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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06화 (106/175)

106화 죽음의 정수

사실 볼카누스는 싸울 생각이 별로 없었다. 처음엔 그저 위협만 하려고 했었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뛰어들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카이엔은 보통 마족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상대였다.

하지만 말을 섞다 보니 전투 본능이 들끓었다.

게다가.

“그 정도로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날개 달린 조류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군.”

“파충류도 아닌 조류?”

“그게 그거 아닌가. 지능이 떨어지는 거로는.”

카이엔의 격장지계는 정확히 볼카누스에게 먹혀들고 있었다. 그는 말을 쉬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텐가? 그렇게 브레스가 느려 터져서 싸울 수나 있겠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등장만 요란스러웠군.”

“이노옴!”

결국 브레스를 모으는 시늉을 하던 볼카누스는 진짜 브레스를 뿜어내고야 말았다.

쿠와아아아아!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엄청난 열기!

그뿐이 아니었다.

브레스가 만들어 낸 기파가 퍼져 나가며 사방을 뒤흔들었다.

쿠구구구구!

지금은 볼카누스가 인간형을 하고 있어 본체일 때보다 그 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시공간에 영향을 줄 정도의 파괴력을 갖춘 브레스였다.

그러나 카이엔은 여유로웠다.

“후후. 이쯤이야.”

날아오는 브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으로 휙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일직선으로 뿜어지던 브레스가 바람에 방향을 바꾸듯 천장 쪽으로 비껴간 것이다.

볼카누스가 쏜 브레스가 그곳을 강타했다.

꽈아아앙!

그가 직접 만든 공간이라 피해를 흡수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자연 지물이었다면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굉음과 함께 레어에 지진이 일었다. 돌과 바위가 정신없이 날아다녔지만, 두 존재는 서로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볼카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망난 마족 주제에 제법인데? 바람을 일으켜 브레스의 방향을 바꾸다니. 힘을 모두 되찾은 건가?”

“아마 그게 너의 첫 번째 패착이 되겠지. 적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다니. 역사에 길이 남을 어리석은 일이야.”

“어리석은 게 아니다. 일대일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으니까!”

“그런 자만심이 패배를 부르는 법이라네.”

씨익 웃은 카이엔이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는 전투를 이어 가지 않았다. 잠시 소강상태에 진입했다. 옷깃을 바로잡는 여유를 보인 카이엔이 대화를 시도했다.

“가족은 무사한가?”

“흥! 내가 왜 네놈에게 대답을 해 줘야 하지?”

“상황에 따라 아주 중요한 대답이 될 수도 있다네. 친구.”

카이엔의 의미심장한 말에 볼카누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확실히 그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꺼낸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카이엔은 예전부터 가족의 생사에 관심이 많았다.

암영초를 재배할 때도 그랬다.

내기에서 승리한 카이엔은 자신에게 고향에 다녀오라고 말했다. 가서 가족을 만나고 오라고.

죽기 전에 가족들을 만나고 오는 게 좋지 않겠냐고 도발한 것이었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지금 이 질문도 그것의 연장 선상처럼 느껴졌다.

“으음.”

한참을 고민하던 볼카누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가족들은 무사하다. 딸애까지 모두. 가벼운 부상을 입었지만 다들 살아있었지. 동족들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그렇군.”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냐?”

“이 싸움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뭐라고?”

“후후후후!”

순간 카이엔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의 흑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난폭한 태도로 한마디 했다.

“신마전쟁 때처럼 소리소문없이 다른 차원으로 추방시켜 주겠다. 물론 그때와는 다르게 육신은 싸늘하게 식어 있겠지만!”

“내가 할 소리를 대신해 줘서 고맙군!”

파지직!

두 존재가 일시에 기운을 쏟아 냈다.

그들이 서 있는 넓은 공간 사이에서 스파크가 번쩍이며 에너지가 충돌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충돌이 아니었다.

마치 수백의 마법사들이 서로에게 마법을 난사하는 것 같은 충돌과 폭발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초월자이기 때문에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서로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핏!

볼카누스의 뺨에 선이 그어지며 피가 튀었다.

“큭! 이 새끼가!”

팟!

이번엔 카이엔의 이마에 핏줄이 그어졌다.

“호오. 제법인데?”

두 존재는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서로를 난도질했다.

