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세상에 공짜는 없다 (2)
다음 날, 누아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간밤에 자객들이 진료소를 노리고 습격을 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드뇌르 백작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준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니진 못했다.
대신 사람들은 준의 무용담을 퍼트리며 칭찬하기 바빴다.
어쌔신들을 처단할 때의 신위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준은 50명이나 되는 적들을 몰살시켰다. 그 자체로도 이슈가 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한 바퀴 돌아 진료소에까지 도달했다.
‘나쁘지 않군. 하지만 소문이 켈세타에 닿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준은 차를 음미하며 생각에 잠겼다.
백작을 어떻게 압박하고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인지는 다 계획을 세워 놓았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였다. 언제 터트리는 게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얼마 전에 성에서 서신이 왔었지?’
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서랍을 열었다. 켈세타 성에서 보낸 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사우던 가문의 서기관이 보낸 편지였다.
표제를 읽은 준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정기 가신 회의라.’
가신 회의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열린다. 백작의 명으로 열리는 것과 정기적으로 열리는 것. 정기 가신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데, 마침 그 날짜가 도래한 것이다.
정기 가신 회의는 가신으로 등록된 모든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늘 붐비곤 한다.
준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신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에 도착해서 백작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군. 좋은 카드가 되겠어.’
가신 회의를 언급하며 백작을 압박한다면 효과가 더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편지를 내려놓은 준은 바로 날짜를 계산했다. 누아 마을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과 여정을 고려해 보니 내일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준은 즉시 릴리에게 지시했다.
“가서 하룬에게 전해. 내일 바로 켈세타 성으로 가겠다고. 정기 가신 회의에 참석하겠다.”
“죄수들은 놓고 가나요?”
“당연히 데리고 가야지. 다른 영지민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안이 훤히 보이는 호송용 마차를 준비하라고 해. 아마 좋은 쇼가 될 거다.”
“호호홋! 재미있겠다. 넹! 바로 준비할게요!”
릴리가 신난 표정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여간 좋은 구경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녀였다. 인간의 모습으로도 팝콘을 튀길 기세였다.
모든 계획을 깔끔히 정리한 준은 의자에 기댄 채 다시 찻잔을 들었다.
“선생님?”
그때, 문 쪽에서 노크가 들렸다.
문이 이미 반쯤 열려 있었기에 아그네스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그네스를 보고 한 차례 웃은 준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여러 가지로 대단하세요.”
“뭐가?”
어제 그 엄청난 사건을 치른 영주치곤 너무도 태평해 보였다. 아그네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여유 부리셔도 괜찮은 거예요?”
“안 될 거라도 있나?”
“아버지도 그렇고 하룬도 그렇고, 다들 심란한 것 같더라고요. 이러다 켈세타와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니냐고 걱정이에요.”
“전쟁이 날 것 같아?”
“글쎄요.”
아그네스는 고개를 숙였다. 치유술밖에 모르는 순진한 소녀였다. 영지와 대륙의 정세를 읽기엔 아직 너무 어리고 순박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와 하룬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전쟁이 날 일은 없다. 나더라도 한 명도 다치지 않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한 명도 안 다치게 한다는 거예요. 그냥 전쟁만 안 일어나게 해 주세요.”
“그러지.”
준은 싱긋 웃었다.
어젯밤 준이 실프의 장궁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봤더라면 어느 정도 믿어 줬을 텐데.
“아, 그리고 죄수들 조사 준비 끝났어요. 주변 시선도 있고 해서 창고에 준비해 놨어요.”
“잘했다. 곧 가마.”
찻잔을 싹 비운 준이 창고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삼엄했다.
바이런과 기사단원들이 주변에 서 있었고, 그 가운데 사이먼과 기린이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군.”
바이런을 비롯한 모든 기사단원들이 준에게 군례를 취했다.
상석에 도달한 준이 치유사 가운을 벗었다.
누아 마을의 치유사가 아니라 엘누아르 가문의 가주로서 신문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준이 그제야 죄인들을 살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존칭은 생략하지.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아침 식사는 했나?”
“…….”
친근한 질문에 두 죄인들은 어리둥절했다. 불호령과 고문이 시작될 줄 알고 긴장하고 있던 차였다.
“긴장할 필요 없는데. 어차피 나는 원하는 것만 얻어 가면 그만이니까. 협조한다면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다. 아, 참고로 여기가 진료소라는 거 잊지 마. 어쩔 수 없이 고문을 해야 한다면 강도가 무척 셀 거야. 바로 치료하고 또 고문하면 그만이니까.”
“허헉!”
긴장하던 사이먼이 신음을 토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험상궂게 말하면 더 좋을 텐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을 하니 정말 무서웠다.
준이 기린을 주목했다.
“마법사 친구. 본명이 뭐지? 예전에 주점에서는 에딘이었나? 그 이름을 쓴다고 들은 거 같은데.”
“말할 수 없어요.”
“왜지?”
“어차피 이렇게 잡혔는데 살아 돌아가긴 틀린 거 같고. 그러면 입 꾹 다물고 죽는 게 더 낫죠. 적어도 당신이 원하는 건 얻지 못하게 할 거니까.”
기린은 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것이 통쾌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낀 준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배포만큼은 사이먼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이런은 아니었다.
“이년! 네가 처한 상황을 똑똑히 봐라! 엘누아르 가문을 욕보이게 만든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가볍지 않은 거 아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닥쳐라!”
