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저택 그까짓 거 대충
두 초월자들의 일이 일단락된 후, 누아 마을 진료소의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루치아가 치유사로 부임하고, 또 아그네스가 초급 치유사 시험에 합격한 이후로 진료소의 일상이 조금씩 변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뭐요? 루치아 선생님께 진료를 보려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구요?”
여행자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견습 치유사 클로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먼저 오신 분들이 많아서요.”
“허, 선생님께 진료받으려고 멀리 켈세타에서 왔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급환이시면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잡아 드려도 괜찮을까요? 마침 강준 선생님 쪽에는 대기 환자가 없는데요.”
“강준 선생님이요?”
“저희 원장님이세요. 사우던 백작가 바스티엔 공자님의 불치병을 낫게 하신 명의시죠!”
그녀가 자신 있게 권유했지만, 접수대 앞에 선 젊은 남성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귀여운 표정까지 지어 보였는데.
시무룩한 기분을 이겨 내고 클로에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됐으니까 루치아 선생님 진료로 해 주세요. 그 먼 거리를 왔는데 다른 사람한테 진료를 받는 건 좀 그렇지.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고요?”
“어…… 두 시간 정도요.”
“기다리죠.”
“그럼 이것 좀 작성해 주시고, 저쪽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뭐 또 쓸 게 있어요? 그냥 진료만 받으면 되지. 정말 번거로운 진료소네.”
그럼 다른 데로 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클로에는 잘 참아냈다.
“자. 이쪽에 부탁드려요. 미리 진료를 준비하려고 하는 거니까 너무 노여워 마시고요.”
“줘 봐요.”
클로에는 문진표와 개인정보 기록 양식을 건넸다. 쓰는 족족 귀찮다며 투덜거렸지만 결국 다 쓰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와. 오늘도 전쟁이구나. 전쟁이야.”
한숨을 내쉰 클로에는 환자의 기록을 새 차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루치아의 평균 진료 시간을 계산해 보니 예약 리스트가 아슬아슬했다. 이대로 더 환자 접수를 받는다면 루치아의 점심시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안 돼! 그러다가 저번처럼 또 혼날지도 몰라!’
클로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성한 차트를 동료에게 넘겼다.
“오전 진료 마지막 환자예요.”
“또요? 선생님이 한소리 하실 거 같은데. 전에 식사 못 하셔서 난리 났던 거 몰라요?”
“알죠. 제가 당사자였는데. 잘 말씀 좀 드려 주세요. 부탁해요.”
루치아의 명성이 차츰 알려지면서 준에게 몰렸던 환자들 중 많은 수가 그녀 쪽으로 옮겨 갔다.
특히 남성 환자들의 비중이 높았는데, 왕국 최고의 미녀라는 소문까지 퍼진 터라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치유사를 선택할 권리는 환자에게 있었으니까.
“많이 바쁜가 봐요.”
그때, 접수 데스크로 아그네스가 들어왔다. 클로에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했다.
“선생님 오셨어요?”
“검사 끝나고 잠시 들렀어요. 참, 그렇게 불편하게 대하지 말라니까요?”
“그래도요. 선생님은 선생님이시고 전 견습인걸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같은 처지였는데.”
두 사람은 켈세타 성에서 처음 만났다. 준이 연회에 참여했던 바로 그때였다.
나이도 같고 성격도 비슷해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실습 기간 내내 두 사람은 어울렸고, 시골에서 온 아그네스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됐지만, 재회했을 때는 신분의 차이가 생기고야 말았다.
“오히려 제가 켈세타 성 진료소에서 실습을 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아래였지 않아요?”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래라뇨. 선생님! 누가 듣겠어요!”
“들으면 뭐 어때요? 우리 그때 친구 하기로 했었잖아요. 이렇게 존댓말하는 것도 어색한데.”
“진료소 안에서만큼은 참아 주세요. 마리 사무장님은 무척 무서운 분이라구요.”
“아, 그건 동감.”
의료진이 많아진 만큼 마리는 진료소의 규율을 엄하게 세웠다. 서로 웃고 떠들다 의료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파벌이 생길 수도 있고.
물론 개인적으로 부탁한다면 마리가 방침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서로의 직무는 지켜 주는 게 좋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아그네스는 주전자에 미리 우려 낸 차를 한 잔 가득 따르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 환자. 루치아 선생님 환자예요?”
“말도 마세요. 벌써 오전 진료 예약도 마감됐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몰리는지 모르겠네요.”
“어떤 환자인데요?”
아그네스가 차를 홀짝이며 질문했다.
접수를 한 환자들은 증상을 구두로 설명하거나 직접 기록하게 되어 있다. 클로에는 아까 받은 문진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감기라고 적으셨는데요?”
“그분 켈세타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요.”
“이야. 대단하네요. 감기 때문에 마차로 사흘은 걸리는 곳을 오다니. 오다가 다 낫겠다.”
“아무래도 루치아 선생님 얼굴을 보러 온 거 같아요. 어휴, 남자들이란 다 똑같다니까요? 이런 환자들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아그네스는 좋다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하지만 오래 노닥거릴 수는 없었다. 진료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먼저 가 볼게요. 이따 점심시간에 봐요.”
“힘내세요!”
싱긋 웃은 아그네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클로에는 그녀의 뒷모습을 동경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그네스가 준을 목표로 삼은 것처럼, 그녀도 누군가의 모델이 된 것이다.
물론 아그네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진료실엔 이미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잠깐 쉬고 오느라.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이구야! 우리 아가씨 아주 그냥 선생님이 다 됐네?”
