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미끼를 던지다
“지금 뭐라고 했나!”
드뇌르 백작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령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그만큼 백작의 심기는 불편해 보였다.
“다, 다시 아룁니다. 엘누아르 지역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었습니다. 정확히는 누아 마을 뒷산 지역입니다. 곧 채굴 작업을 시작할 거라고 합니다.”
“거대한 금광이라니…… 허.”
그렇게 중얼거리던 드뇌르 백작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골 깡촌에서 금광이 발견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거대한 금광이라는 추상적인 정보보다 그 디테일을 따져야 할 상황이었다.
“추정 매장량은? 금광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나?”
“있습니다.”
전령은 미리 준비한 서류를 품에서 꺼냈다.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 폴링에게 부탁해 챙겼는데 이것이 목숨을 살렸다. 만약 없었더라면…….
백작의 시종이 그것을 대신 받아 백작에게 전했다.
서류를 재빨리 펼쳐 읽어 본 백작이 헛숨을 들이켰다. 두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300톤 이상 매장돼 있다고?”
쿵!
백작이 팔걸이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벌게진 걸 보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백작은 곧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서류엔 왕립학술원에서 발행한 인증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폴링이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왕립학술원의 전문 조사인력을 초빙해 금광을 감정했다.
말이 300톤이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추정치라면 그 이상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정도면 적어도 아비루나 왕국에 존재하는 금광 중에서 가장 매장량이 많다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안에 있는 금광석만 잘 캐낸다면 왕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해관계에 빠삭한 드뇌르 백작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젠장!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군.’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만약 엘누아르 영지를 준에게 봉토로 내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금광이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되었을 것이다.
물론 방법이 없지는 않다.
준과는 가신관계, 즉 일종의 계약 관계로 이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것을 청산하면 다시 봉토를 환수할 수 있다.
‘하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겠지. 엄청난 비난은 물론이고 내가 세운 계획이 모조리 틀어지고 말 거야. 어떻게든 강준 남작은 붙들어 둬야 하는데…… 크윽.’
진득한 두통이 시작됐다. 그 기색을 눈치챈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영주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치유사를 부를까요?”
“됐다. 아무래도 파비안 경의 두통이 옮은 게 틀림이 없단 말이지.”
“역시 도널드 선생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손짓으로 짜증스럽게 시종을 물리친 백작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어쩌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좀 더 신중히 검토한 후 봉토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강준 경은 더 좋은 봉토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굳이 엘누아르 지방을 원했었어. 혹시 이미 그곳에 금광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백작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금광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 전후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가능성에만 집중했다.
‘한번 조사해 볼 만한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를 기만한 꼴이 되는 거니까.’
생트집에 가까운 계획을 세운 드뇌르 백작이 다시 전령을 주목했다.
“해서, 누가 보냈다고?”
“폴링 사무관께서 보냈습니다. 그 서류도 폴링 사무관께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다.”
“폴링은 지금 거기서 뭐 하고 있나?”
“신축 진료소의 공사를 마치고 건물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건물에 하자가 없는지 판단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외의 시간엔 엘누아르 가문에서 광산 사업을 돕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산 일을 돕고 있다고? 흐음. 그렇군. 알았다. 물러가도록 해라.”
팔을 굽혀 예를 취한 전령이 조용히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폴링이 광산 사업을 돕고 있다고?’
그 자체로는 책망할 수 없었다. 준이 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으니까.
아마 그 연장 선상에서 일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백작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걸렸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시종을 불렀다.
“가서 사이먼 경을 데려와라.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서둘러 오라고 해.”
“명을 받듭니다.”
혹여라도 불똥이 튈까 무서워 시종은 빠른 걸음으로 대공자의 거처로 뛰었다.
사이먼 경은 사우던 가문의 제2기사단장이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망이 높은 제1기사단장 브로그뉴 경과는 달리 정치적인 성향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제2기사단장은 제1기사단장의 바로 아랫자리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그는 언제나 제1기사단장이 되기만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영주의 부름에 응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의 군례는, 적어도 드뇌르 백작의 눈엔 완벽에 가까웠다. 은빛으로 빛나는 플레이트 메일과 붉은 망토가 잘 어울렸다.
백작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게. 자네를 보면 언제나 든든하단 말이야.”
“하하하. 영광입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일어나시게.”
두 사람은 옆쪽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보통은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명을 받는데, 오늘은 의외였다. 게다가 영주는 고급 와인을 준비시켜 사이먼 경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사이먼 경은 직감적으로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저는 오래도록 주군을 모셔 왔습니다. 견습 기사 생활을 포함하면 벌써 20년이 넘었지요. 그렇게나 오래되었는데 모시는 주군의 심기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충이 아닙니까?”
“허허. 자네 나름 달변가였군?”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사이먼이 잔을 받았다. 영주가 건배를 제안했고,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자네는 언제나 나를 믿고 잘 따랐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기사단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를 뽑으라면 자네를 골랐을 거야.”
“말씀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제 목숨은 주군의 것입니다. 언제든 필요할 때 사용하십시오.”
“든든하군. 그래서 말인데.”
백작이 눈을 빛내며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자연스레 사이먼도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자네에게 비밀 임무를 하나 내릴까 하네. 수하들을 따로 붙여 줄 터이니 한번 해 보지 않겠는가?”
“비밀 임무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사이먼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기사로서의 감이라는 게 있는데, 이번 일이 이렇게 말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브로그뉴 경을 제치고 제1기사단장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위험 부담이 커야 돌아오는 몫도 커지는 법!’
