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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09화 (109/175)

109화 멀리서 온 손님 (1)

그가 나가고 나서야 잠자코 있던 릴리가 물었다.

“괜찮을까요?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를 아무렇지 않게 줘도요.”

엘누아르 가문의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진료 시간엔 폴링의 업무를 돕는다. 그래서 처음부터 준과 폴링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돌아선 준이 피식 웃었다.

“왜. 그가 들고 도망갈까 봐 걱정돼?”

“마스터는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탈이니까요.”

“내가 누아 마을에 온 이후로 사람을 믿어 낭패를 본 일이 있었던가?”

당연히 없었으니 릴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준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은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문의 일일 뿐이고, 담당자가 그 일을 처리하게 된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래도 알려지지 않은 가문에서 이렇게 큰 재물이 나왔다고 한다면 의심부터 하지 않을까요?”

“흐음.”

턱을 쓸어 만진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답지 않은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준도 생각 없이 큰 재물을 넘긴 게 아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자신에게는 별거 아닌 물건이지만, 그걸 받아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특별한 경험이 될 테니까.

준은 그 상황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행정관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겠지.”

“역시 잔인하시군요! 부하의 충성심도 시험하고, 능력도 시험하고.”

“기왕 잔인하다는 말을 들은 김에 좀 더 잔인해져 볼까?”

“히익! 살려 주세요!”

준이 씨익 웃자 릴리가 겁을 먹었다. 혹시라도 그가 화염계 중급 정령인 프레어라도 부른다면 낭패였다.

“어차피 분실해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닐 거다.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면 돼. 걱정할 시간에 팝콘이나 튀기고 있어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 길로, 준은 다시 진료실로 돌아갔다.

* * *

오전 진료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와 달리 오전 내내 수많은 환자들에 시달린 루치아는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아, 죽겠다.”

“많이 힘드시죠?”

루치아 담당 견습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힘들거나 배고플 땐 굉장히 예민해지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해야 했다.

“힘들고 말고를 떠나 죽을 거 같아 그냥.”

무서운 표현에 담당 견습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깨 좀 주물러 드릴까요?”

“괜찮아. 방해하지 말고 나가서 점심이나 먹어.”

“선생님은 안 드세요?”

루치아는 손을 홰홰 저으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담당 견습은 재빨리 진료실을 나갔다. 지금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견습은 나름의 재치를 발휘했다.

마침 진료를 마치고 나오던 준에게 이 상황을 귀띔한 것이다.

“잠 못 잤어?”

“글쎄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몸을 일으켜 홱 돌아본 루치아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준을 쳐다보았다. 눈 밑이 다소 퀭하고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다.

“요즘 환자들이 꽤 많아 보이던데. 힘든 모양이군.”

“그러게요. 누가 농땡이를 피우는 덕에 애꿎은 제가 고생이군요.”

“환자들의 선택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요즘은 광대가 된 기분이라고요. 세상에 오늘은 가벼운 감기로 켈세타에서 여기까지 온 환자도 있었다니까요?”

다소 날이 선 한마디가 날아왔지만, 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야 네가 미인이니까. 관심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

“반박할 수가 없군요.”

“휴가라도 줄까?”

“휴가받으면 뭐 해요. 갈 데도 없는데. 요즘은 너무 생각 없이 강림했던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어요. 아니, 후회는 아니고 그런 생각 정도.”

“그럴 수도 있지. 당연하다고 생각해.”

준은 의자를 끌어다 루치아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계속해서 미소를 잃지 않는 준의 모습을 보니, 그녀는 마음이 좀 풀렸다.

“아, 짜증 나.”

“뭐가?”

“웃고 있는 당신 얼굴을 보니 짜증을 내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서요. 수없이 긴 세월을 살았는데 감정만큼은 내 마음대로 안 되네요.”

“이젠 인간이 됐으니까 인간답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칭찬인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준비했던 것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조만간 같이 왕도로 가자. 아까 행정관에게 왕도에 아담한 저택을 하나 구입해 달라고 했어. 절차가 끝나면 바로 가도록 하자고.”

“정말요? 당신이?”

루치아는 굉장히 기뻐했다.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준에게 안길 듯한 기세로. 풀려있던 눈빛도 원래의 총기를 되찾았다.

“정말 진짜 왕도에 있는 저택을 구입하라고 시켰어요? 당신, 재물이나 부동산엔 전혀 관심이 없었잖아요.”

“왕도에 한두 번 갈 거 같지도 않고, 기왕 가는 김에 내 집이 하나 있으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숙소에서 손님을 맞을 수는 없으니까.”

“여기 진료소는 어쩌고요?”

“게이트를 설치하면 문제없지. 낮에는 진료를 하고, 밤에는 왕도의 생활을 즐기고. 물론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이 좀 있긴 하지만.”

루치아가 꼭 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생각만 해도 기쁜 모양이었다.

“아까 아그네스가 진찰을 하는 걸 보니 마음을 좀 놓을 수 있더군. 단기간에 많이 성장했어. 우리가 빠져 준다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잘 해낼 거야.”

“당신 제자니까 훌륭하게 크겠죠.”

“하하하하.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그럼요! 당신은 늘 한 템포 늦는 경향이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이렇게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고마워요.”

감격을 이기지 못한 루치아가 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키의 차이가 좀 있는 터라, 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포옹했다.

“어머, 피할 줄 알았는데 안 피하네요. 웬일?”

“뭐,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왠지 잡힌 물고기가 된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귀여운 감탄사가 들렸다.

“앗.”

마리였다.