대부분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가끔 들어온 공격이 상대에게 부상을 입혔다.

한 번 주면 한 번 받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바로 그때.

콰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균형이 무너졌다.

“어억!”

순간의 방심으로 강력한 공격을 허용한 볼카누스가 벽 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크윽…… 무슨 개소리야?”

“네 머릿속엔 가족과 일족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할 거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고향으로 가게 한 거라네. 지켜야 할 게 있는 자는 약할 수밖에 없거든. 그게 그대의 두 번째 패착이다.”

꽈아앙!

“컥!”

이번엔 카이엔이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이 붕 날아 뒤쪽 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엄청난 힘에 휘말린 만큼 상당한 고통이 뒤따랐다. 피가 입에서 한 움큼 쏟아졌다.

성공적으로 반격한 볼카누스는 흙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미친 새끼. 똥폼은. 지껄일 시간에 공격을 한 번 더 하든가 해야지. 인생은 실전이야 새끼야. 이론이 아니라고.”

“후후후.”

카이엔도 먼지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았다.

“이제 진지하게 싸워 보세나.”

카이엔의 눈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흑마력을 일으켰다.

쉬이익!

손바닥에 시커먼 마력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순수한 죽음의 에너지였다.

크기는 작지만 엄청난 에너지였다. 만약 이곳에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형체도 없이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담은 구체였다.

이름하여 ‘죽음의 정수’.

그것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볼카누스의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걸 여기에 떨어트릴 생각이냐?”

“안 되는 이유라도?”

“머저리 같은 놈! 레어가 부서지면 밖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냐? 인간들의 마을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언제부터 그대가 인간에 대한 연민을 그렇게 품고 있었지?”

명백한 조롱이었다. 카이엔은 마치 어린아이를 놀리듯 빙긋 웃었다. 볼카누스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고! 시펄! 그때 너를 죽여 버렸어야 했어.”

볼카누스가 다시 브레스를 준비했다.

죽음의 정수를 막기 위해서는 브레스로 중화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도 모든 힘을 쥐어짜 냈다.

휘이이잉!

마나의 폭풍이 몰아쳤다.

죽음의 정수는 이미 카이엔의 손을 떠나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떨어지는 순간 이 레어는 소멸한다. 어쩌면 누아 마을까지도.

운이 나쁘면 대륙이 박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돌팔이! 보고 있나? 다 네놈 때문이다! 네가 알량한 자비심을 베푼 결과라고오!”

“그래. 잘 보고 있으니까 소리는 지르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엉?”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안식처에 정적이 흘렀다.

깜짝 놀란 볼카누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것은 카이엔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준이었다.

게다가 그의 옆엔 아그네스가 있었다. 준의 팔을 붙든 채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와…… 이런 게 마법 대련인가요? 처음 봐요. 검술 대련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굉장히 무서워요.”

“마법 대련?”

볼카누스가 준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것은 카이엔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쉰 준은 두 초월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 너희들의 대화는 차단했다. 생각보다 말들이 많더군. 아무튼 여기에 오기 전에 너희들이 마법 대련을 한다고 설명해 놨어. 긴말 안 할 테니 알아서 행동해라. 아, 그리고 볼카누스 네가 돌팔이라고 한 말은 차단하지 않았다. 참고해.

― 이놈아! 할 거면 제대로 다 하지! 내 체면이 뭐가 되느냐!

― 뭐 어때? 돌팔이라고 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나?

― 글쎄.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준은 그저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다시 싸울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아그네스 덕분이었다.

그녀는 두 초월자에게 큰 영향을 준 인간이었다. 자신들의 정체를 끝까지 숨길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위해를 끼칠 리는 없었다.

물론 그런 기색을 보인다면 직접 나서겠지만.

“그런데 볼카누스 씨. 마을엔 언제 오셨어요? 진료소에 먼저 들르시지 그러셨어요. 연락도 없이 떠나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하하하하. 미안하구나. 일이 좀 바빠서 말이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다. 카이엔의 도발에 말려 포탈을 열고 차원 이동을 해 버렸으니까.

“일은 잘 마치고 오신 거예요?”

“그럼. 아주 잘 풀렸지.”

“볼카누스 씨가 없으니 왠지 진료소가 허전하더라구요.”