전시체제가 아닌 이상, 승진하기 위해서는 정치력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지금이 바로 백작의 눈에 들 절호의 찬스였다.
“하명하십시오!”
“자네는 의외로 기분파로군. 어떤 일인지 묻지도 않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되겠는가?”
“주군의 명이라면 지옥에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드뇌르 백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엘누아르 영지로 가 있게. 거기에서 작전을 하나 수행해 줬으면 좋겠는데.”
“엘누아르 영지라면…… 강준 남작이 다스리는 곳이 아닙니까?”
“그렇다네. 실은 방금 전령에게 보고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엄청난 규모의 금광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금광이요?”
사이먼 경이 흠칫 놀랐다. 철광도 좋은 수입원인데 금광이라면 차원이 다르다. 막대한 부가 따르기 마련이다.
백작의 목소리가 조금 더 신중해졌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줬으면 하네. 들키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해야 할 게야. 혹시 강준 남작이 음흉한 생각을 하는지 말이네. 무슨 말인지 알았나?”
“음흉한 생각이라…… 알겠습니다. 강준 남작의 부정을 조사하란 말씀이시군요. 기회가 되면 금광에 장난질도 좀 치고 말입니다.”
“역시 자네는 말이 잘 통해서 좋단 말이지.”
드뇌르 백작이 잔을 들었다. 비열한 미소를 지은 사이먼 경도 그에 맞춰 잔을 들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실력 좋은 마법사를 붙여 주겠네. 둘이 합심해서 목적을 이루길 바라네.”
“믿어 주십시오. 이번에야말로 주군을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쨍!
고운 소리를 내며 잔이 부딪쳤다.
* * *
다음 날, 누아 마을의 금광이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했다. 그제야 일부만 알고 있던 금광에 대한 비밀이 온 마을로 퍼졌다.
이어 준은 채굴한 금을 누아 마을과 영지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공표했다.
누아 마을 사람들은 겹경사가 났다며 기뻐했다. 금을 생산해 부를 축적한다면 궁벽한 영지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어요. 이렇게 빨리 금광이 발견될 줄은 몰랐거든요.”
서기관직을 잠시 수행하던 아그네스는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속뜻을 파악한 준은 피식 웃었다.
“내가 돈이라도 날릴 줄 알았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요. 금광을 찾다가 빈털터리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켈세타에서 온 견습들이 그러기도 했고.”
“뭐, 아무튼 이번 일은 운이 좋았다.”
“그런데 캐낸 금으로 뭘 하실 생각이에요? 구체적으로요.”
“영지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이다. 기사단도 확충하고, 장비를 강화시키고, 마을도 넓히고, 건물도 새로 올리고, 학교도 세우고. 할 일이야 무궁무진하지.”
아그네스의 얼굴에 미소가 꽃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많아질 거다. 진료소 일과 영지 일을 같이하려면 많이 벅찰 수도 있지만, 믿는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도 영지 일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을 주목했다.
직접 만든 마법공학 기계들이 테이블에 올려 있었다. 준은 그것을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총 스무 개였는데, 사각 금속 틀에 렌즈가 달린 기묘한 장치였다.
아그네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뭐예요?”
“창고에 금괴가 잔뜩 쌓일 테니 분명 날파리들이 꼬이겠지. 침입자를 감지할 수 있는 마법공학 기계다.”
“밤새 그거 만들고 계셨던 거예요?”
“맞아.”
쉽게 말해 CCTV를 응용한 장치였다. 그것을 창고 주변에 설치해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면 경보가 울리게끔 만들었다.
물론 그 경보는 마리에게도 전달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려운 경우 마리가 나서서 진압을 할 것이다.
“다행이네요. 저희 아버지도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지금 자경단 전력으로는 창고를 지킬 만한 여력이 안 된다고. 도적 떼가 몰려온다면 피해가 클 거래요.”
“기사단을 확충하면 문제는 해결되겠지. 이 물건이 그 시간을 벌어 줄 거다.”
“근데 마리 혼자 괜찮을까요?”
“그건 마리를 상대할 사람들에게 묻는 게 좋지 않을까? 통구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아그네스는 납득했다. 최근 마리는 수련을 거듭해 경지가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으니까.
장치를 모두 챙긴 준은 마리를 데리고 금괴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게 잘 계산하여 은밀한 장소에 장치를 모두 설치했다.
“이제 시험해 볼까? 동서남북 방향으로 이동할 거다. 내 움직임이 느껴지는지 확인해 봐.”
“네.”
순간 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 마리가 들고 있던 지팡이의 큐브가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큐브도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회전했다. 마치 준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처럼.
대단히 신기한 일이었지만 마리의 눈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준이 돌아왔다.
“어땠어?”
“제대로 느껴졌어요. 잘 작동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인부들이 오는 경우는 어떻게 해요?”
준은 가방에서 작은 금속조각을 꺼냈다. 준의 마나가 흐르고 있는 금속이었다.
“인부들에게는 이걸 나눠 줄 거다. 경보를 피하는 장치지. 경보가 울리면 인식패가 없는 자들이 들어온 거니 와서 처리하도록 해. 가급적 생포하는 게 좋을 거다. 배후를 캐야 하니까.”
“알겠어요.”
마리는 지팡이를 꼭 쥐며 각오를 다졌다.
준은 다시 창고를 돌아보았다. 숨어 있는 장치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어떤 월척이 낚일까? 상상만 해도 흥미로웠다.
‘예상대로라면 드뇌르 백작이 분명 움직일 거야. 그렇다면…….’
일이 잘 풀린다면 그가 더 이상 영지 일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준이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의 대가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