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04화 (104/175)

104화 증명의 시간 (1)

준은 외부 숙소에 머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준이라면 켈세타 성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머물 수 있지만, 백작의 심기를 고려해 파비안 남작이 다른 숙소를 잡아 주었다.

오랜 친구인 파비안 남작에 의하면 드뇌르 백작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나름 잘 참아 내고 있는 중이란다.

어쨌든 준은 백작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을 더 이상 크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양보할 건 양보하는 등 대범하게 행동했다.

사이먼의 처분도 드뇌르 백작에게 넘겼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에 대해 물었지만, 준은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한편, 바스티엔 공자는 숙소까지 찾아와 차기 영주로서 준에게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했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것은 파비안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참모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거기에 폴링이 사우던 가문의 일을 그만두고 엘누아르 가문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준은 기존의 소중한 관계를 깨지 않으면서 실리를 취하는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영주님 덕에 이렇게 멋진 곳에서 묵게 되었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폴링은 숙소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귀족처럼 차를 음미하며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아직 정식으로 서임되지는 않았다.

누아로 돌아가 서임식을 열고 엘누아르 영주의 이름으로 서류에 직인을 찍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은 그를 가신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가문의 가신인데 이 정도 대우는 받으셔야지요.”

“하하하. 이거 쑥스럽네요. 그런데 영주님. 조금 이른 질문입니다만, 저는 엘누아르 가문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됩니까?”

“원래라면 서기관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예? 서기관직을요? 하지만…….”

“맞습니다. 서기관직은 지금 아그네스 선생이 맡고 있지요. 그래서 아그네스 선생이 하던 행정 업무를 가져와 행정관직을 따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제는 가문의 행정 관련 업무를 총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오오!”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가문의 행정 업무를 총괄한다는 것은 그 가문의 실세가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행정계의 기사단장이라고 할까.

준이 이어 설명했다.

“물론 그만큼의 금전적인 대우도 해 드릴 겁니다. 사우던 가문에서 받으셨던 봉급의 두 배를 드리지요.”

“두 배나요? 세상에!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매년 성과에 따라 봉급을 올려드릴 생각이니까요. 가족들도 엘누아르로 데려오십시오. 다 같이 새롭게 출발하셔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환하게 웃던 폴링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게…… 하하하. 이게 참 쉽지가 않네요.”

폴링은 어색하게 웃으며 준에게 고백했다.

“혹시 아그네스 님께서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실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뭔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상황이라서요.”

“오히려 감사하다고 할 겁니다. 일이 그만큼 줄어드는 거니까.”

“그러시면 좋겠습니다만…….”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그네스 선생에게도 서기관으로서의 임무를 다시 부여해 줄 생각이니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합심한다면 우리 영지는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준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그네스는 엘누아르 지방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폴링은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다. 서로 돕는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폴링은 걱정을 덜어 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건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실은 아그네스 선생도 업무 이양에 동의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켈세타로 출발하기 전에 아그네스 선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 중급 치유사 시험을 준비해야 하니 마침 잘됐다고 오히려 좋아하더군요. 서기관직을 내놓는다고 하는 걸 간신히 말렸습니다.”

“정말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뭔가 아그네스 님답군요. 솔직하면서도 통통 튄다고 할까요?”

결국 폴링은 걱정을 떨쳐내고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믿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해 주셨는데,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게 해 드려야지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이 한 몸, 영주님과 영지를 위해 한번 불살라 보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의기투합할 무렵,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전담 시녀가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춰야 했다.

“나으리.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마이더스 상단에서 오셨다고 합니다만…….”

“마이더스 상단이라.”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곳은 켈세타의 중심부에 위치한 숙소다. 마이더스 상단 켈세타 지부가 있는 곳과 멀지 않다. 알파가 올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안으로 모셔요. 그럼 폴링 씨.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누아로 돌아가면서 합시다.”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폴링이 나가고, 손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알파였다. 당당한 풍채로 안으로 들어온 그는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왔습니다. 늦은 시간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니겠지요?”

“안 그래도 한번 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앉으시죠.”

“그럼 실례.”

두 사람이 테이블을 마주한 채 자리에 앉았다. 전담 시녀가 향이 좋은 차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알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준은 개의치 않고 먼저 본론을 꺼냈다.

“계약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더군요. 상단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뭐, 나름 사정이라는 게 있었지요.”

“거래가 어려우면 필로스 상단과 매듭을 짓겠습니다. 창고에 쌓인 금을 처리하기가 곤란해서 말이지요.”

“지금 막 왕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광사업과 왕도에 갔다는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왕도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예전에 제가 누아 진료소로 찾아갔을 때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약 조제법이 적힌 서류를 읽고 난 바로 그때요.”

“글쎄요.”