“헤헤. 그래도 저희 선생님처럼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환자가 기록한 내용이 있지만, 아그네스는 다시 묻는다. 어디가 아프다는 말은 추상적이니까. 자연스레 질문을 하면서 단서를 찾는다.
“요즘 속이 좀 아파서. 답답하기도 하구. 체했나 몰라.”
“배 말고 가슴 쪽은 어떠세요?”
“거긴 거 같기도 하구 아닌 거 같기도 해.”
“좀 볼게요.”
아그네스는 준에게 선물 받은 청진기를 귀에 걸었다.
아직 완벽하게 진단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준에게 많이 배운 상태였다.
아그네스는 헤드에 마나를 주입했다. 보다 정밀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헤드를 가슴에 대자 두근거리는 박동이 들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잡음이 들리네.’
아그네스는 침착히 그 소리를 귀에 담았다. 그리고 준이 가르쳐 줬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잠시 후, 아그네스가 청진기를 거뒀다.
“요즘 숨이 차거나 어지럽지는 않으셨어요?”
“체하면 당연히 그러지. 배탈 아녀?”
“그게요. 잠시 시간 내셔서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가끔 체한 거랑 심장이 아픈 거랑 구별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큰 병원 안 가도 되나?”
“여기보다 더 좋은 병원이 있나요?”
분명 심장에 뭔가 이상이 있는 환자였지만, 아그네스는 오히려 그렇게 되묻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준이었다.
문 옆에서 진찰을 보조하던 견습이 준을 알아보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그네스 선생님을 불러드릴까요?”
“아니. 그냥 보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할 일 하세요.”
“네.”
준은 한동안 아그네스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환자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살폈다.
곧 미소를 지은 그가 진료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창고였다.
말이 창고지 이제는 엘누아르 가문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던 공간이었다. 출납해야 하는 물품들은 진료소 내에 있는 창고로 모두 옮겼다.
준이 다가오자 경비가 군례를 취한 뒤에 문을 열었다.
안에는 폴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좀 쉬엄쉬엄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아. 영주님. 안 그래도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요즘 실감하고 있습니다.”
폴링은 그 대답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철야를 했는지 턱에 다듬지 못한 수염이 나 있었다.
“그런데 진료가 벌써 끝나셨습니까? 제가 시간을 잘못 본 건지.”
“아닙니다. 아직 진료 중이지요. 점심시간이 되려면 좀 있어야 합니다. 환자가 없어서 잠시 나왔지요.”
“환자가 없다고요? 이제 슬슬 은퇴를 고민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폴링이 넉살 좋게 말했다.
사실 그도 준의 환자가 줄어든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준은 최근에 병세가 심한 중환자들만 보고 있었다. 두 여선생이 일선에서 활약해 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이 만들어졌다.
준은 웃으며 그 농담을 진담으로 받았다.
“아그네스가 제 몫 이상을 해내면 은퇴해야지요. 진료소도 물려주고.”
“그럼 가문은 어쩌시고요?”
“사업이야 행정관께서 알아서 잘해 주실 테니, 저는 마음 편히 여행이나 다녀 볼까 합니다. 넓은 바다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싶군요. 요즘은.”
“허…… 혹시 힘든 일이라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좀 여유가 없이 지낸 거 같아서 말입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죠.”
남작위도 받았고, 진료소도 증축했으며, 페르디낭 후작과 아레스 공작이 주목하고 있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만큼 준의 명성이 알려지고 있었고, 그에 비례해 일도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폴링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그래도 아직은 이곳에 계시니 보고를 드려야겠지요. 방금 켈세타에서 도착한 따끈따끈한 소식이 두 개 있습니다.”
“기대되는군요.”
“먼저 사이먼 경이 파면되어 평민 신분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입니다.”
파면?
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지하감옥행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처벌이 경미하군요.”
“글쎄요. 오히려 명예롭게 죽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같은 영지민을 해치려고 했다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 테니까요.”
“하긴.”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야밤을 틈타 다른 영지로 피신하거나 숨어들 것이 분명했다.
영주의 비밀 지령을 아니까 언제 자객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 있을 것이고.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준은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첫 물품이 출하됩니다. 규모는 금광석 50상자와 금괴 10상자입니다. 이를 호송하기 위해 마이더스 상단에서 대규모 용병단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켈세타까지는 그리 위험하지 않을 텐데요?”
“물건이 물건인 만큼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교역로도 없고 하니까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겁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송 중 분실이나 도난 사건이 벌어지면 책임을 분담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마이더스 상단에서도 제대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고 있을 순 없었다. 준은 폴링에게 당부했다.
“첫 거래인 만큼 우리 가문에서도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세요. 그래야 앞으로 편해질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준이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통째로 폴링에게 넘겼다.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에 폴링은 차마 주머니를 열지 못했다.
“이건 뭡니까?”
“그걸로 왕도에 저택을 하나 구입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담하지만 좋은 위치에 있는 저택을 골라 주세요.”
“왕도에 있는 저택을요?”
왕도에 있는 저택은 상당히 비싸다. 크기와 관계없이 입지 조건이 좋다면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런데 고작 이 가죽 주머니로 저택을 구입하라고?
폴링은 의아한 마음에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곧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주머니에 든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하나도 아니고 큼지막한 게 다섯 개나 들어 있었다.
“설마 이거 다이아몬드입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그걸로 부족합니까? 시세를 잘 몰라서.”
“그게…….”
폴링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살아서 이렇게 큰 재물을 만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뇨…… 아마 아닐 겁니다. 이게 정말 말씀하신 대로 진짜 다이아몬드라고 한다면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서둘러 주는 게 좋겠군요. 곧 왕도로 갈 거라서.”
“속히 알아보겠습니다.”
폴링은 그 길로 집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