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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07화 (107/175)

107화 야식의 힘

진료소로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스산했지만, 아그네스는 무섭지 않았다. 카이엔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마계의 대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혼절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나이 많은 신사 정도였다. 그 정도 정보가 서로의 관계에 더 좋다는 것을 카이엔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엔 씨.”

카이엔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걷기만 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이 갔기에.

하지만 아그네스는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용기를 냈다.

“볼카누스 씨와는 계속 싸워야 하는 건가요? 오늘은 대련이긴 했지만 이게 나중에는 결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고…….”

“두려운가?”

“두렵다기보다는 걱정이죠. 싸운다는 건 적어도 어느 한쪽이 다친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단순히 환자가 걱정되어서?”

잠시 고민하던 아그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카이엔 씨나 볼카누스 씨 모두 뭔가 특별한 게 느껴져요. 저 혼자만의 느낌이지만.”

“치유사라면 모든 환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 게 아닌가?”

“원칙은 그렇지만 저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어쩔 수 없더라고요.”

아그네스가 멋쩍게 웃었다.

카이엔은 실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간의 이렇게 순박한 미소는 처음 목격했다. 그래서 신선했다. 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두 분. 화해하실 순 없는 건가요?”

“불가하다.”

카이엔은 조금의 여운도 두지 않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볼카누스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고, 그가 나타났을 때도 목숨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준의 부탁으로 던전을 만들고 암영초를 재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때 그와 반강제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초월자인 그도 알고 보면 평범한 존재라고. 단순하고 무식하고 화를 자주 내지만 딸 바보에 가족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사내라고.

그런 그가 방금 전 있었던 결투에서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적의가 사라졌다.

마계가 사라진 탓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은 탓인가?

볼카누스와 적이 아닌 친구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준 선생님께 대강 듣긴 했는데 두 분은 정말 쌓인 게 많으신가 봐요.”

“으음.”

아그네스의 한마디가 카이엔을 상념에서 건져 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무기를 겨눠왔지. 단순히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의 차이로 싸우는 게 아니다. 운명이라고 할까.”

“운명이요?”

“그래. 그 단어 외에는 나와 그를 규정할 수 있는 말은 없구나.”

운명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었다.

아그네스는 아쉬웠다.

자신의 스승처럼 무언가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능력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주먹을 꼭 쥐며 다짐할 수 있었다.

“앞으로 두 분이 종종 싸울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어떻게든 말려 보겠어요!”

“후후후. 무슨 재주로?”

카이엔은 농담 삼아 물었다. 용족과 마족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이야기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아그네스는 진지했다.

“준 선생님이 치유사의 본분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오늘 이렇게 싸우고 다치신 걸 보니, 두 분께서 겪고 계신 갈등도 제가 치료해 보고 싶어졌어요.”

잠시 생각에 잠긴 카이엔이 한마디 내뱉었다.

“괴짜 선생을 스승으로 두었군.”

이번에는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아그네스가 말을 받았다.

“요즘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그래도 있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년 이맘때쯤의 저는 그저 약초나 캐고 다니던 아이였거든요. 이렇게 흰 가운을 입게 해 주신 분의 말씀이니까, 저는 믿을 거예요. 믿는 것 자체로도 기적이 생긴다고 하셨으니까.”

“그것도 그대의 선생이 한 말인가?”

“그럼요.”

“믿는 것 자체로도 기적이 생긴다라…….”

늘 차갑기만 하던 카이엔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미소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한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진료소에 도착했다.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선생님도, 볼카누스 씨도 좀 늦으시려는 모양인데.”

“내가 알아서 하지. 신경 쓰지 마라.”

“알겠어요. 아 참, 카이엔 씨. 이거 오늘 선생님께서 전해 주셨는데. 감사해요. 소중히 사용할게요.”

아그네스가 오른쪽 손목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어제 준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넘겼던 마룡의 팔찌였다.

“잘 어울리는구나.”

“완전 마음에 쏙 드는 거 있죠? 나중에 제가 유명한 치유사가 되어 왕도로 가게 돼도 카이엔 씨는 공짜로 치료해 드릴게요!”

카이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네스가 반쯤 농담 삼아 했던 이야기였지만 카이엔은 왠지 그럴 날이 머지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아그네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그네스는 미리 재료를 준비해야 했다. 혼자서 하기 벅차 결국 마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는 사이 준이 진료소에 도착했다.

“볼카누스 씨는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은데? 사소한 사고가 하나 터져서.”

아그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요리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해서, 일단 급한 대로 드실 만한 거 몇 가지 만들어서 갈게요.”

“카이엔은?”

“응접실에 계세요.”

“그냥 구관에서 다 같이 먹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옛 추억도 살릴 겸.”

“아, 그것도 좋겠네요! 그럼 준비할게요. 가자. 마리.”

두 소녀가 구관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의 옆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주인공은 볼카누스였다.

준이 농담조로 툭 던졌다.

“몸은 잘 씻었나?”

“젠장! 뭘로 만들었는지 잘 씻기지도 않더군. 복수하고 말 테다!”

“하하하. 어떤 식으로 복수할지 정말 기대되는데? 그런데 들어가 있지 않고 왜 왔어? 카이엔과 둘이 앉아 있기 뻘쭘한가?”

“저 아이, 어느 정도로 성장한 거지?”

볼카누스가 손가락으로 두 소녀를 가리켰다. 평소 관심사라면 당연히 그 대상이 아그네스였겠지만, 지금 묻는 것은 마리였다.

