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역습 (2)
마리가 노린 것은 단 한 사람, 기린이었다. 한 줄기의 벼락이 영리하게도 여마법사를 정확히 강타했다.
콰과과광!
“허윽!”
절박한 신음이 흘렀다.
반사적으로 실드를 전개해 하늘로 손을 뻗었지만, 마리가 일으킨 번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실드를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번개가 실드와 함께 소멸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번개는 기린을 덮쳤다.
파지지직!
“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외침이 계속되었다. 미친 듯이 몸을 떨던 기린이 풀썩 쓰러졌다.
그녀의 온몸이 새카맣게 그을렸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옷이 모두 탔고, 피부에 화상을 입혔다. 상당히 큰 부상이었다.
만약 일반인이었다면 즉사했을 공격이었다. 마법사였기에 항마력이 뛰어나 버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기린에게 통증은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소녀의 정체.
소녀는 자신의 오감과 마나를 뛰어 넘어 상처를 입혔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가 어떻게 저런 힘을 감추고 있었던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기린은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마리가 뒤늦게 답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창고를 노리고 있었죠? 순순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드리겠어요.”
“우, 우린 보물 사냥꾼이야! 근처를 수색하고 있었다고 말했잖아!”
“어른이 거짓말하면 못 써요.”
격하게 저항하던 사이먼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리가 귀엽게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
“좋아요. 아저씨가 보물 사냥꾼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마나가 주입되자 지팡이 끝에 달린 큐브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고작 네 명이 저 큰 창고를 지키고 있는데 더 살필 게 뭐가 있어? 어디 슬쩍 개구멍을 뚫어서 들어가면 그만이겠구만.
사이먼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들은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분명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생생히 기억날 정도였다.
마리가 생긋 웃었다.
“이 주변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요. 움직임을 감지하는 건 물론이고, 말소리 하나까지 다 녹음할 수 있죠. 이렇게요.”
친절히 설명한 마리가 녹음한 것을 계속 틀었다.
― 오늘은 꼭 창고 내부로 들어가서 뭐라도 좀 확인을 해야 해. 영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
― 감시망이 사라지는 때를 노려서 진입하는 방법은 없나? 인부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들어갈 때는 감시망이 작동하지 않을 거 같은데.
― 엄청난 양이군! 강준 이 자식, 금방 부자가 되겠어.
재생이 끝났다.
큐브가 움직임을 멈추자 마리가 지팡이를 다시 수직으로 쥐었다. 대마법사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엘누아르의 영주께 이 자식이라는 말은 너무 심하지 않아요? 영주라는 사실을 떠나서 많은 분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는 좋은 분인데.”
“…….”
“이게 바로 아저씨가 보물 사냥꾼이 아니라는 증거예요. 금괴 창고에 침입하려 했다는 증거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주님께 보고를 드린다고요? 어떤 영주님께서 이런 일을 시키신 건가요?”
그것만큼은 발설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드뇌르 백작의 체면은 지켜야 했다. 얼굴에 쓴 인피면구가 벗겨진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자 살짝 올라간 사이먼의 입꼬리에 살기가 맺혔다.
“어린 목숨이라 그냥 보내 주려 했지만……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구나. 운명을 탓해라.”
스릉!
사이먼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는 자신의 마나를 아끼지 않고 검에 불어넣었다. 바다처럼 시퍼런 검기가 출렁거렸다.
“내가 왜 도망가지 않은 줄 아나? 마법사 놈들은 근접전에 약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 하앗!”
기합을 내지른 사이먼이 도약하며 검을 흉하게 휘둘렀다. 출렁이던 검기가 쇄도하며 마리의 목을 노렸다.
쐐애액!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과연, 사우던 가문의 기사단장다운 일격이었다.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검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째앵!
“뭐, 뭣이……!”
사이먼은 두 눈을 부릅떴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목이 베이기는커녕, 자신의 검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새하얀 검 모양의 빛줄기가 마리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 빛줄기가 사이먼의 검을 막은 것이다.
“마나 소드!”
고위 전투 마법사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마나의 검. 귀엽고 여려 보이는 소녀가 그 위험한 물건을 소환한 채 당당히 서 있었다.
마리가 조용히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누가 아저씨를 보낸 건가요?”
“닥쳐!”
무시무시한 검기가 마리를 덮쳤다.
째쟁!
하지만 이번에도 공격이 막혀 버렸다.
챙! 쨍쨍쨍!
푸른 불꽃이 튀며 격렬한 검격이 이어졌다.
쉴 틈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이먼은 모든 힘을 실어 마리를 공격했다. 속도와 기술 모두 마리를 능가했지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검을 뻗으면 찌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환영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허억, 허억!”
사이먼의 체력과 마나가 빠른 속도로 소진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패배할 게 분명했다. 상대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법을 함께 사용한다면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다.
아직 마리는 수세만 취하고 있었다.
그녀가 공세로 전환하기 전에 선택을 해야 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할지를.
“망할 년! 운 좋은 줄 알아라!”
쨍그랑!
