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여행을 떠나요 (2)
준비가 끝난 건 왕도행만이 아니었다.
어제 오랜만에 진료소로 찾아온 카이엔이 좋은 소식을 전했다. 바로 약초 재배용 던전 오픈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이었다.
던전 오픈이라고 하니 왠지 우스웠지만, 준은 나름 즐거웠다.
준은 거기에 기사단원들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 적당한 위치에 보물을 숨겨둬 모험심을 자극하게 했다.
약초도 캐고 경험도 쌓고. 말 그대로 일석이조의 던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마침 하룬은 진료소에 있었는지 바로 찾아왔다. 요즘은 기사단 본부에서 일하는 날이 많아 진료소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그만큼 기사단 내에서도 입지를 잘 굳히고 있다는 의미였다.
누아 마을이 부를 축적하는 만큼 기사단원의 수도 늘어갔다.
장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얼마 전 방문한 빈센트 공자가 말을 보고 놀란 건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준은 영지의 군사력에도 충분히 투자하고 있었다.
“방금 왕도에서 보고가 왔다. 폴링 행정관이 보낸 서신인데, 드디어 저택을 구했다고 하는구나.”
“오! 감축드립니다. 드디어 우리 가문에도 저택이 하나 생겼네요!”
“그래서 루치아 선생과 내일 바로 왕도로 떠날까 한다. 시종인 릴리도 함께.”
“내일 바로 말입니까?”
“왜. 뭐 문제라도?”
“아뇨. 뭔가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느낌이어서요.”
맞는 말이긴 했다. 준은 왕도행을 조용히 준비했다. 그가 왕도로 떠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까지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주군까지 왕도로 가시면 정말 영지가 텅 비겠군요. 바이런 단장님도 폴링 행정관님도 부재중이니 더욱 허전할 것 같아요.”
“데려가 달라는 말인가?”
“하하하! 그럴 리가요. 단장님도 안 계시는데 기사단의 2인자인 제가 자리를 비우면 되겠습니까?”
아직 기사단에 부단장 개념은 없지만, 확실히 하룬은 바이런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실력이 받쳐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 하며 팔짱을 낀 준이 말했다.
“아쉬워할 필요 없다. 엘누아르 기사단의 2인자에게 어울리는 과제를 하나 내주고 갈 생각이거든. 그래서 불렀다.”
“이 느낌은 뭐죠? 뭔가 불길한 기분이……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은 분위긴데. 번복해도 됩니까?”
“아니.”
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뒷산 금광 근처에 던전이 하나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던전이요?”
하룬은 깜짝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이미 마르다 마을에서 던전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경험했으니까. 당연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거 없다. 마르다 마을 던전은 좀 특별했으니까. 이번에 발견된 던전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던전이라고 하더군.”
“그럼 트랩 같은 게 없겠군요.”
“정보가 맞다면 없겠지.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단원들 중 적당히 인원을 추려서 던전을 탐험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자연 던전인 만큼 약초가 자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보이는 대로 충분히 채집해 와.”
그 말과 함께 약초 목록이 적힌 종이를 하룬에게 건넸다. 이름만 적혀 있고 생소한 것들이었다.
“처음 보는 약초들뿐이네요.”
“아그네스에게 도감이 있으니 확인해 봐. 자신 없으면 견습을 한 명 데리고 가도 되고.”
“그러는 게 좋겠네요. 약초를 캘 때도 신중해야 하니까. 기왕 탐험하는 거니 지도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약초가 자라는 곳이라면 표시해 두는 게 좋으니까요.”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
“맡겨 주십쇼!”
약초 목록을 바라보는 하룬의 눈에 열의가 불탔다. 간만에 자신의 공적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살상을 하지 않고도 말이다.
그때, 뭔가 떠올랐는지 하룬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정보는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카이엔.”
“카이엔 씨가요? 의외네요. 뭔가 음침해서 골방에 틀어박혀 책이나 볼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준은 그냥 웃어넘겼다.
* * *
다음 날.
준과 루치아, 그리고 릴리를 태울 마차가 진료소 앞에 도착했다. 일손이 바빠졌다. 왕도까지는 꽤 먼 길이라 보급에 시간이 걸렸다.
준은 한옆에 서서 사람들이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익숙한 중년이 불쑥 다가왔다. 볼카누스였다.
“왕도에 간다고?”
“그래.”
“의외로군. 이런 시골 마을에 평생 콕 박혀서 나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끔 바람 쐬면 좋잖아.”
“흥. 팔자 좋은 소리. 그런데 얼마나 있다 오냐?”
돌아오는 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가는 김에 루치아와 오랜만에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으니까.
“글쎄. 휴식 겸 가는 거라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 보고 싶을까 봐 걱정되나?”
“헛소리는. 크흠.”
“걱정하지 마. 방에 게이트를 깔아 놨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바로 올 수 있다. 마리에게 얘기해 놨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신호를 받을 수 있고.”
“그럼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군.”
“그래도 네가 나서 주면 아그네스가 좋아하지 않겠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볼카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간 귀찮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는 걸 준은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준은 잠시 모여든 인파를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이.
그런데 찾으려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카이엔은?”
“왜 그놈 소식을 나한테 물어? 재수 없게.”
“친하잖아.”
“친해? 허허허. 우리 선생께서 드디어 미치셨군.”
