공격하지 않고 두목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 소문을 듣지 못했나?”

“무, 무슨 소문?”

“사우던 가문의 기사단장이 개입한 진료소 습격 사건.”

“그건…….”

정신을 차린 두목이 말을 줄였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일부러 시간을 끌어 부하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는 틈을 벌어야 했다.

“뭐 해? 다들 정신 차려!”

“놈을 쳐라! 죽이지는 말고 생포해야 해!”

거친 음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무기가 토해내는 쇳소리가 사방을 울렸고, 함께 있던 마법사도 캐스팅에 들어갔다.

화르륵!

손 위에 거대한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저 정도면 마리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실력 있는 마법사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유수의 마탑 출신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준이라는 것이었다.

실력이 어떻든 출신이 어디든 그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숲속에서 불은 좀 위험하지 않나? 자연의 힘을 다루는 자라면 그 정도는 고려해야지.”

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젊은 마법사의 손에 떠 있던 화염구가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마치 물을 끼얹은 것처럼 일순간에.

“이, 이럴 수가…….”

젊은 마법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법 무효화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부정적인 영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이봐!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어서 마법으로 날려 버리라고!”

“장난이 아니야! 마법이 안 써진다고! 저 귀족 놈이 뭔가 마법을 걸었어!”

“뭐?”

실제로 젊은 마법사는 다시 마나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오히려 고통에 휩싸였다. 강력한 마력 봉쇄 마법이 걸린 것이다.

도적 무리가 패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여기 모인 도적들의 무력 수준은 낮은 편이었다. 두목을 제외한 자들은 쪽수를 채우기 위해 존재했다. 젊은 마법사가 히든카드였다.

그런데 그의 마법이 일순간에 제압당한 것을 목격하니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거기에 준이 쐐기를 박았다.

준은 두목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 두목의 목숨이 걱정된다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난 대화에 방해받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도중에 끼면 무례하잖아? 참고로 이야기하는 도중 자리를 뜨는 것도 질색하는 거 알아 두고.”

준의 다른 손에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두목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 가만히 있어라! 덤비지 마!”

“보기보단 현명하네. 마음에 든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 내 소문을 듣지 못했나? 사우던 가문의 기사 하나가 얽힌 일 말이야.”

“그…… 어쌔신들이 습격했던 걸 말하는 겁니까?”

“그래.”

두목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여름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기사단장 사이먼이 어쌔신 무리를 이끌고 진료소를 습격하려다…… 모조리 전멸했다고 알고 있소.”

“그런데 덤벼?”

“그야 호위가 없으니까…… 기사나 병사들도 없이 왕도로 가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습니다.”

“왜 호위를 붙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한 모양이군.”

“…….”

좋은 기회라고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치 손에 높은 패가 들어와,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에 무섭게 베팅을 하는 느낌으로.

“그들을 전멸시킨 게 누구인지 들었나?”

“에, 엘누아르의 기사단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준은 빙긋 웃었다. 누아 마을 사람들에게는 포근한 미소였지만, 벌벌 떨고 있는 두목에게는 사신의 미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어쌔신들을 모두 처리한 준은 마을 밖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게끔 손을 썼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것이 마음처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준은 누아 마을 기사단이 적들을 처리했다는 가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자신의 힘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인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다. 이들처럼 자신을 노리는 자들을 빠르고 손쉽게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방심을 유도하는 것으로.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지……?”

“그냥 궁금해서. 별 뜻은 없어. 그냥 편히 목숨값이라고 생각해라.”

자신에 대한 소문이 아직 완벽하게 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소득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이들의 처분을 잠시 고민한 준이 결정을 내렸다. 즉시 몸을 돌려 큰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모두 잘 들어라. 두 번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모두 제자리에 무기를 버려라.”

도적들이 무기를 지체 없이 바닥으로 던졌다. 검, 창, 활, 비수, 손도끼 등 각종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아다 팔아도 꽤 돈이 될 거 같았다.

도적들의 손이 모두 빈 것을 확인한 준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이제 저쪽 공터로 가서 2인 1조로 서로 양손을 잡는다. 그냥 잡지 말고 두 손을 포개서 잡아라. 실시.”

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뒤엉키고 난리가 났다. 뛰다가 돌부리나 다리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준의 말은 살려 주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래서 도적들은 더욱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런데 숫자가 짝수가 아니었는지 한 명이 남고야 말았다.

마력 봉쇄 마법에 걸린 그 마법사였다.

“마나를 쓰지 못하는 무력감을 이제 좀 알겠나?”

“헉!”

