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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03화 (103/175)

103화 세상에 공짜는 없다 (3)

“그게 무슨 소리냐? 사이먼 경이 포박당한 채로 오고 있다니?”

“보고드린 그대로입니다. 죄수복을 입은 채 켈세타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죄수복을 입어?”

죄수복을 입은 사이먼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사건의 핵심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사로잡힌 것인가?

사이먼은 드뇌르 백작가의 제2기사단장이었다. 실력으로 2인자라는 말이다. 그런 그를 생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드뇌르는 그 답을 얻기 위해 기사를 추궁했다.

“대체 누가 벌인 일인가?”

“말씀 올리기 황송합니다만 강준 남작이 벌인 일입니다! 그가 기사단을 이끌고 켈세타로 왔습니다!”

“강준!”

순간 드뇌르 백작은 자신이 꾸민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최근 사이먼은 물론 기린에게서까지 연락이 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드뇌르 백작은 신중했다.

“강준 경은 왜 사이먼 경을 체포한 것이냐?”

“확실한 건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소문이라도 읊어 봐!”

“그게…… 사이먼 경이 자객들을 이끌고 누아 진료소를 습격했다고 들었습니다. 진료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물론 환자들까지 모두 죽이려 했다고 합니다!”

믿을 수가 없는 소문이었다.

드뇌르 백작은 한동안 말없이 기사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미친! 그게 말이 되느냐? 기사단장이나 되는 자가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이려 했다고?”

“진정하십시오. 각하! 소문일 뿐입니다!”

“괜한 소문이 날 리가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게 소문일 확률은 적었다. 아마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이 내린 명령은 사찰이었다. 어쌔신들을 붙여 주긴 했지만 그건 호위 목적으로 쓰라는 거였지, 학살 목적으로 쓰라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게 분명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선량한 마을 주민들을 해치려 했던 것인가?

“해서, 강준 남작은 지금 어디까지 왔나?”

“현재 켈세타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곧 성에 도착하겠군.”

“그게…….”

“또 뭐냐?”

백작이 불안한 눈으로 기사를 내려보았다.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보고했다.

“강준 남작은 바로 성으로 오지 않고 도시를 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바로 성으로 오지는 않을 듯합니다!”

“뭐?”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이먼에게 죄수복을 입힌 채로 퍼레이드를 한다고?

그 의미는 분명했다.

드뇌르 백작은 사이먼과는 달리 머리를 쓸 줄 아는 인물이었다. 준이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깨달은 것이다.

“지금 당장 브로그뉴 경을 보내! 강준 경을 바로 성으로 오라고 해라!”

“옛!”

기사가 부리나케 돌아갔다. 드뇌르 백작은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진득한 두통이 시작돼 좀처럼 눈을 뜰 수 없었다.

벌컥!

그때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드뇌르 백작은 무례를 탓하지도 못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파비안 남작이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백작을 노려보았다.

“영주님.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중요한 일은 분명 저와 상의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한마디에 드뇌르 백작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기사가 전해 준 것은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아아…….”

백작의 입에서 아득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뭔가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 * *

제1기사단장이자 사우던 가문의 최고 실력자인 브로그뉴는 수하 기사들을 이끌고 엘누아르 가의 기사단을 포위하듯 에워쌌다.

“누아의 촌놈들이 감히!”

“단장님! 이건 모욕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기사들이 분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냉정을 유지하며 말에 올라 상황을 살폈다.

곧 브로그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소문의 주인공인 사이먼은 팔과 다리가 묶인 채 호송용 마차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주군을 섬기는 자였다. 이런 대우를 받으니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누군가 해명해 주길 바라오.”

기다리고 있던 바이런이 응수했다.

“그전에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이게 무슨 결례란 말이오? 먼저 말에서 내려 남작님께 인사를 올리시지.”

“으음.”

바이런의 지적에 브로그뉴가 침음을 흘렸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아무리 사우던 가의 기사단장이라고 할지라도 남작인 준보다는 지위가 낮았으니까.

말에서 내려 바이런을 지나치려던 그때, 브로그뉴가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바이런의 옆모습이 보였다.

“당신이 바이런 단장이오?”

“그렇소.”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소?”

“누아 마을의 촌뜨기를 기억해 줘서 고맙지만, 그런 적 없소.”

“이상한 일이군.”

브로그뉴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아 마을의 바이런이라는 기사가 실력이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이런이 매섭게 노려보며 채근했다.

“하던 일이나 마저 하시오.”

“그러지.”

브로그뉴는 다시 한번 바이런의 얼굴을 기억에 담았다. 그리고 준에게 다가가 예를 취했다.

“인사가 늦어 송구합니다. 켈세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남작님.”

“오랜만이군요. 브로그뉴 경. 잘 지냈습니까?”

“하하하. 방금 전까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만.”

애써 웃어 보인 브로그뉴가 준의 눈치를 살피며 본론을 꺼냈다.

“백작 각하께서 하명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켈세타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가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오. 시간은 많이 있으니 천천히 입성하지요. 각하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주시지요.”

“남작님. 백작 각하의 명령입니다. 지금 바로 뵙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바이런 경!”

부름을 받은 바이런이 한달음에 뛰어왔다. 준은 귓속말로 그에게 명령을 내린 뒤 홀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곧 폴링이 그의 곁에 따라붙었다.

당황한 브로그뉴는 멍하니 있다 뒤를 쫓았다.

“남작님! 어디 가십니까?”