볼카누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지만, 준은 두 사람이 교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미쳤다니까 어쩔 수 없네. 카이엔이 던전 만들 때 네가 도와준 거 다 안다.”
“뭣?”
“던전에 자라고 있던 약초들 중 몇몇은 마족의 힘만으로는 뿌리내리게 할 수 없거든. 네가 힘을 보태 준 거지?”
“…….”
볼카누스는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나이 지긋이 먹은 드래곤이 저러고 있으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본체일 때보다 인간 모습을 할 때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흠흠…… 예전에 암영초를 재배할 때 썼던 방법을 좀 응용해 봤지. 뭐 꼭 놈을 도와주려던 건 아니고, 질 좋은 약초들이 나오면 진료소에도 도움이 되니까.”
“신기하지 않아? 신성력과 흑마력은 상반되는 힘인데, 너희들처럼 좋은 의도로 힘을 모으면 조화를 이루며 효과를 내는 거.”
“알게 뭐냐?”
“언젠가 들은 적이 있어. 천족과 마족이 원래는 한 뿌리였다는 걸.”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준도 볼카누스도 한동안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잠시 옛 추억에 빠져야 했다.
그때, 마차에서 준비가 다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준이 벽에서 등을 뗐다.
“아무튼 고맙다. 도와줘서.”
“흥. 징그러우니까 슬슬 꺼져라.”
“나 없는 동안 진료소를 잘 부탁한다.”
준은 볼카누스의 어깨를 두드리곤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루치아와 릴리도 탑승했다. 별다른 호위 없이 준을 태운 마차는 누아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왕도행이 시작됐다.
여정은 순탄했다.
준은 가는 길에 마르다 마을에 들러 치유사 알렌을 만났다. 고군분투 중이었지만 슬럼프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었다.
아그네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아그네스가 이상향을 추구하는 치유사라면, 알렌은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 치유사였다.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거의 없는 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알렌은 누아 마을 진료소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가 난다면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준은 언젠가 함께할 날이 올 거라고 다독인 뒤 마르다 마을을 떠났다.
이어 켈세타에 도착한 준은 성에 들르지 않고 파비안 남작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밀린 이야기를 반도 끝내지 못한 채 켈세타를 떠나야 했다.
마차가 켈세타에서 벗어나자마자 루치아가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드뇌르 백작이 꽤 화가 났겠는데요? 인사도 없이 파비안 남작님만 뵙고 왔으니.”
“자업자득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루치아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좀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고요. 당신을 여기에서 다시 만났을 때보다 표정이 다양해진 거 같아요. 짧은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요.”
“그래?”
준은 싱겁게 웃었다.
최근 많이 듣는 말이었다. 촌장 아론부터 시작해 바이런도 그랬고, 아그네스와 하룬도 가끔 하는 말이다.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마지막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너는?”
“글쎄요. 어떨 거 같아요?”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더군. 배불리 먹고 늦잠도 자고 아랫사람도 실컷 부려먹으면서.”
“곁가지가 의미가 있나요? 본질을 봐야죠. 난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떤 못된 남자가 애를 태우게 해서.”
루치아가 새침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정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답답한 곳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그만큼 준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때, 릴리가 끼어들었다.
“누군지 알 거 같네요. 그 못된 남자 때문에 제가 페어리 퀸이 되지 못했거든요!”
순간 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표정이 변하자, 릴리가 깜짝 놀랐다.
“마, 마스터도 참. 농담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요? 아마추어같이.”
“쉿.”
그제야 루치아도 뭔가 분위기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덜컹!
마차가 멈췄다.
준이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마침 마부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문 쪽으로 달려와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길이 막혀 있어요!”
“길이?”
마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거대한 나무가 길 쪽으로 누워 있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나무를 벤 것이 틀림없었다.
준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부를 마차에 오르게 했다.
“다들 안에서 기다려. 나오지 말고.”
“조심하라고 전해 줘요.”
“놈들이 누군 줄 알고?”
피식 웃은 준이 마차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무장을 한 남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어림잡아도 스물 이상.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그 유명한 강준 나으리 아니십니까? 금광 사업은 잘되고 계시죠? 허허허!”
선두에 선 대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누런 이가 지저분해 보였지만, 등에 걸린 거대한 배틀 엑스는 그가 보통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역시 금광을 노리는 놈들이군. 나를 납치해서 통째로 털어먹을 생각인가?’
준은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주변을 훑었다.
대장 옆에 로브를 두른 사내가 있었다. 마법사인 것 같았다. 준은 단번에 그 마법사의 경지를 파악했다. 제법 강한 축에 속했다.
반면, 마법사는 준의 경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꽤 치밀하게 준비했군. 우리가 가는 길을 미리 예측해 차단하고 마법사까지 준비하다니. 대단해.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짝짝짝!
준이 한가롭게 박수를 쳤다.
“이 새끼 뭐야? 돌았나?”
두목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는 호위가 한 명도 없었고, 이쪽은 무장한 남성만 스물이 넘었다. 그런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박수를 치다니.
호위가 한 명도 없는 게 좀 이상했지만 두목은 콧방귀를 뀌었다.
“꼴에 귀족이라고 폼을 잡는 거냐? 하! 우리 계획을 들으면 아마…….”
“계획? 그래. 맞아. 누구에게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지. 한 대 처맞기 전까진.”
순간 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