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마르다에서 온 편지 (2)
보통 진료소나 병원의 규모는 마을이나 도시의 크기에 비례한다.
누아 마을과 켈세타 사이에 위치한 마르다 마을의 진료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아 마을과 비교했을 때 진료소 자체는 더 컸지만, 이제는 흘러간 옛이야기다. 누아 마을에 신축 진료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마르다의 진료소는 알렌 혼자서 책임지고 있었다.
누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외진 지역이었다. 실력 좋은 치유사들은 대개 도시로 몰리기 때문에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음 환자가 마지막이에요. 선생님.”
젊은 견습 치유사가 보고했고, 책상에 앉은 알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견습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알렌이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문제라도?”
“아, 죄송해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진료 보셔도 괜찮으신 거죠?”
“난 괜찮으니 환자나 데려와요.”
“알겠습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마르다 마을의 유일한 치유사였으니까. 가끔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어도 스스로 견뎌 내야 했다.
“정신 차리자. 마지막 환자야. 후우.”
한숨을 내쉰 그는 환자가 들어오기 전에 견습이 남기고 간 차트를 훑었다.
또렷하던 눈빛이 혼탁해졌다. 차트를 확인하면서도 종종 멍해질 때가 있다.
확실히 평소 컨디션이 아니었다.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만 씨. 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디가 편찮으셔서 오셨습니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말입니다. 숨이 차고 좀 어지러워서요. 낮부터 이랬는데…… 후우. 더 심해지는 거 같습니다.”
“그래요?”
하만은 30대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었다. 그런데 허리 위쪽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잠시 멍하던 알렌이 정신을 차렸다.
“일단 좀 진찰을 해 볼까요?”
“예에.”
“상의를 올려 보세요.”
알렌은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를 귀에 꽂았다.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최근 왕도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진료 기구 중 하나였다.
청진기 헤드를 손으로 꼭 쥐며 따뜻하게 데운 알렌이 차트를 다시 확인했다.
“기록을 보니 옛날에도 몇 번 이렇게 답답하신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어떻게 됐습니까?”
“쉬면 좀 나은 편입니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땐 약도 먹고 그랬지요.”
“그럼 숨소리 좀 들어 보겠습니다. 숨을 최대한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청진이 시작됐다. 알렌은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한쪽 폐의 호흡음이 나머지 한쪽에 비해 작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잠시 저쪽으로 누워보시겠어요?”
“알겠습…… 어억!”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으윽!”
환자가 몸을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보조하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견습 치유사들이 달려왔다.
“선생님! 알렌 선생님!”
알렌은 멍하니 환자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견습 치유사들은 환자를 침상으로 옮겼고, 나머지 하나가 알렌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환자분이 의식을 잃으셨잖아요!”
“아아. 그래. 그렇지!”
마르다 진료소의 견습들은 솜씨가 좋았다. 이런 응급 상황을 많이 경험했는지 능숙하게 환자의 옷을 잘라내고 치료가 가능한 상황을 확보했다. 굉장히 빠른 시간에.
정신을 차린 알렌도 바쁘게 움직였다.
침상 옆에 선 그는 마나를 일으켜 호흡음이 약했던 우측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여긴가? 으음. 아니야.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는데. 대체 어디지?”
하지만 원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멍하니 있다가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꼬이고 있었다.
지켜보던 견습 치유사들이 조급해졌다.
“선생님! 환자분 청색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심박도 이상합니다! 이대로는…….”
“알고 있어!”
알렌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고, 안면과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혈류에 문제가 있다면, 심장인가?”
머뭇거리던 알렌이 손을 심장으로 옮기려고 하던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꽉.
“심장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흉일 겁니다.”
“기흉? 아!”
그제야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간단한 걸 생각해 내지 못하다니. 알렌은 깊은 자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상했다. 누군데 환자의 겉모습만 보고 병명을 맞춘 걸까?
적어도 진료소 내부의 인력은 아니었다. 알렌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강준 선생님!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지금은 한가롭게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닌 거 같군요. 곧 심정지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서 치료를 하셔야지요.”
“예.”
알렌은 바늘을 가져다 달라고 외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준의 손에 굵은 바늘이 들려 있었다. 알렌은 그것을 받아 들고 늑간을 찔렀다.
솜씨가 제법 괜찮았다. 어리바리하지 않고 한 번에 정확히 흉막을 뚫었다.
쉬익!
공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알렌은 즉시 마나를 일으켜 병변을 확인했다. 기흉은 손상된 폐 조직에서 흘러나온 공기가 흉막강 내에 차올라 폐를 압박하는 질환이다. 때문에 손상된 부분을 빠르게 치료해 줄 필요가 있었다.