두 사람은 재빨리 떨어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고, 마리도 문을 반쯤 닫고 밖으로 나갔지만 한 눈으로 안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피식 웃은 준이 손짓했다.

“그러지 말고 들어 와.”

“네.”

안으로 들어온 마리는 두 선생 앞에 섰다. 그리고 귀엽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루치아 선생님.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려야겠어요.”

“응? 무슨?”

“진료실은 신성한 공간이에요. 사적인 감정 표현은…… 자제해 주셨으면 해요.”

“뭐?”

루치아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마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평소 마리의 행실과 성격을 비추어봤을 때 엄청난 한마디였다.

다르게 해석하면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내 눈앞에서 선생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만약 사무장의 입장에서 준에게도 잔소리를 했다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적의 대상은 루치아뿐이었다.

놀란 것은 준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마리의 마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며 자신감이 붙긴 했지만, 이렇게 대담하게 한마디를 꺼낼 줄은 몰랐다.

“어…… 그게,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한담.”

루치아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오히려 미안해하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마리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생각 없이 말을 한 거 같아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냐. 그럴 수 있지. 네 말이 맞아! 진료실은 신성한 공간이니 사적인 표현은 자제해야지. 사무장님의 말씀이니 앞으로는 주의할게.”

“네?”

“앞으로 주의한다고. 그리고 사적인 감정 표현까지는 아니었어. 작은 선물을 받아서 고맙다는 의미로 한 거니까. 후훗.”

루치아는 오히려 마리의 어깨를 다독이는 여유까지 보였다.

분명 사과를 받아 냈지만, 마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역시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앞서 지적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루치아가 기지개를 켰다.

“읏차. 한창 떠들었더니 배가 고프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당신, 안 가요?”

“가야지. 마리는?”

“아, 저도요.”

마리는 얼떨결에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앞서 나란히 걷는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왠지 자신감이 점점 떨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마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그를 위해 해줄 일은 많았으니까.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은 마리는 슬그머니 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흐음.”

루치아와 마리에게 둘러싸인 준은 다소 불편한 식사를 해야 했다.

* * *

“약초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준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치유사가 되었지만, 진료소의 약재 관리는 아그네스가 책임지고 있었다.

“요즘 볼카누스가 딴짓을 하고 있나?”

“아뇨. 볼카누스 씨는 매일 약초를 캐다 주세요.”

“그런데?”

“평소에 자주 쓰이는 약초들은 충분히 있는데, 중증 질환이나 만성 질환에 쓰이는 귀한 약초들을 구하기 어려워서요. 뒷산에서는 자라지 않고 텃밭에서도 키울 수 없는 것들이 꽤 있어요.”

“그래?”

준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흑가시, 검은안개버섯 등 귀한 약재의 리스트가 추가되었다. 그 말은 곧, 보다 다양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예상했던 일이야. 병원이 커지고 환자가 많아지면 필연적으로 상급의 약재가 필요하기 마련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켈세타 성에서도 지원이 끊겨서 저희들이 자체적으로 약초를 구해야 해요.”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스트에 있는 약재들은 소량 처방되어 구하면 오래 쓸 수 있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던전이나 깊은 동굴에서만 자생하는 약재라는 것이다.

“어차피 자본은 충분하고, 마이더스 상단을 통해 수급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쪽에서도 정기적으로 납품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루트를 찾아야 해.”

“가능할까요? 도감을 보니까 던전이나 동굴 같은 곳에 소량 서식하는 거 같더라고요. 기사단에 탐사를 요청해 보는 건 어떨까요?”

“아니. 됐다.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이 리스트에 있는 약재만 구하면 되는 거지?”

“일단은요.”

준은 아그네스가 건넨 리스트를 왕진 가방에 넣고 가방을 들고 진료실을 나왔다. 아그네스가 뒤따라 나왔다.

“어디 가시게요?”

“약초 구하러.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 대진 좀 부탁한다. 예약 환자는 없으니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거야.”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준은 즉시 진료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뒷산 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평범한 동굴이 아니었다. 바로 던전으로 이어진 입구였다.

준은 이미 카이엔에게 약초 채집용 던전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진척 상황을 한번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꽤 신경 써서 만들었군.’

던전에 진입한 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게 공들여 만든 티가 났다. 아마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면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다.

스륵.

그때,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침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그 사내는 바로 카이엔이었다. 그는 볼카누스와의 일전 이후 더욱 여유와 평안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대가 여기까진 무슨 일로?”

“작업 잘되고 있나 확인해 보려고. 오늘 보고가 들어왔거든. 이곳에서 재배해야 하는 약초가 꽤 필요해서.”

“어떤 약초가 필요하지?”

준은 가방에서 리스트를 꺼내 카이엔에게 건넸다. 작은 광원을 일으켜 약초 목록을 살펴본 카이엔은 자신 있게 웃었다.

“이 정도는 이곳에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한번 둘러보겠나?”

준은 흔쾌히 그와 함께 던전을 살펴보았다. 과연 카이엔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정도로 내부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몬스터들은 어때? 배치가 되었나?”

“가볍게 고블린과 코볼트를 심었다. 지금은 2층까지만 만들어 뒀는데 계속 파 내려갈 생각이지. 인간들은 그런 걸 좋아한다지?”

“맞아. 층을 내려갈수록 점점 몬스터들이 강하게 만들면 될 거 같다. 보물 상자 같은 것도 놔두면 좋을 거 같고.”

“내용물은 그대가 제공해 주겠지?”

“물론.”

그렇게 준이 지하 던전을 둘러볼 무렵,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별도 없이 누아 마을에 고급스러운 마차가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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