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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10화 (110/175)

110화 멀리서 온 손님 (2)

“여기가 누아인가?”

화려한 복장을 걸친 젊은 남자가 마차에 탄 채 밖을 응시했다. 산과 개울, 그리고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하아. 생각보다 나쁜 곳이군. 이렇게 낙후된 곳일 줄은 몰랐는데?”

“누아라는 마을이 있는 걸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습죠. 지도에서도 간혹 표기되지 않기도 하고. 근방에 마르다 마을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나이 많은 시종은 밖에서 누아 마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싹 말라 있고 광대가 튀어나와 있어 교활한 인상이었다.

때마침 농사철이라 멀리서 비료 냄새가 풍겼다. 창을 열고 밖을 살피던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끔찍하군. 그야말로 완벽한 시골이야.”

“완벽한 시골이라니! 유머가 철철 넘치시는군요! 과연 공자님이십니다. 후후후.”

“시답잖은 걸로 아부하지 마라. 얀. 나는 아버지와 다르니까.”

공자는 엄숙히 사내를 꾸짖었다. 시종 얀은 머리를 조아렸지만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공자가 물었다.

“그런데 대체 이런 곳에 어떻게 실력이 좋은 치유사가 있다는 거지? 역시 헛소문이 아닌가?”

“흐흐흐. 그럴 리가요. 누아 마을의 강준 치유사가 바스티엔 공자의 난치병을 해결했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말입죠.”

“그 정도야 얼마든지 부풀려질 수 있지. 왕도까지 입김이 닿았다면 많은 사람의 입을 거쳤을 터인데. 소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

이곳 누아까지 오는 데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리가 멀어서도 그렇지만, 실력 좋은 치유사가 누아 마을에 있다는 소문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명망 있는 치유사들은 왕도에 머문다. 아니면 근방의 대도시거나.

그래서 자연스레 준비 기간이 길어졌던 것이다.

만약 페르디낭 후작이 켈세타 성에서 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공자가 이곳까지 걸음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력 좋은 치유사를 찾고 있던 공자에게 페르디낭 후작이 정보를 줬다. 누아 마을에 바로 그 사람이 있다고.

“그래서 제가 조언 드리지 않았습니까? 고작 촌동네에 있는 치유사를 직접 찾으실 필요가 없다고요. 전령을 보내도 충분했을 텐데요. 흐흐흐.”

“페르디낭 각하도 왕도로 데려오지 못한 인물이다. 고작 전령을 보낸다고 꿈쩍할 것 같으냐?”

“그래도 공자님께서 왕도에서 하는 사업도 한두 개가 아닌데 한번 시도해 봄직도…….”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좋지.”

그때,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엘누아르의 기사와 병사들이 다가왔다. 마차가 통과하지 않고 입구에 서성이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룬이 지시했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왠지 귀족이 탄 마차 같으니까.”

“옛.”

오늘의 근무 책임자는 마침 하룬이었다.

켈세타에서의 경험이 하룬을 능숙하게 만들었다. 공자의 행색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하룬은 정중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실례합니다. 저는 엘누아르 가문의 기사 하룬이라고 합니다. 누아 마을에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공자는 대꾸 없이 위엄만 보였다. 대신 나선 것은 시종인 얀이었다.

“이분은 고귀하신 빈센트 공자님이시다. 가스톤 후작가의 대공자시지. 어서 예를 갖춰라!”

“…….”

하룬은 잠시 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았다.

딱 봐도 잘해야 마차나 끌 것 같은 자가 앞에서 설치는 꼴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검술만 무르익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성숙해졌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공자님. 다시 인사드립니다. 기사 하룬입니다.”

“끌끌끌. 시골 촌뜨기들이 공자님을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어폐지. 오늘을 이 마을의 기념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공자님은 가스톤 후작가를 이으실 분이니까!”

“시끄럽다. 얀.”

