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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05화 (105/175)

105화 증명의 시간 (2)

“왔어?”

그는 건강해 보였다. 최근 근육이 조금 붙었는지, 검은색 예복이 빈틈없이 잘 어울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잠시 호수에 버려 뒀던 장신구를 되찾아 와서 그런지 온몸에 귀족다운 기품이 철철 넘쳤다.

준은 일어나 그를 맞았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요즘 소식이 통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다.”

“보다시피.”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는데?”

꼼꼼하게 살피지 않아도 준은 카이엔이 제법 달라졌음을 느꼈다.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늘어난 흑마력만큼 어투 또한 당당했다.

카이엔은 흑마력을 완벽히 감추고 있었지만, 준은 그 마력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당한 흑마력이야. 회복이 벌써 끝난 건가?’

처음 누아 진료소에 찾아와 치료를 받겠다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이제 그는 마계 대공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흑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이엔은 흑마력을 한 줌도 흘리지 않았다.

그만큼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끄덕인 준은 견습 치유사를 밖으로 내보냈다. 오늘 그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 치료 때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한 번쯤은 진료소에 놀러 올 줄 알았는데 그림자도 안 비추더군.”

“인간들 사이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렇지. 하지만 진료소는 다르다. 아픈 사람이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걱정을 할 수밖에. 아그네스가 왕진을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 많이 했어.”

“으음. 그 아이는?”

“소식 못 들었나? 얼마 전에 초급 치유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정식으로 치유사가 됐지. 선생 소리 들으면서 진료를 하고 있어.”

“잘됐군.”

본래 인간들에게 흥미가 없는 그였지만, 아그네스에게는 좀 달랐다. 볼카누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 자체가 매우 다정하며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시커먼 팔찌를 하나 꺼내 준에게 던졌다.

“뜻밖의 선물이네? 팔찌에 흥미는 없지만 잘 쓰마.”

“네 것이 아니다. 아그네스에게 전해 줘라. 약소하지만 합격 축하 선물 정도로 해 두지.”

“마력과 항마력을 올려주는 성물이 약소한 선물이라니. 역시 마계 대공은 통이 크단 말이야. 하하하.”

그것은 마룡의 비늘로 만든 팔찌였다.

흔히 볼 수 없는 성물인 만큼 효과가 대단했다. 만약 이 아이템을 아그네스가 착용한다면 중급 치유사 수준의 마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흑마력이 남아 있으니 정화시켜 주는 거 잊지 말고.”

“그거야 기본이지.”

준은 마룡의 팔찌를 품으로 갈무리하며 팔찌에 깃든 흑마력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제 아그네스가 안전하게 착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멀었나?”

“아아. 그간 힘을 되찾는 데 집중했다. 매일매일 레어에서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 약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져서 말이야.”

“나름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군. 힘은 완전히 회복한 건가?”

“아마도.”

“한번 확인해 보지.”

준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카이엔이 순순히 팔을 건넸다. 준은 능숙하게 혈도를 짚었고, 천천히 마나를 흘려 카이엔의 내부를 살폈다.

다른 때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완치 판정을 위해선 보다 신중히 진찰할 필요가 있었다.

곧 결과가 나왔다.

“축하한다. 완치됐군. 이제 활동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거다.”

“고맙다.”

“마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건 언제나 신선하단 말이지. 누아 마을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글쎄.”

카이엔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에서 준을 다시 만나 부상을 완전히 치료했지만, 볼카누스를 만나고 말았으니까.

“레어엔 별일 없나?”

“매번 소리나 꽥꽥 지르는 자가 사라졌으니 지루할 정도로 조용하지. 그래도 우리 마족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그가 올 때까지는 잘 관리할 생각이야.”

“디데이는?”

“내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존재가 누아 진료소에서 우연히 다시 맞닥뜨렸을 때, 20주 후에 승부를 가리기로 약속했었다. 그때 약속한 기한이 바로 내일이었다.

용족의 로드인 볼카누스가 약속을 어기진 않을 것이다. 내일이면 분명 차원을 헤치고 날아올 것이고, 두 존재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많이 아쉬웠다.

카이엔도 그랬지만 볼카누스의 몸도 정상으로 만드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다. 두 존재가 다시 맞붙는다면 둘 중 하나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넝마가 될 게 분명하고.

“그래서 미리 몸 상태를 살핀 거로군.”

“내 몸의 상태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완치됐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 그냥 인사나 할 겸 와 봤다. 어쨌든 그대는 내 은인이니까.”

“은인이라.”

쉽게 들을 수 없는 한마디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도 많은데 하물며 마족에게서는 더더욱.

“보통 은인에게는 소원 하나씩 들어주지 않나?”

“놀라운데? 전직 절대자에게 남은 소원이 있다니.”

“전직 절대자니까 그런 거지. 그냥 절대자였으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겠지.”

“말해 봐라.”

“볼카누스와 결투하는 거, 그만둘 수 없나?”

순간 카이엔의 두 눈에서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것을 느낀 루치아가 옆 진료실에서 달려왔지만, 준이 손짓하자 조용히 물러났다. 뒤이어 마리도 뛰어왔지만 준이 물러가라 말했다.

두 눈을 부릅뜬 카이엔이 정중히 따지듯 말했다.

“지금 나에게 항복하라는 말인가?”

“항복이 아니라 화해하라는 거야.”

“그럴듯한 포장이군.”

그제야 화가 조금 누그러졌는지 카이엔이 죽음의 기운을 거뒀다. 진료실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준이 말을 받았다.