사이먼이 유리구슬을 바닥에 던졌다. 구슬이 깨지며 엄청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마나로 만들어진 빛이라 마리에게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마리는 태연히 눈을 뜨며 뒷산 쪽으로 도망치는 사이먼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며 주변이 고요해졌다.
“쫓아가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돌아선 마리가 묻자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커다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준이었다.
그의 손에도 마리의 것과 똑같은 마나 소드가 들려 있었다.
사실 사이먼과 맞붙은 건 마리가 아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준이 마리의 마나 소드와 링크해 뒤에서 조종한 것이었다.
“괜찮아. 그가 무사히 도망가야 우리의 계획대로 될 테니까. 수확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준은 쓰러져 있던 기린을 살펴보았다.
숨은 붙어 있었지만, 워낙 마리의 마법이 강력해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녀의 맥을 짚은 준이 아공간 창고에서 응급처치 키트를 꺼냈다.
“급환이다. 좀 도와야겠는데?”
“예, 선생님.”
어느새 지팡이를 거두고 견습 치유사로 돌아간 마리가 준을 보조했다. 준은 완벽한 솜씨로 기린의 부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응급처치를 모두 마치자 기린의 호흡이 한결 더 편안해졌다.
“슬슬 가자. 일단 이 환자는 입원을 시키는 게 좋겠어.”
씨익 웃은 준은 적에서 환자가 된 기린을 들쳐 업은 채 진료소로 향했다.
* * *
기린은 특실에 입원했다.
격리가 필요한 환자나 고위 귀족이 방문했을 때 쓰려던 병실이었는데 마침 운이 좋았다. 아주 넓고 깨끗한 병실이었다.
“이 요망한 계집이 감히 우리 귀여운 마리를 노렸단 말이죠?”
루치아가 못마땅한 눈으로 기린을 노려보았다.
운 나쁜 여마법사는 양손에 마법 억제 도구가 걸려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해예요!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조사하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기린의 두 눈은 공포로 가득했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 루치아는 딱히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거짓말인 거 다 들통 났는데 뭐하러 입 아프게 변명을 해? 그럴 기운이 남아 있으면 널 버리고 도망간 동료를 탓하라고.”
“즈, 증거가 있나요?”
“어디서 증거 타령을 하고 있어? 콱 그냥.”
루치아가 엄청난 마나를 일으키자 기린이 기겁했다. 그 손으로 한 대 맞았다간 머리가 터지고도 남을 것이다.
‘대체 이 진료소는 뭐하는 곳이야?’
기린은 혼란스러웠다. 마탑의 기대주였던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둘이나 더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준이 나섰다.
“루치아. 그만 둬. 환자를 위협하는 치유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꼴을 보아하니 사람 좀 해치고 다녔을 것 같은데. 당신은 사람도 좋지. 왜 이런 사람들까지 치료해 주고 그래요? 약초 아깝게.”
“마리가 힘 조절에 실패했어. 잠깐 기절만 시키라고 했거든.”
곁에 있던 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살짝 겁만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어요. 마나를 조금만 썼는데도.”
“어쩔 수 없지. 마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세밀한 조절이 어려우니까. 틈 날 때마다 연습을 해.”
마나를 조금만 썼다고? 그 한 방에 목숨을 잃을 뻔한 기린은 몸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준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구면이죠? 전에 호프만 씨의 주점에서 만난 것 같은데.”
기린이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죠. 여긴 진료소입니다.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기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다행이군요.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합시다. 참고로 딴 마음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은 마나를 쓸 수 없으니까. 이대로 도망간다면 영원히 마나를 다루지 못하게 될 겁니다.”
상냥한 어조로 경고한 준이 병실을 나갔다. 루치아와 마리도 그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기린은 눈물을 쏟았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사이먼은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미리 봐뒀던 동굴 안으로 들어가 어둠에 몸을 숨겼다.
그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한참이나 밖을 살폈다. 다행히 쫓아오는 자들은 없었다.
“젠장! 일이 완전 꼬였군.”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맨손으로 땅을 쿵쿵 쳤다.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분기에 차 있었다.
“그 계집이 모든 걸 불면 어쩌지? 그대로 뒈져 버려야 깔끔할 텐데.”
확률은 반반이었다. 기린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응급처치를 할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빨리 병원으로 옮긴다고 해도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다.
“후우. 침착하자. 마음이 급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지. 후우우.”
심호흡을 한 사이먼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살폈다.
“그 계집이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살인멸구를 하든, 아니면 강준 그놈을 죽이든 해야겠군. 조금 이르긴 하지만,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겠어.”
계획에 없는 큰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체가 밝혀지고 배후에 드뇌르 백작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정말 큰일이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해!”
결심을 세운 그가 품에서 피리를 꺼내 힘껏 불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주변에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이 하나둘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뇌르 백작이 특별히 붙여 준 어쌔신들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이들을 부르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들은 출신도 이름도 없었다. 사로잡힌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악행을 저지르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오늘 밤 엘누아르 가문을 친다. 그곳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알았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복면 너머로 비치는 어쌔신들의 눈에서 지독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