그제야 얀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마차에 앉아 있던 빈센트 공자는 하룬을 흘겨보았다.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로.

“이곳에 강준이라는 치유사가 있다고 들었다. 그를 만나러 왔다.”

“아, 남작님을 뵈러 오신 거군요.”

“남작이라니? 얼마 전에 준남작위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바로 남작으로 승작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엘누아르 가문을 세우셨지요. 이 근방은 모두 남작님께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그건 듣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그렇다고 귀담아들을 것은 없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문은, 당연히 쳐다볼 필요도 없는 한미한 가문일 테니까.

“흔한 일은 아닌데. 드뇌르 백작께서 성정이 어지간히 급하셨군.”

존대가 들어갔지만 드뇌르 백작을 깔보는 말이었다.

하룬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가스톤 후작가는 뭐 하는 집안이야? 후작이라면 높은 등급의 귀족이긴 한데. 싸가지가 아주 종놈이랑 쌍으로 그냥…….’

몇 번 봤었던 바스티엔 공자와는 전혀 달랐다. 바스티엔 공자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정중했다. 진짜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공자는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다.

속물 같은 귀족의 모습이라고 할까.

한때 바스티엔 공자를 밥맛이라고 헐뜯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공자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진료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택을 놔두고 왜 진료소로 가야 하지?”

“저희 주군께서는 진료소를 저택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모든 행정 업무도 그곳에서 보고 계시죠. 지금 오후 진료 시간이기도 하고요.”

“뭐라고?”

어이가 없던 것도 한순간, 빈센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진료소를 저택으로 사용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군. 그래도 남작이면 귀족이 아닌가? 이런 일은 또 처음 보는데. 저택이 없는 귀족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옆에 있던 시종 얀은 낄낄거리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하룬은 불쾌했지만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준을 찾아온 손님이었다. 정중히 모셔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곧 빈센트 공자의 허가가 떨어졌다.

“좋다. 그대가 안내하라.”

“알겠습니다.”

하룬이 초소 쪽으로 손짓하자 병사가 말을 끌고 달려왔다.

“음?”

빈센트 공자의 눈이 반짝였다.

잘 조련된 군마였다.

빈센트는 시선을 멀리 던졌다. 군마가 달려온 곳에 또 다른 군마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훌륭한 말이었다.

이런 가난한 기사단에 좋은 군마가 있다는 게 좀 이상했지만, 빈센트는 곧 창을 닫고 몸을 의자에 기댔다.

“출발하지.”

얀이 마부석에 앉아 말을 조련했다.

“자, 가자! 얘들아! 이럇!”

얀이 마차를 출발시켰고, 하룬은 선두에 선 채 빈센트 공자를 태운 마차를 진료소로 인도했다.

“저건 또 뭔 마차여?”

이렇게 호화로운 마차는 보기 드물었다. 사우던 가문에서 왕래하는 마차도 이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연 농부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어느 귀족이 또 시비를 걸러 온 건 아닌가 몰라.”

“조용할 날이 없구만. 사이먼 그 개자식이 쫓겨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피바람이 부는 거 아녀?”

논에서 일을 하던 마을 주민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들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해도, 많은 권력자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 * *

빈센트 공자의 마차가 진료소에 당도했다.

하룬이 수신호를 보냈다. 진료소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도열했다. 귀한 손님이 왔으니 예를 취하라는 제스처였다.

곧 빈센트 공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실제로 보니 체격이 상당히 좋고 다부진 느낌의 청년이었다. 허리에는 검이 걸려 있었고,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검술을 제대로 연마한 사람 같았다.

“호오. 건물이 꽤 큰데?”

“얼마 전에 신축한 건물입니다. 드뇌르 백작께서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환자들도 많아 보이고. 확실히 강준 남작의 실력이 대단한가 보군.”

“‘하늘이 내린 신의’라는 별칭을 갖고 계시기도 하지요.”

“유치해.”

