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다 (1)
이제는 공용 집무실로 쓰이는 창고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인기척이 들렸음에도 아그네스는 보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누아 진료소에서 근무하는 견습 치유사였다.
“아그네스 선생님. 곧 회진 시간이에요.”
“네. 곧 가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준이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러 가기 전에 공용 집무실로 가 보라고 했는데, 와보니 책상에 영지 개발 관련 서류가 잔뜩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시간을 내서 읽어 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걸 언제 다 준비하신 걸까?’
분량이 많은 건 둘째치고, 계획이 굉장히 잘 짜여 있었다. 이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누아 마을은 도시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아 마을을 포함한 엘누아르 영지를 위생적이며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골자였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영주가 된 이후로 준이 진료를 빼지도 않았고, 환자를 돌보는 것에 소홀하지도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많은 서류를 준비한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불가능할 텐데. 이상하단 말이야.’
하지만 사람의 몸이 두 개일리가 없지 않은가. 아그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류를 다시 정리했다. 늦기 전에 회진을 해야 했다.
준은 신축 진료소에 입주하고 나서부터 회진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관을 사용할 때는 굳이 시간에 맞춰 회진을 돌 필요가 없었다. 입원 환자가 적기 때문에 적당히 짬을 내서 살펴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병실도 굉장히 많이 늘었고, 누아 마을 출신 환자보다 외부에서 온 환자들이 더 많았기에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머지는 이따 짬 내서 읽어 봐야겠다.’
아그네스는 서류를 대강 정리하고 공용 집무실을 나서 진료소 건물로 들어갔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견습 치유사가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선생님. 오늘은 직접 회진을 도시나요?”
“아뇨. 루치아 선생님하고 같이 해야죠. 아직 혼자 하기는 무리예요.”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견습 치유사가 물러갔고, 아그네스는 즉시 루치아의 진료실을 찾았다. 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힐끔 안을 들여다보았다.
루치아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그네스는 가볍게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대답이 없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잠이 든 모양이다.
한 번 더 불러 볼까 했지만 그냥 문을 닫고 나왔다. 그녀가 너무나 맛있게 낮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잠을 방해받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금화보다 잠이 좋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이 준 선생님께 부탁해야겠네. 금괴 창고에 갔다가 돌아오셨으려나?’
혹시나 싶어 아그네스는 바로 옆방에 서서 문을 노크했다. 다행히 안에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준은 늘 그렇듯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리고 한옆에는 릴리가 얌전히 서 있었다. 시종이 된 이후로 웬만해서는 준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류 검토는 끝났나?”
“아뇨. 아직 반도 못 읽었어요. 휴, 전 선생님처럼 만능이 아니라구요.”
“채근하려는 건 아니고. 천천히 봐도 돼.”
“내일까지 전부 읽어 놓을게요. 우리 영지를 위한 일인데 소홀히 할 수는 없죠.”
듣고 싶던 한마디였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내려놓았다. 팔짱을 끼며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 듯이.
“회진 시간인데 루치아 선생님께선 나오기 조금 곤란하신 것 같아, 선생님께 좀 부탁드리려고요. 죄송한데 시간 괜찮으세요?”
“나오기 곤란하다라. 진료실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지?”
“아, 그게…….”
“뭐 안 봐도 뻔하지.”
피식 웃은 준은 책상에 놔 둔 청진기를 목에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처음 보는 기구라 아그네스가 흥미를 보였다.
“근데 선생님. 목에 걸고 계신 그건 뭐예요? 처음 보는 물건이네요.”
“이거? 청진기라는 물건인데. 요즘 왕도 종합병원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더군. 마르다 마을의 알렌 선생 알지? 그 친구가 소개해 주더군.”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건데요?”
준은 친절하게 청진기를 귀에 걸고 옆에 있는 릴리의 배에 갖다 댔다. 릴리는 마치 실습용 마네킹이 된 것 같아 황당했지만, 참았다.
“이건 인체의 내부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때 쓴다. 호흡음이나 심장음, 그리고 장에서 나는 소리 등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이렇게 헤드를 원하는 부위에 갖다 대면 된다.”
“와! 신기하네요.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진찰에 도움이 될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정상일 때와 병에 걸렸을 때 나는 소리는 다르다. 특히 폐렴이나 기관지에 문제가 있을 때는 바로 알 수 있지. 심장도 마찬가지고. 잡음으로 여러 병증을 파악할 수 있어.”
준의 설명이 이어지자 아그네스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정식으로 치유사가 된 이후에도 배움에 대한 갈망이 깊은 그녀였다.
게다가 마나 유저가 되었으니 그 열망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내일쯤 시간이 나면 가르쳐 주마. 꽤 어려운 수업이 될 거야. 들리는 소리에 따라서 예측할 수 있는 증상이 다양하거든.”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입원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견습 치유사가 두 명 따라붙어 보조를 했다.
준이 물었다.
“입원 환자는 몇 명이나 되지?”
“총 14명입니다.”
“오늘 두 명이 더 입원한 건가?”
“예. 루치아 선생님께서 입원 지시를 하셨어요. 오전에 입원 수속이 끝났습니다.”