“전쟁은 끝났어.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지. 지금 서로를 해친다고 해서 남는 게 무엇이지? 너는 고향을 잃어서 갈 곳이 없다 쳐도, 그에겐 남은 가족이 있는데?”

“명분 없는 이유뿐이군.”

“아니,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남았지. 너희들이 부상 당하면 치료하기 힘들어. 안 그래도 환자 많아서 바쁘니까 사고 좀 치지 마라. 제발. 루치아 선생이 화낼 거야.”

“후후후. 명분은 없지만 일리는 있군.”

준의 농담이 통했는지 카이엔이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강준. 만나서 영광이었다. 내일이 지나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이엔은 홀연히 진료소를 떠났다. 준은 그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를 붙잡을 권리는 없었다.

그의 진료는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다.

* * *

달이 밝게 떴다. 내일이면 완연한 보름달이 뜰 것 같았다.

준은 의자를 끌어다 창가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평소에 볼 수 없는 고민과 걱정이 서려 있었다.

볼카누스와 카이엔 때문이었다.

‘싸움을 막을 좋은 방법이 없을까?’

힘으로 제압한다면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두 사람이 마음으로 승복해야 관계가 풀리는 것이니까.

“릴리.”

“왜요?”

구석에서 야식을 먹던 릴리가 준을 바라보았다.

준이 만들어 준 인간의 몸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 이렇게 꼬박꼬박 야식을 챙겨 먹는 그녀였다.

“뭐 좋은 방법 없나? 볼카누스와 카이엔이 충돌하는 걸 막는 방법 말이야.”

“오히려 실컷 싸우게 내버려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특히 볼카누스 아재는 호전적인 성격이니까 마음에 쌓인 앙금을 풀 수 있는 건 그것뿐일 텐데.”

일리가 있는 말에 준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릴리는 다시 야식을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딸칵!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누아 진료소 내에서 준의 방을 함부로 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당신,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잠이 안 와서.”

안으로 들어온 건 잠옷 차림의 루치아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병아리가 수 놓인 잠옷을 입고 있었다.

“당신답지 않게.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있지. 다 큰 어른이 노크도 없이 잠옷을 입고 외간 남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걸 보니 한숨이 나와서 말이야.”

“뭐 어때요? 못 볼 거까지 다 본 사이잖아요. 우리.”

“아직 못 본 거 많은데?”

“그럼 지금이라도 보여 줄까요? 당신이 원한다면…….”

루치아가 잠옷 끈을 풀려고 하자 릴리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고, 준이 혀를 찼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커다란 달을 두 눈에 담았다.

릴리가 튀긴 닭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준의 방엔 두 사람만 남았다.

“볼카누스와 카이엔이 맞붙는 걸 막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야.”

“내일이었죠?”

“그래.”

“확실히 무의미한 싸움이죠. 마계가 소멸했으니 카이엔 쪽에는 이겨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을 거고, 볼카누스는 다시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하니까. 만약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가족들이 슬퍼하겠죠.”

“그들이 생존해 있나?”

“레드 드래곤족의 피해는 크지 않아요. 그들은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루치아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아그네스 선생에게 한번 부탁해 보는 건 어때요?”

“아그네스에게?”

“그 두 존재들을 성심껏 치료해 준 인간이잖아요. 그리고 성물을 선물 받은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고. 초월자들이 자신의 성물을 나눠 준다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라구요?”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이 지켜 주면 되잖아요. 뭐가 그리도 걱정이에요? 당신답지 않게. 일단 저지르고 보자. 당신의 철학 아니었어요?”

싱긋 웃은 루치아가 준의 등 뒤에서 가볍게 포옹을 해 주었다. 가만 생각에 잠기던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의를 걸쳤다.

“아그네스는?”

“집무실에서 폴링 씨와 작업 중이죠. 악덕 영주 덕에 철야를 안 하는 날이 없네요. 두 사람은.”

씨익 웃은 준은 진료소 밖으로 나갔다. 창고 안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루치아의 말대로 아그네스와 폴링이 영지의 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영주님!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아그네스. 지금 당장 왕진 준비를 해라.”

“예? 급환인가요?”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옆에 놓아 둔 왕진용 가방을 손에 들었다.

* * *

카이엔은 레어의 안식처 안에서 가부좌를 틀며 명상을 계속했다.

하지만 명상은 평소처럼 오래가지 못했다.

“드디어?”

카이엔이 조용히 눈을 떴다.

하늘 저편으로 이질적인 마나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게이트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엔과 조금 떨어진 빈 공간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엄청난 전류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한 바퀴 휘저은 전류가 한 곳으로 뭉쳤다. 콰앙, 커다란 폭음이 들리며 시퍼런 게이트가 입을 쩍 벌렸다.

그 안에서 누군가 당당히 걸어 나왔다.

볼카누스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볼카누스 쪽이었다. 그는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패잔병 주제에 도망치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군.”

“오늘까지만 기다리려고 했었지. 그대의 쓸데없이 큰 날개는 도망가는 데 딱일 테니까.”

“뭣이?”

콰르르릉!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볼카누스의 머리카락이 붉게 타오르며 사방에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그는 자유자재로 마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와중에서도 카이엔은 털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볼카누스를 쏘아보았다.

“어리석은 로드여.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은 없나?”

“미친 새끼. 유언은 곧 죽을 놈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도 모르나? 마계에 의무교육 도입이 시급하구만!”

볼카누스가 입을 쩍 벌렸다.

우우우웅!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불의 입자가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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