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세상에 공짜는 없다 (1)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하룬이 진료소로 찾아왔다.
아그네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는지 적당한 긴장감으로 무장을 한 채였다.
기사가 된 이후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훈련의 강도가 늘었고, 또 지위가 만들어 주는 품격이 그를 새롭게 했다.
“재미있는 일.”
“재미있는 일이요? 수상한 놈들이 나타나는 게 재미있는 일입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나나 루치아 선생의 실력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잖아? 거기에 마리도 있고. 바이런 단장도 있지.”
하룬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준의 말이 맞다.
그가 실력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예전 마르다 마을 던전에서 가고일을 분쇄시켰던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잡혀 온 사람은 어디서 왔대요?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마법사를 동원할 정도면 꽤 세력이 있는 집단 아닙니까? 평범한 좀도둑들은 아닌 거 같은데요.”
“제대로 봤다. 마리가 수집한 증거에 의하면 영주급 인사가 연루되어 있는 것 같더구나.”
“헐! 영주급이요?”
하룬은 깜짝 놀랐다.
준은 일부러 드뇌르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아직 증거가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턱을 괸 하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적단이 개입한 일이라면 간단하다. 토벌하거나 협상을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영지가 개입한 일이라면 다르다. 그 자체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혹시 사우던 가에서 사주한 겁니까?”
“가능성은 충분하지. 하지만 아직 단정하기 이르다. 잡혀 온 마법사에게 정보를 캐내야 하고, 또 일행이 있는데 그를 사로잡아야 해.”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놈을 붙잡아 오겠습니다!”
준은 하룬의 어깨를 다독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네 실력으로는 무리다. 상당한 고수더군. 아마 바이런 단장 정도는 되어야 상대해 볼 만할 거다.”
“그 정도입니까?”
“그도 단장급 인사일 거야.”
그때, 준의 기감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불길한 기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예리한 칼날 같은 살기였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도 없이 나타나 진료소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를 파악하니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사이먼이 악수를 두는군. 하긴, 궁지에 몰리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질 테니까. 애초에 영민한 사람도 아니었고.’
잠시 생각에 잠긴 준이 그들의 기감을 파악했다.
하나같이 혼탁했다. 살인을 굉장히 많이 한 자들이 분명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살인기계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룬. 이제 할 일은?”
“없습니다. 훈련도 다 끝났고 오랜만에 진료소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좀 보려고요.”
“잘됐구나. 오늘 밤엔 아그네스 곁을 지켜 주도록 해라.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명령입니까, 아니면 단순한 걱정입니까?”
“명령이다.”
진지한 표정의 하룬이 군례를 취했다. 예전보다 훨씬 절도가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하룬이 나가고 조용해지자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서 있던 릴리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아, 시종 일도 진짜 못 해 먹겠네요. 우씨! 완전 벌서는 기분이야.”
“조금만 참아라. 나중에 시종이 더 들어오면 하녀장으로 승진시켜 줄 테니.”
“그래도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잖아요. 그건 제 성미와 전혀 맞지 않다구요.”
페어리는 태생적으로 유쾌하고 발랄한 요정들이다. 그런데 석상처럼 주인의 곁을 지켜야 하는 시종 역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몸을 버려도 된다. 세계수의 눈물이 좀 아깝긴 하지만.”
“좀 더 지내 볼래요. 이런 답답한 생활에도 뭔가 의미가 있겠죠. 응? 왜 그런 얼굴로 봐요?”
“뭔가 좀 달라진 거 같아서.”
“뭐가요?”
“글쎄. 잘 모르겠군.”
왠지 그녀가 조금씩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일부러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변화에 방해가 될까 봐.
준이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 무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진료소를 포위한 자들의 기도는 어머어마했다. 그 수도 50명으로 많은 편이었다.
거기에 어두운 밤이었고 지형적인 유리함까지 갖췄으니, 상대하기는 게 더더욱 쉽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일반인의 관점이었다.
‘오랜만에 장거리 무기를 한번 써 볼까?’
준은 투박한 활을 하나 집었다. 예전 엘븐하임을 방문했을 때 엘프들의 우두머리인 하인케스에게 받은 보물급 활이었다.
시험 삼아 시위를 퉁겨본 준은 만족했다. 창고에 오래 보관되어 있었지만, 성능은 그대로였다.
이 활의 이름은 ‘실프의 장궁’이다. 바람의 정령의 힘이 강하게 깃들어 있는 활이다.
강력한 공격력도 장점이지만, 한 가지 특징이라면 화살이 없어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나를 화살처럼 쏘아 댈 수 있다.
준이 고른 무기는 실프의 장궁 하나뿐이었다. 근접 무기는 고르지 않았다.
“설마 혼자 다 쓸어버리시게요?”
“그래야지.”
“그러고 보니, 이제 영체가 아니라서 구경도 못 하겠네요. 흑흑.”
“까불지 말고 안전한 곳에 가 있어라.”
1층으로 내려온 준은 마리를 불렀다. 진료가 모두 끝난 밤이었기 때문에 주변은 조용했다.
“지금 바로 진료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하 창고로 대피시켜라. 이곳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 최대한 빨리 서둘러.”
“예. 선생님.”
땡! 땡!
마리가 대기실에 있는 종을 두 번 쳤다. 휴식을 취하던 견습 치유사들이 재빨리 달려 나왔다.