그는 자신의 힘이 저 연약한 소녀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는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겪었지만, 볼카누스는 그에 대해 미안한 감정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자신도 부상을 당해 다른 차원으로 떨어지며 우연히 발생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자신의 힘을 이어받은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글쎄. 거의 상급 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왕국에서 마리의 마력을 따라올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문제가 된다면 경험이겠지.”

“왕국에 출사하려는 의지는?”

“아직은 전혀 없어 보이더군. 한미한 엘누아르 가문의 가신으로도 아주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야.”

볼카누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뭐?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면 마탑과 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테고, 못해도 궁정마법사 자리까지 넘볼 수 있을 텐데? 이해할 수가 없다.”

“누구처럼 공명심이 흘러넘치는 건 아니라서.”

그렇게 대꾸하며 준은 볼카누스를 은근히 노려보았다. 이제 적당히 말썽을 부리라는 신호였다.

“저 아이는 평생 고통스럽게 자라 왔다. 다른 친구들처럼 마음껏 뛰어놀거나 멀리 가지도 못했겠지. 오히려 그래서 자신이 가진 힘을 더 신중하게 쓰려는 것 같아. 많은 걸 배우고 싶어 하지만 그만큼의 책임감도 느끼고 있어. 기특하지.”

“당연한 말을! 누구 힘을 이어받았는데?”

“몇 번을 말하냐. 마력의 수준이 인성을 결정하는 건 아니라고.”

“으음.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딱히 널 지목한 말은 아닌데. 아무튼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 건 나야. 잊지 말도록.”

괜한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충고기도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터라 볼카누스는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신관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선 카이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엔을 보자마자 볼카누스가 흥분하며 나섰다.

“이 망할 자식! 감히 먹물로 나를 농락해?”

“본인의 전투 감각이 죽은 걸 남의 탓으로 돌리다니. 역시 어리석은 종족이야.”

“속게 만든 놈들이 더 나쁜 거다!”

“세상 참 편하게 사는 것 같아 부럽군.”

“뭐라?”

슬슬 카이엔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었다. 카이엔은 다리를 꼬며 삐딱하게 앉아 미소를 지었다.

“괜한 말로 포장하지 말게. 그대가 나보다 약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니까.”

“누가 인정한다고 그래?”

이러다가 또다시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한편 흥미진진한 눈으로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릴리였다. 준은 손짓해 그녀를 불렀다.

“설마 이 중요한 시점에 심부름을 시키시려는 건 아니죠? 아아~ 이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데.”

“가서 마실 차 좀 준비해 와라. 아그네스가 만든 차에 적솔잎 두 장을 섞어. 그중 하나엔 찔레가시 세 스푼을 추가하고.”

“찔레가시를요? 그거 속효성 안정제 아녜요? 예전에 파비안 남작님도 드신 적이 있던 그거.”

“맞아.”

“안 되는데. 볼카누스 씨가 안정을 되찾으면 안 된다구!”

“드래곤이라 쉽지 않겠지만 해 볼 가치는 있지.”

“칫.”

릴리가 두 볼을 부풀렸다.

앙증맞고 귀여웠지만, 감히 일개 시종이 주인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준이 손짓으로 채근하자 그제야 밖으로 나갔다.

그때 루치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뭔가 시끌벅적해서 손님이 오셨나 했더니 다들 모여 계셨네요.”

“마침 잘 왔소!”

“제가 필요한 일이라도 있었나 보죠?”

볼카누스는 카이엔을 삿대질하며 누가 더 강하냐고 질문했다. 지금은 인간이지만 전직 천사였으니 자신의 편을 들 거라 판단한 것이다.

생각 외로 루치아는 간단히 답을 내렸다.

“그야 당연히 카이엔 씨가 더 강하죠.”

“뭣!”

루치아는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힘이 비슷하면 결국 머리싸움 아니겠어요? 역시 그 부분이라고 한다면 카이엔 씨가 한 수 위죠.”

“같은 편도 그렇게 판단했으니 굳이 다른 사람에게 질문할 필요는 없겠군.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게나. 친구.”

“이럴 수가…….”

볼카누스는 힘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침 그때 릴리가 찔레가시를 추가한 차를 내왔다.

차를 마신 볼카누스는 다행히 약효가 들었는지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론 매서운 눈으로 카이엔을 노려보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지만.

곧 간단한 안주가 준비되었고, 릴리가 좋은 술을 꺼내 왔다.

아그네스와 마리가 본식 준비를 할 사이 넷은 가볍게 술을 마셨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루치아가 대화를 주도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이렇게 다들 자리에 모여 앉아 느긋하게 술 마시는 거요.”

“그렇지. 그만큼 세상이 평화로워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마지막 생에 어울리는 세상이었다. 준은 더 이상 프라가라흐를 소환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랐다.

루치아는 계속 신이 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리 넷이 원정대를 꾸리면 왕국, 아니 왕국이 뭐야? 대륙 정벌도 꿈은 아니겠는데요?”

“흥! 대륙 정벌? 그런 시시한 놀이에 내 힘을 빌려줄 것 같나?”

“하긴. 볼카누스 씨가 본래 모습으로 날갯짓 한 번만 해도 인간들은 알아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겠군요.”

“그럼, 그럼! 이 위대하신 몸에게 공물과 젊은 처녀들을 바치겠지. 후후후.”

“그만들 해. 밖에서 듣겠다.”

준이 잔소리하기가 무섭게 야식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넷은 자리를 옮겨 새벽까지 웃고 떠들었다.

볼카누스와 카이엔 사이에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그 농도가 훨씬 옅어진 것을 느낀 준은 기꺼이 세 사람과 어울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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