준이 다가오자 화들짝 놀란 마법사가 뒤로 넘어졌다. 마법사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억지로 마나를 일으키려다 내부 혈도가 완전히 뒤틀린 것이다.

마법사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마법사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젊은 마법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혀를 찬 준은 두목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곧 두목이 헐레벌떡 공터로 뛰어왔다. 준은 턱짓으로 젊은 마법사를 가리켰다.

“너희 둘이 짝이다. 얌전히 손을 잡고 있도록. 아니, 그렇게 말고. 양손을 한 곳으로 모아야지. 그래야 내가 묶을 수 있잖아? 옳지. 바로 그거다.”

두 남자가 손을 잡자 준이 속박 마법을 준비했다. 밧줄이 없었기 때문에 마법으로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시야에 거대한 나무가 들어왔다.

얼마나 큰지 백 년 이상은 자란 것 같았다. 높이도 상당해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릴 지경이었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든 준은 계획을 바꿨다. 속박 마법을 취소하고 다시 도적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저쪽에 보이는 큰 나무로 이동해. 서로 손을 잡고 나무를 가운데에 놓고 빙 둘러싸라.”

도적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준의 말대로 서로 손을 잡고 나무를 빙 둘러쌌다. 뭔가 의식을 치르는 듯한 모습에 도적들은 의아하면서도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와중에 준은 돌아다니며 도적들의 손에 강력 속박 마법을 걸었다.

몇몇 간이 큰 도적들은 손을 떼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와 내 동료들의 목숨을 노린 건 중죄다. 죽어 마땅하지. 하지만 너희들의 입장도 이해한다. 살다 보면 금광이 탐이 날 수도 있으니까.”

준은 잠시 말을 끊었다. 도적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준의 말에 모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풀어주는 건 대의를 위해서 좋지 않겠지?”

“살려 주십시오!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숨겨 둔 보물을 드릴게요!”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도적들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준이 검지를 입술에 댔다. 더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조용해지자 준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손에 걸린 속박 마법은 일주일간 유지된다. 푸는 방법은 두 가지야. 일주일 동안 버티고 살아남든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바로 젊은 마법사였다.

그들이 매서운 눈으로 젊은 마법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준이 이곳을 떠나면 당장 속박 마법을 해제하라고.

이곳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양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몬스터에게 노출된다면 매우 위험했다.

즉, 일주일간 버티고 살아남는다는 하나의 선택지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소용없다. 저 친구는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설령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속박 마법을 풀지 못해. 꽤 강한 마력이 필요하거든.”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곧 해가 지면 사방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몬스터가 아니라도 위험한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지역이었으니까.

“하나 팁을 줄까? 나무를 빙빙 돌면서 노래를 부르면 속박 시간이 단축된다. 특히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면서 하면 더욱 효과가 좋지.”

“어서 노래! 노래를 불러!”

“이쪽 말고 반대쪽으로 돌아 이 새끼들아!”

“술만 처먹으면 노래 부르는 놈들이 왜 입을 다물고 있어? 빨리 불러 봐!”

도적들이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래도 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도는 방향을 정했고, 음정과 박자는 엉망이었지만 노래도 어떻게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적들은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괴상한 의식을 치렀다. 속박이 풀리기만을 바라면서.

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슬슬 가 볼까.”

그가 마차로 돌아왔다. 길을 막은 나무가 아직 그대로 누워 있었다.

준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드드드득!

거대한 나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안식을 취했다.

“정말 악취미라니까?”

루치아는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준은 마부에게 출발을 지시한 뒤 마차에 올랐다.

“트라우마를 이용해서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못 하게 한다. 뭐 이런 건가요? 저대로 두면 굶어 죽거나 몬스터들에게 물어뜯길 테니까.”

“뭐, 그냥 운에 맡기는 거지.”

덜컹거리며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준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살던 곳의 놀이와 비슷한 걸 시켰네요. 강강술래였나?”

“맞아요. 마스터 고향에서 유명한 민속놀이 중 하나죠!”

고향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스레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루치아와 릴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둘 다 아차 했다는 표정이다. 준에게 과거의 일, 특히 고향과 관련된 것은 아픈 상처였으니까.

“그랬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기도…….”

말을 흐린 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생을 시작하기 전까진 고독한 느낌이 들었었다. 만 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때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먼 옛날의 괴로웠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보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이 무한하지 않으니까.

“다음엔 다른 놀이를 준비해 봐야겠어. 앞으로도 적들은 계속 나타날 테니까.”

그가 웃음을 되찾자 루치아와 릴리도 다시금 해맑게 웃었다.

어느덧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그 넓은 하늘 위로 보름달이 뜨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도적들의 흥을 위해서.

그렇게 마차는 왕도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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