아그네스가 진심을 담아 생긋 웃었다. 그 순수한 미소에 볼카누스도 절로 아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예전처럼 약초를 캐다 주실 수 있죠?”

“아, 뭐…… 그렇지.”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그 와중에 실리를 챙기는 아그네스였다. 볼카누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왕진 가방을 들고 아그네스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뭐 문제라도 있으셔요?”

“아니, 문제는 무슨. 하하하! 약초 열심히 캐다 주마!”

“감사해요. 그런데 오늘이 두 분께 중요한 날이라면서요? 준 선생님이 알려 주셨는데, 대련하느라 크게 다치실 수도 있다고 해서 달려왔어요. 앗. 벌써 다치셨네요.”

“뭐 이 정도야 으레 있는 일이지. 괜찮다.”

“안 괜찮아 보여요.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제가 좀 봐 드릴게요.”

아그네스는 응급처치 키트를 열고 약품을 볼카누스의 얼굴과 팔에 발랐다. 그리고 마나를 일으켰다.

우웅!

새하얀 치유 마법이 스며드는 것을 본 볼카누스가 깜짝 놀랐다.

“너,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게냐?”

멋쩍게 웃은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볼카누스는 마치 자신의 딸의 일인 양 기뻐했다.

“오! 정말 잘됐구나. 이제 저 못된 돌팔이 밑에서 착취당하지 않아도 되겠어. 네 이름을 딴 멋진 진료소를 만들고 독립하거라. 내가 후원하지!”

“아직 선생님 밑에서 배워야 할 게 많아요. 뭔가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도 들고요.”

“그새 세뇌를 당한 게냐?”

“아녜요. 치유 마법도 공부해야 할 게 많더라고요. 루치아 선생님께도 신세를 지고 있어요. 자, 이젠 카이엔 씨. 잠깐 상처 좀 볼게요!”

이번엔 카이엔의 상처를 돌봐주었다. 똑같이 약재를 뿌리고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카이엔은 묵묵히 아그네스에게 치료를 받았다.

잠시 후 모든 치료가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요. 그런데 두 분. 계속 대련을 하실 건가요?”

“대련? 으흠…….”

두 초월자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그네스가 나타난 이후로 분위기가 오히려 훈훈해졌다. 싸울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그때, 아그네스가 손뼉을 치며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진료소로 가서 야식이라도 드시는 게 어때요? 볼카누스 씨가 돌아오신 기념으로. 술도 곁들이면 좋구요. 제가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볼게요.”

“오, 그거 좋지! 실은 전에 먹은 족발이 늘 생각났단다.”

“재료 있으니 해 드릴게요. 카이엔 씨는요? 같이 가요. 네?”

“좋다.”

의외로 쉽게 카이엔이 승낙했다. 카이엔은 아그네스를 에스코트하며 먼저 레어를 나섰다.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 볼카누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 진짜 큰일 치르는 줄 알았네. 후우.”

“그러게 왜 오자마자 싸우고 그래?”

“시비 터는데, 그럼 그냥 가만히 있냐? 왠지 놈에게 낚인 것 같단 말이지.”

“낚여?”

“진심으로 싸우는 것 같지가 않았다. 뭐, 결국은 놈이 죽음의 정수를 소환하긴 했지만…… 잠깐, 죽음의 정수?”

화들짝 놀란 볼카누스가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그곳엔 죽음의 정수가 둥둥 떠 있었다.

“미친 새끼! 저 위험한 걸 그냥 놔두고 갔단 말이야?”

“전쟁에서 부상 당한 이후로 감이 죽은 것 같군. 진지하게 조언하는데 너 은퇴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낚이기만 해서야 쓰나.”

한숨을 내쉰 준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순간 죽음의 정수가 움직였다.

“으아아악!”

빠른 속도로 날아온 정수가 볼카누스를 덮쳤다. 미처 피할 새가 없었다.

철푸덕!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터지긴 했는데, 어딘가 텁텁한 액체가 온몸을 적셨다.

“뭐지?”

“뭐긴 뭐야. 먹물이지. 씻고 와라. 보기 흉하다.”

준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볼카누스는 시커멓게 물든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진노한 그의 비명이 레어를 울린 것은 한참 뒤였다.

“이 패잔병 새끼야아아아아!”

물론, 이미 레어를 떠난 세 사람은 그 외침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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