바이런은 손에 쥔 몽둥이를 휘두르려 했다. 준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흥미롭군. 본인이 처형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겠죠?”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 훈련된 어쌔신으로 마을 진료소를 습격해 모두 다 죽이려고 했던 누구와 비교하면 아주 가벼운 죄인 것 같은데. 안 그런가?”
가벼운 죄? 준의 한마디에 기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속셈이죠?”
“이름.”
“……기린 엘라드네스.”
“희한한 이름이군. 마탑 소속인가?”
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녀는 소속 마탑을 밝혔다. 서기를 맡은 기사단원이 그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드뇌르 백작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나?”
“사이먼 경을 도와 당신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이유는?”
“뻔하죠. 그 정도 금광이면 누구나 탐을 내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준은 사이먼을 신문했다.
“왜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해치려 했나?”
“계, 계획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너무 당황했어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황했단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지. 그냥 그때 자수했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송구합니다! 부디 자비를!”
기린을 신문할 때와는 달리, 준은 엄숙했다. 그 차이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사이먼은 머리를 박고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때, 기사단원 하나가 사이먼의 소지품 하나를 전달했다. 작은 피리였다.
“이게 뭐지?”
“그건…… 어쌔신들을 호출하는 피리입니다.”
“어디서 났나?”
“그게…….”
콰직!
준이 살짝 의자의 손잡이를 내려쳤는데, 그대로 작살이 나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손엔 시퍼런 마나가 맺혀 있었다. 얼버무리려던 사이먼이 기겁했다.
어젯밤 어쌔신들을 모조리 섬멸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적어도 그때 목격한 강준이라는 사람은 치유술만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마법과 격투술, 그리고 궁술까지도 마스터한 무서운 전사였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뇌르 백작께서 하사하신 물건입니다! 위중할 때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드뇌르 백작께서 지시하신 일인가?”
“…….”
콰직!
이번엔 의자의 왼쪽 손잡이가 날아갔다. 사이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 그, 그렇습니다!”
“진료소를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라고 한 것도?”
“그건 아닙니다.”
“그건 너의 판단인가?”
“예…….”
“알았다. 판결하지.”
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린은 석방한다. 대신 마나 서클은 영구 봉인하겠다. 나중에 충분히 반성을 하고 찾아온다면 열어 주겠다.”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나 서클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마력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평범한 치유사가 그걸 해낸다고?
준은 보란 듯이 기린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마나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기린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의 마력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안 돼!”
투둑!
순식간에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다섯 개의 서클이 모조리 봉인되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린이 피를 토했다.
“크윽!”
“석방해.”
“하지만 영주님! 지금 석방하는 건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준은 손을 홰홰 저으며 어서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바이런은 어쩔 수 없이 기린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순식간에 폐인이 된 기린은 쉬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나를 일으켜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엄청난 고통이 느껴져 시도조차 하질 못했다. 그래서 준이 그냥 석방하라고 한 것이었다. 마법사에게 이보다 큰 형벌은 없을 테니까.
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이먼. 그대에게는 중형을 내릴 수밖에 없군. 내일 호송용 마차를 좀 타 줘야겠어. 켈세타로 갈 거다. 죄수복을 입고 포박된 채로 갈 테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 두라고.”
“허어! 영주님! 그것만은 제발!”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나?”
사이먼이 납작 엎드렸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켈세타의 기사단장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굴욕적입니다.”
“그럼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나를 감시하는 건 이해해. 나도 백작 각하의 가신이니까 뭔가 의심된다면 그럴 수 있겠지.”
잠시 말을 끊은 준이 사이먼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손에 든 피리로 그의 이마를 쿡 찔렀다.
“하지만 진료소를 공격한 건 넘어갈 수 없어. 선량한 민간인을 죽이라는 기사도는 이 세상에 없거든. 이 피리를 분 순간부터, 넌 기사단장 자격을 박탈당한 거야. 알았나?”
“으으…….”
“바이런 경. 신문을 마칩니다. 죄인 관리 잘하고 내일 호송에 문제없도록 하세요.”
“명을 따릅니다. 자, 가자!”
바이런은 자비가 없었다. 저항하려는 사이먼을 걷어찬 뒤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기린도 몸을 휘청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창고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런데 준은 돌아선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룬이 다가왔다.
“주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너무 마음이 앞섰나.”
“예?”
준이 가리키는 곳엔 팔걸이가 완전히 부서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그네스한테 혼나진 않겠지?”
“오, 세상에. 그러고 보니 이거 네아가 아끼는 의자인데. 아론 촌장님께서 쓰던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잔소리 좀 들으시겠는데요?”
“난감하군. 뒤를 잘 부탁한다.”
“예? 뭐를요? 설마…….”
준은 하룬의 어깨를 다독이며 창고를 나섰다. 하룬의 공허한 외침만이 창고를 울렸다.
* * *
‘왜 사이먼 경에게 소식이 없는 거지?’
드뇌르 백작은 집무실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불안해 보였다. 그는 분명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이봐, 서기관.”
“예. 각하.”
“사이먼 경에게 연락받은 거 없나?”
“송구합니다만 없습니다.”
백작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죄 없는 서기관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그때, 기사 하나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사이먼 경이 포박당한 채로 호송 마차에 실려 켈세타로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도시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뭐라?”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