“올해 들어 제가 본 것들 중 가장 재미있는 서류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로만 끝나진 않을 것 같군요.”

잠시 뜸을 들인 알파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약 시제품을 보고 후원하겠다는 귀족들이 줄을 서고 있습니다.”

“흐음. 의외로군요.”

“의외가 아니라 시의적절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도 괜찮을지요? 왕국의 많은 귀족들이 식탐으로 위장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중 몇몇이 약을 받아 가곤 아주 효과가 좋다며 또 찾아오더군요. 그게 입소문이 난 겁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자신이 만든 위장약을 능가하는 제품은 없었다. 감기약도, 연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금광 사업보다 약제 사업이 더 구미가 당기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을 매듭지은 알파가 가방에서 금색 봉투를 꺼냈다. 아주 고급스러운 봉투였는데, 겉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준이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레스?”

“아레스 데 알프하이겐. 왕실의 일원이자 아비루나 왕국의 군무대신이지요.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상처 연고와 응급처치 키트에 아주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더군요.”

“그래요?”

준은 편지를 꺼내 내용을 읽었다. 정중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 읽은 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품에 넣었다.

“역시.”

그 모습에 알파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체 어느 영주가 아레스 공작의 친서를 받고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금광 사업에 대한 검토가 늦어졌습니다. 기다리고 계셨다면 사과의 말씀 드리지요.”

“괜찮습니다. 저도 마이더스 측의 조건엔 흥미가 있으니까요.”

“필로스 측에서 제시한 조건에 10퍼센트를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적은 액수가 아닐 텐데요.”

“하하하하!”

알파가 큰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니지요. 자고로 훌륭한 상인은 가치 있는 물건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금도 물론 귀중합니다. 돈이 되는 물건이지요.”

순간 알파의 표정이 바뀌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귀금속입니다. 반면 당신의 약은 다르지요.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 저는 당신의 약으로 이 대륙을 지배해 보려고 합니다.”

“금광은 옵션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준은 알파가 생각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굳이 힘들게 광산을 파지 않아도 금을 캘 줄 아는 사람이었다.

씨익 웃은 알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른 시일 내에 계약서를 누아 마을 진료소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만족하실 겁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참 그렇지. 가기 전에 하나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만난 어떤 고위 귀족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탈모와 무좀에 잘 듣는 약이 있었으면 한다고.”

“혹시 그 고위 귀족이라는 게 당신은 아니지요?”

“하하하핫! 상상력이 뛰어나시군요. 오, 이런. 시간이 많이 늦었군. 실례 많았습니다. 좋은 밤 보내시길.”

알파는 다소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준은 한참이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찻잔에선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았다.

“탈모와 무좀이라.”

알파가 남긴 한마디에 흥미가 생겼다.

단순히 흥미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준의 머릿속에선 이미 몇 가지 약재가 혼합되고 있었다.

* * *

누아 마을로 돌아온 준은 즉시 가신 임명식을 거행해 폴링을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신축 진료소를 건설할 때부터 누아 마을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덕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선생님!”

식이 끝나고 아그네스가 준을 쪼르르 따라갔다.

목적지는 진료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서기관에서 물러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괜히 일을 둘로 나눌 필요 없지 않아요? 폴링 님 정도라면 훌륭하게 잘 해낼 수 있을 텐데.”

준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옷걸이에 걸린 백의를 걸쳤다.

“혹시 저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죠?”

“도망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괜히 겁먹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진료 준비를 계속했다. 목에 청진기를 걸고 설압자를 준비했다.

왠지 조용한 게 이상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준이 아그네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계속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나?”

“네.”

“무섭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이러다 꿈에 나오면 선생님만 손해니까. 저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거 맞죠?”

“아니라니까.”

한숨을 쉰 준이 의자를 빙글 돌려 아그네스와 마주했다.

“일 자체는 폴링 경이 훨씬 더 잘하겠지. 경험도 지식도 많으니까. 하지만 네가 뛰어난 부분도 분명 있다.”

“치유술이 영지 경영에 도움이 되진 않아요.”

“그거 말고. 마을에 대한 애정과 관심 말이야.”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아그네스가 살짝 놀랐다. 곧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너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지만 폴링 경은 그렇지 않지. 외지인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을 거다. 그걸 놓치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주라는 거야. 떠돌이였던 내가 여기에 정착해 치유사 노릇을 했던 것도 네 도움이 컸으니까.”

“정말요?”

“그래. 그건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그네스의 두 눈이 감동에 젖었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나갔다.

“후우.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군. 언제쯤 손이 덜 가려나.”

그때, 견습이 차트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선생님. 환자분 오셨습니다.”

“마침 딱 맞춰 오셨네.”

준이 차트를 받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차트에 적힌 이름 때문이었다. 준을 찾아온 환자는 다름 아닌 카이엔, 마계의 대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