마리는 준이 내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비상 상황이에요. 이유 불문하고 지금 당장 환자분들을 모시고 지하 창고로 대피하세요.”
“알겠습니다. 사무장님!”
환자들이 하나둘 부축을 받아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아그네스도 하룬의 호위를 받으며 몸을 피했다.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루치아뿐이었다.
“자객들이 꽤 많이 모였네요.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불쌍한 영혼들을 끌어들이고 그러나.”
“넌 지하 창고에 있어.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루치아는 허리춤에 검을 착용하곤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이것으로 지하 창고 쪽은 그 어떤 곳보다도 안전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준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좋아. 슬슬 가 볼까?’
진료소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기운이 훅 밀려왔다. 곳곳에서 이쪽을 향한 살기가 쏟아졌다. 잘 벼려진 예기처럼 번뜩이는 살기. 그러나 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탁.
문이 닫혔다.
“환자들의 휴식과 안정을 방해한 죄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목숨으로.”
조용한 한마디였지만, 숨어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어쌔신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준은 실프의 장궁을 수직으로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시위를 당겼다.
위잉!
화살은 없었지만, 준의 고강한 마나가 마법 화살로 변해 활에 장전되었다.
그런데 한 발이 끝이 아니었다.
두 발, 세 발, 네 발. 그리고 다섯 발.
놀랍게도 준의 손가락에 걸린 화살은 총 다섯 발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위를 놓고 나서가 진짜였다.
피슈우웅!
다섯 발의 화살이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큭!”
“크억!”
“억!”
“으윽!”
“쿠엑!”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히 다섯 발의 화살이 다섯 목숨을 거두었다. 수십 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아 온 어쌔신도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공격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공격이……?”
살기로 가득 찼던 공간에 당황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만히 서 있다가 뒈지지 말고 모두 한꺼번에 덤벼! 놈의 목을 쳐라!”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변조된 사이먼의 목소리였다. 준은 그 위치를 정확히 기억했고, 일단 덤벼드는 어쌔신을 상대했다.
꽈득!
가장 먼저 달려든 어쌔신은 평소 속도에 자신이 있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그 장기를 탓해야 할 것이다. 가장 먼저 달려든 탓에 목을 붙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우드드득!
“커헉!”
준은 그대로 남자의 목을 비틀었다. 숨이 바로 끊어졌다. 시체를 내던지자 뒤쪽에서 달려들던 어쌔신이 부딪혀 나뒹굴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투극이 시작되었다.
* * *
소란은 금방 정리되었다.
모든 어쌔신들이 차갑게 식었다. 준은 이례적으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살려 둔다면 언젠가 누군가의 선량한 목숨을 취할 자들이었기 때문에.
준은 유일한 생존자를 끌고 진료소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대기실에 내팽개쳤다.
“으억! 사, 살려 주십시오…….”
우스꽝스럽게 바닥을 구른 남자가 잽싸게 자세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간절히 목숨을 구걸했다.
그는 바로 사이먼이었다.
신나게 얻어맞았는지, 온몸에 피멍이 들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잠시 기다려라.”
“옛? 살려 주시는 겁니까?”
준은 대꾸 없이 대기실에 있는 종을 세 번 때렸다. 그러자 숨어 있던 지하 창고의 문이 열리더니 루치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정리됐어요?”
“그래. 일단 폴링 씨 좀 데리고 와 줘.”
“알았어요.”
폴링이라는 말에 사이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자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인피면구.
기린이 만든 인피면구는 대륙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자신이 변장한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루치아가 폴링과 함께 대기실로 올라왔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영주님. 이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 금괴 창고를 노린 흉수입니다. 그리고 방금 진료소를 습격해 모두를 해치려 했지요.”
“이럴 수가. 그게 정말입니까? 응당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군요!”
“그 전에, 한번 확인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폴링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떠올렸다. 준은 사이먼을 일으키더니 마나를 실어 그의 얼굴 살을 꽉 쥐었다.
“아악! 안 돼!”
쫘아아악!
본래라면 찢어질 일이 없었을 테지만, 준의 마나 앞에서는 초라한 가죽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준이 얼굴을 잡아 뜯자 사이먼의 진짜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폴링이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사이먼 경!”
“이익……!”
“경께서 왜? 금괴 창고를 노리고 진료소를 습격하다니! 제정신이십니까!”
사이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를 위해 준이 대신 대답했다.
“사이먼 경은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 뒤에서 일을 계획한 사람은 따로 있지요.”
“그게 누굽니까?”
“사우던 가문의 제2기사단장을 움직일 만한 사람이야 한 명뿐이지 않습니까?”
“아아!”
폴링은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로 드뇌르 백작. 그가 음산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증거는 모두 모았습니다. 사이먼 경과 여마법사가 나눈 대화도 모두 녹음이 됐고 이렇게 현장에서 체포했으니까요.”
“이런 말도 안 되는…….”
폴링은 낙담했다. 지난 수십 년간 사우던 가를 위해 바쳐왔던 충성이 허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찾아가서 따져야지요. 저는 이번 일을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환자들을 위협하는 일은 용서할 수 없지요. 백작께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이번 일의 목격자로서 증언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때, 바이런이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진료소에 도착했다.
준은 바이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군례를 취한 그가 하룬과 함께 사이먼을 포박해 감옥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