빈센트 공자의 한마디에 하룬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우선 하룬은 손님들을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지금은 오후 진료 중이라 보고를 해야 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남작님께 알리겠습니다.”

“서둘러라. 바쁘신 분이니까.”

얀이 고압적으로 말했다. 하룬은 고개를 숙이며 문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자마자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뭔 쥐새끼 같은 놈이 저렇게 까불지? 아오! 나도 성질 다 죽었네. 콱 그냥 검집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겨야 시원할 거 같은데. 젠장.”

“무슨 일이야? 마차가 온 거 같은데.”

“진상 손님.”

“누구?”

아그네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로 돌아가는 길인 듯했다.

“아주 그냥 대애~단하신 공자님 한 분이 오셨다. 가스톤 후작가의 대공자라고 하던데. 주군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진료소로 모시고 왔지.”

“어쩌지? 지금 선생님 외출하셨는데. 내가 대진 보고 있거든.”

“뭐? 어디 멀리 가셨어?”

“그건 나도 모르지. 대진을 맡기신 걸 보니까 멀리 가신 거 같아.”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폴링 씨도 아침부터 자리를 비우셨으니 릴리 씨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하룬은 그 길로 집무실로 달려가 릴리를 만났다.

릴리는 당연히 준의 행선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 찾아간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그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낭패였다.

이 사실을 빈센트 공자에게 알리면 당장 준을 데려오라고 야단법석을 떨 텐데.

어쩔 수 없이 하룬은 다시 응접실로 달려가 사실을 고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지금 남작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리를 비워? 뭐 하고 있나? 당장 불러와야지! 공자님을 기다리게 할 셈이냐?”

“그게…… 어디로 가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기다리셔야 할 듯합니다.”

빈센트 공자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보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방 뛰기 시작한 것은 시종 얀이었다.

“이런 무능한 자들을 봤나! 어서 움직이라니까? 기사든 병사든 풀어서 당장 데려오라고!”

하룬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데려오라니?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주군을 무시하는 발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항의하려는 순간.

“말이 좀 거친데?”

하룬의 표정이 환해졌다. 준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왕진 가방을 한쪽으로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빈센트 공자는 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준의 관심은 빈센트 공자가 아니라 얀에게 가 있었다.

“나는 강준 남작이다. 엘누아르 가문의 가주이기도 하지. 좀 상스러운 표현을 쓰는 것 같던데, 그대의 작위는?”

“그, 그게…….”

“있을 리가 없겠지. 작위를 가진 자가 마차를 몰지는 않을 테니까. 끽해야 시종? 고작 시종인 자가 귀족을 데려오라는 표현을 쓰나? 그게 가스톤 후작가의 전통이라면 할 말은 없네만.”

“헉!”

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준에게 위협을 느껴서가 아니다. 강준은 자신에게 무어라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인 빈센트 공자를 나무라는 것이었으니까.

“흐음.”

빈센트 공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얀을 바라본 뒤 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시종이 초면에 폐를 끼쳤군요. 미안합니다. 강준 남작이라고요? 반갑군요.”

빈센트 공자가 앉아서 악수를 청했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준은 그의 악수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모 공자님.”

빈센트 공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편히 빈센트라고 불러 주시지요.”

“좋습니다. 빈센트 공자.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주변을 물리고 좀 조용히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만.”

“그럼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지요. 세 시간 정도면 될 겁니다.”

“남작님.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왕도에서 누아 마을까지 오는 여유 정도는 있으셨잖습니까? 좀 더 쓰셔도 될 거 같은데. 시녀에게 차를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따분하시면 마을을 한번 둘러보시는 것도 좋겠군요.”

그렇게 말을 매듭지은 준은 백의를 걸치고 자신의 진료실로 들어가 버렸다.

쾅!

이를 꽉 깨문 빈센트 공자는 팔걸이를 내리쳤다.

이런 굴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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