“찾았습니다!”
다행히 알렌은 바로 손상된 조직을 찾은 모양이었다. 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 알렌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의 안색이 돌아왔다. 불규칙하던 심박과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안정세로 접어들었음에도 알렌은 꼼꼼히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조금 있으면 의식이 돌아올 것 같습니다. 고비는 넘겼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또…….”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알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뒷말을 짐작해보니 아무래도 발작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준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잘하셨습니다. 멋진 솜씨였어요.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프리드 씨의 일은 유감입니다.”
알렌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진료는 끝나셨습니까? 밖에는 더 이상 환자가 없는 것 같던데.”
“예. 하만 씨가 마지막 환자였지요.”
“그럼 자리를 좀 옮기실까요?”
환자를 견습 치유사들에게 맡긴 알렌이 앞장서 준을 안내했다.
목적지는 자신의 방이었다.
성공한 젊은이치곤 소탈한 성격이었는지 깔끔한 느낌의 작은 방을 소유하고 있었다. 책 몇 권과 테이블, 그리고 옷장과 침대가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하십니까?”
“예. 따로 주택은 없습니다. 오가는 게 귀찮아서 그냥 진료소에 거처를 마련했네요.”
“저랑 비슷하시군요.”
그 말에 알렌은 깜짝 놀랐다.
이처럼 대단한 사람이 진료소에서 생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근사한 저택이 하나 있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도요? 아! 실례했습니다. 엘누아르의 영주가 되셨다는 소식은 전에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영주라는 호칭은 괜찮습니다. 동료끼리 격식을 갖출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제야 알렌이 미소를 지었다.
몇 달 전 마을에 던전이 생겼던 그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준이 동료라는 표현으로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알렌 선생께서 보낸 편지를 보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걱정이 돼서요. 환자를 떠나보낸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요.”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떤 부분이?”
“아뇨. 그게……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단 말씀입니까?”
“다른 일은 없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러 온 겁니다.”
알렌은 한껏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준이 바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먼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올 줄이야.
“이런. 내 정신 좀 봐. 멀리서 오셨는데 마실 것도 내드리지 못했네요.”
“저건 어떻습니까? 맛있어 보이는데.”
“아, 제대로 보셨습니다. 아껴 마시려던 거였는데 오늘 같은 날에 마시면 딱이겠군요.”
알렌은 책장 한쪽에 놓인 술병을 기꺼이 꺼냈다. 그리고 안줏거리를 가져올 겸 환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다시 올라온 그는 한결 짐을 덜어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환자는 어떻습니까?”
“의식을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일단 오늘은 입원시키고 내일 다시 진찰하기로 했습니다. 특별히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고 했는데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네요.”
“마르다에 있는 치유사는 알렌 선생님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술은 목을 축이는 정도로만 하지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위급 상황에 빠졌던 환자가 입원을 했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남자들은 술을 홀짝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준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알렌을 격려했다. 치유사로서의 경력은 일천하지만, 신의 대리인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무궁무진했다.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오히려 치유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관계가 적은 이야기를 하며 부담을 줄였다.
알렌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의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졌을 때는, 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중요한 건 경험이군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네요.”
“물론이죠. 특히 치유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역병이 도는 곳, 전쟁터 가릴 거 없이 정신없이 환자를 대하다 보면 실력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지요.”
“부럽습니다. 그런 삶이.”
“하지만 중요한 건 자신의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삶도 중요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게 필요할 겁니다.”
현실적인 조언에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좋네요. 일방적으로 달려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더욱 믿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치유사도 사람이니까요. 때로는 즐기고 놀 줄도 알아야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즐기십니까? 듣기로는 굉장히 정적이라고 하던데요. 연회도 즐기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술을 마시거나 연회에 참가하는 것만이 노는 게 아니지요. 저는 오래도록 힘들게 일을 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저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것도 저에겐 즐거운 일이죠.”
“하하하. 어쩐지 은퇴한 삶을 사시는 것 같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술이 반병 정도 남았다. 알렌은 지체없이 뚜껑을 막았다. 이 정도면 기분 좋을 정도로 마셨다.
“혹시 숙소를 정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누아로 돌아가야 해서 딱히 숙소를 잡진 않았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잠시 제 방에서 쉬고 계세요. 입원한 환자들을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시간이 돼서요.”
“얼마든지요.”
환하게 웃은 알렌이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미소를 보니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더 늦으면 루치아에게 추가 수당을 지불해야 하니까.”
준은 책상에 앉아 종이를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상의하라는 말과 인사도 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같이 일해 봅시다. 알렌 선생.”
준은 다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갈 무렵, 전령이 켈세타에 진입했다. 엘누아르에서 엄청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