“영주께서 부르신다고 해서 지금 성으로 가는 길인데. 무슨 문제라도?”

“예?”

때마침 준의 행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이먼을 태운 마차는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길을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무언가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준이 내린 명령은 오늘 하루 동안 계속 도시를 돌라는 것이었다. 백작의 허를 찌른 절묘한 지시였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는 브로그뉴를 향해 준이 웃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부른 건 나지, 우리 일행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은 그냥 내버려 두시길.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자, 우린 어서 갑시다.”

“영주님.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든든하군요. 부탁합니다. 폴링 씨.”

그렇게 준과 폴링은 다시 몸을 돌려 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백작은 집무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집무실에는 파비안 경은 물론, 바스티엔 공자와 세사르 공자, 그리고 루드밀라 공녀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모여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준 경!”

가장 먼저 바스티엔 공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스티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문이 사실이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바스티엔이 물러났다. 준은 드뇌르 백작을 향해 가볍게 예를 취하며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백작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대는 우리 가문을 능멸하고 있다. 왜 사이먼 경을 그 모양으로 만든 거지? 이유가 있다 해도 조용히 처리하면 될 것을.”

“사안이 사안인 만큼 본보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우던 가문은 명예와 법도를 중시하는 가문. 그런데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기사도를 저버리고 민간인을 학살하려고 했지요. 명예가 땅으로 떨어지고 법도와 질서가 유린당한 처참한 일입니다.”

준은 사이먼과 기린의 행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고발했다. 따라온 폴링도 증언을 했고, 마리가 수집한 음성 증거도 재생되었다.

모든 퍼즐이 깔끔하게 맞춰진 느낌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다들 부끄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모두가 준에게 한 번씩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준이 정리했다.

“본인과 공범이 죄를 시인한 이상 더 이상 이론의 여지는 없다고 판단됩니다.”

“…….”

드뇌르 백작도 더는 반론을 하지 못했다. 마치 왕도의 대법정에서나 볼 수 있는 추궁이었다. 남은 모두가 긴장을 품은 채 준의 발언을 주목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백작 각하. 왜 사이먼 경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질문을 정확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명령이라니?”

“제 영지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라는 명령입니다.”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네.”

준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그럼 어떤 명을 내리셨습니까?”

“갑자기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었지. 발견 과정에서 어떤 부정이 있지는 않은지 파악하려고 사이먼 경을 보낸 거라네. 자네가 봉토를 원할 때 엘누아르 지역을 꼬집어 말하지 않았나?”

“그랬었지요.”

“누아 진료소를 습격하라는 명령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네. 사이먼 경이 내린 독단적인 결정이야.”

“그러니까 각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역시 자네와는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드뇌르 백작이 씨익 웃었다. 증거가 없는 이상 이 모든 것을 사이먼에게 떠밀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의 명예가 손상될까 우려되어 이 일을 널리 알리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각하와 무관한 일이라고 하시니 마음 편히 알리겠습니다. 마침 가신 회의가 열리기도 하니까요. 참, 곧 왕도에 갈 예정이었는데 그쪽에도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요.”

순간 드뇌르 백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강준 경! 그게 무슨 말인가?”

“각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그는 우리 가문의 기사단장이었네.”

“그럼 상관이 있는 일 아닙니까?”

준이 협박조로 나서자, 드뇌르 백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때, 파비안 남작이 가까이 다가와 백작에게 귓속말로 조언했다.

한숨을 내쉰 백작이 물었다.

“좋다. 그대가 원하는 바를 말해 보라.”

“하하하. 역시 각하와는 말이 잘 통해서 좋습니다.”

은근히 비꼬는 말에 드뇌르 백작은 화가 치솟았지만 친구의 조언을 떠올리고는 꾹 참았다. 자가당착에 빠진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제가 원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누아 마을 진료소와 관련된 일에서 모두 손을 떼십시오. 둘째, 누아 금광에서 나오는 금을 공물로 바치지 않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엘누아르 가문의 요구 조건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진료소에 들어간 비용도 비용이지만 금을 공물로 받지 못하면 손해가 막심했다.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 아니라 협상입니다. 각하께서는 제 요구를 거절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크윽!”

한참을 씩씩거린 영주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는 반쯤 포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경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그러니 저 빌어먹을 사이먼 경을 어서 성으로 데려와!”

“그전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무슨 서명?”

준이 품에서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그것은 방금 자신이 말한 두 가지 조건이 명문화된 각서였다.

“허!”

백작은 준의 준비성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면 각서에 서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곧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백작의 서명이 각서에 들어갔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평온하시길.”

목적을 달성한 준과 폴링이 백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고생 많았습니다. 폴링 씨의 증언 덕에 각하께서 빨리 결정을 하실 수 있었던 것 같군요.”

“아닙니다. 영주님께서는 이 모든 걸 다 계획하고 계셨던 거군요. 아까 각서를 꺼내실 땐 정말 소름이 다 돋았습니다. 하하하.”

“이로써 우리 영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폴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료소도, 금광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됐다.

“저, 영주님. 사실 저도 준비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슨 준비를?”

“각서는 아닙니다만.”

폴링이 멋쩍게 웃으며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살짝 들여다보니 사직서였다.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죠. 이걸 지금 서기관께 제출하고 오려고 하는데, 엘누아르 가문에 제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라면 이미 만들어 두었습니다. 편하게 다녀오시죠.”

“오, 영주님. 감사합니다!”

준이 악수를 청했다. 폴링은 황송한 얼굴로 두 팔을 뻗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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