혼자서 진료를 볼 때는 입원 환자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치유사 세 명이 진료를 보고 있다. 누가 언제 입원했는지는 보고를 받기 전엔 알 수가 없었다.
“중환인가?”
“아뇨. 장염 환자인데, 수분 손실이 우려되어 단기 입원을 지시하셨어요. 나머지 한 분은 골절이고요.”
“그렇군.”
최근 입원 환자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위중한 환자는 없었지만, 시설이 확충된 만큼 입원이 필요한 환자들은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켈세타 성에서 지원금이 나오기도 하고, 거기에 금광을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지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환자가 없으면 파견 나온 견습 치유사들이나 아그네스가 경험을 쌓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하에 결정한 일이다.
첫 병실로 들어서려던 그때 마리 사무장이 준을 불렀다.
“선생님. 켈세타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누가?”
“마이더스 상단에서 오셨습니다. 알파 지부장이라고 하는데요. 사업 관련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네요.”
“지부장님이 여기까지 오셨다고?”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마이더스 상단 켈세타 지부장이 누아까지 왔다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들을 시켜도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일 텐데.
반면 준의 입가엔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대어가 걸려들었다.
사실 준은 금괴 및 금광석 유통 사업권을 마이더스 상단이 아닌, 필로스 상단과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필로스 상단도 대륙 3대 상단 중 하나로 손꼽히는 유서 깊은 상단이었다.
사실 일을 편하게 하려면 마이더스 상단과 손을 잡는 게 맞았다.
하지만 준은 좀 더 재미있게 놀아 보기로 했다.
만약 경쟁사와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소문이 난다면, 분명 마이더스 상단에서 움직임을 보일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마이더스 상단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일이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법이니까.
“회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해 드려라. 넉넉잡아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알겠습니다.”
마리가 다시 내려가자 아그네스가 조심스럽게 준에게 물었다.
“그래도 중요한 손님이 오신 건데 바로 내려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회진은 저 혼자 어떻게든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내려가 보세요.”
“잘못된 생각이야.”
“예?”
“여기가 진료소라는 걸 잊지 마. 어떤 일이 생기든 환자가 우선이어야지. 앞장서라.”
“아, 넵.”
아그네스가 병실로 먼저 들어갔다. 환자들은 모두 반쯤 몸을 일으켜 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구. 아그네스 네가 직접 봐 주는 게냐?”
“아뇨. 오늘은 준 선생님께서 봐 주실 거예요.”
4인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은 모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다치는 등 물리적인 충격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환자였다.
준은 환자들의 환부를 어루만지며 질문을 꺼냈다.
“통증은 어떠십니까?”
“이 정도면 참을 만합니다. 좀 답답한 거 빼고는 아주 좋지요.”
다리를 꼼꼼히 감싸고 있는 고정장치를 살펴본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장치를 풀어도 좋을 것 같군요. 내일 바로 제거하고 천천히 움직여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신다면 말씀하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아그네스 선생.”
준이 부르자 아그네스는 환자의 다리를 감싸 쥐고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미약하지만 하얀빛이 환자의 다리에 스며들었다.
준은 그 치유 마법의 세기와 침투력 등을 살폈다.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준은 그런 식으로 회진을 돌며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아그네스에게 맡겼다. 처치가 좀 곤란한 환자는 준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이런 식으로 아그네스는 자연스럽게 수련할 수 있었다.
회진이 모두 끝났다. 준이 예상한 대로 한 시간을 조금 넘겼다.
준은 차트 정리를 아그네스에게 맡기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계속 여기에서 기다리셨던 겁니까?”
“예. 새 건물이 아주 좋군요. 과연 드뇌르 백작께서 신경을 쓰신 것 같습니다.”
알파는 씨익 웃으며 신축 진료소 건물을 칭찬했다.
그는 환자 대기실에 계속 선 채로 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은 미소를 지었다. 알파는 상대방을 무안하게 하려는 교묘한 술책을 부리고 있었다.
감히 마이더스 상단의 지부장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냐는 듯이.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준은 드뇌르 백작이 왔다고 해도 아마 이곳에서 똑같이 기다리게 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그러지요.”
두 사람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구관에서는 진료실에서 손님을 맞았지만, 이젠 따로 공간이 있었다.
시종 역을 맡은 릴리가 향 좋은 차를 내왔다.
그렇게 두 남자는 차를 음미하며 근황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특별한 일은 없었다. 맡은 일을 처리하는 것 외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찻잔을 거의 다 비운 알파가 그것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요즘 필로스 상단과 친하게 지내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업무적으로 몇 번 만났을 뿐입니다. 우리 금광 사업에 아주 관심이 많더군요.”
“서운하군요. 저희 상단이 영주께 베팅한 액수가 상당히 큽니다만.”
“그건 상비약 사업이니 별개의 문제지요. 실제로 필로스 상단과는 금광 관련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의약품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지요.”
“그렇군요.”
알파는 점잖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꺼낸 말이었다. 비즈니스에서는 때로는 감정에 호소할 필요도 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그런 감정적 호소가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알파는 다시 찻잔을 입에 댔다. 왠지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