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마르다에서 온 편지 (1)
아그네스가 마나 유저가 되었다는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진료소는 물론, 누아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일인데 마리에 이어 또 다른 마나 유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아그네스가 마나를 쓸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났다는 건 준과 그녀의 할아버지인 아론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녀의 재능이 뒤늦게 꽃피웠다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당연히 하룬은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하나 봐요. 의심하는 사람이 없네요. 봐요. 다들 축하해 주기 바쁘잖아요?”
루치아가 웃으며 말했다.
진료소는 그야말로 마비 상태였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각성을 축하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치유의 여신 엘레나가 축복을 내린 거라고 말했다. 언제나 성심성의껏 마을 사람들을 돌본 아그네스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나아가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하라는 신의 계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그런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그네스가 누아 마을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 앞으로 열심히 해서 더 훌륭한 치유사가 될게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그네스는 사방에 꾸벅 인사를 하며 각오를 다졌다.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눈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이제 준 선생님 대신 네게 치료를 받으마.”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아그네스는 우리 모두의 딸이기도 하니까 말이오. 안 그렇소?”
“그렇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때 하룬이 준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런 모습 신선하지 않습니까?”
“여기가 아니라면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임은 분명해. 나도 많은 경험을 했지만 신선하구나. 마치 모두가 가족인 것 같은 느낌이야.”
준은 솔직히 감상을 말했다. 신의 대리인 시절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이런 소소한 경험은 해 보지 못했다.
“저 녀석 태어났을 때 마을에 축제가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때마침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나 뭐라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저는 찬밥 신세였죠. 그놈의 별똥별이 뭐라고.”
“하하하. 질투하는 건가?”
“그냥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옛날 일은 잘 모르실 거 같아서.”
“그건 그렇지.”
“아무튼 네아는 어려서부터 무척 귀여웠대요. 그래서 마을 주민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죠. 외모가 전부인 더러운 세상.”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은데?”
준의 반문에 하룬이 살짝 놀랐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말입니까?”
“외모 말고. 꽤 개구쟁이였을 것 같아서. 왜 마을에 꼭 그런 애들 있잖아. 사고치고 다니는 애들 말이지.”
사실인 모양인지 하룬은 헛기침을 하며 대강 얼버무렸다. 몇몇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 게 분명했다. 볼이 살짝 익었다.
“표현은 하지 않아도 다들 널 아끼고 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언제 마나 유저로 만들어 주실 겁니까?”
“너 하는 거 보고.”
“잘하겠슴다.”
“하하하하.”
준은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부하 한 명 없이 늘 혼자서 일을 처리해 왔는데, 하룬 같은 부관 하나가 있다면 적어도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진료가 멈추었지만, 위중한 환자들이 없었기에 다른 환자들도 이해하고 함께 어울려 주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마음에 걸렸는지 자리를 빨리 정리했다.
켈세타에서 파견 나온 수습들이 나서서 자리를 정리했다면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그네스가 직접 나서니 오히려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우리가 괜히 방해만 한 거 같구만. 자! 다들 돌아갑시다. 우리 선생님 진료 방해하면 안 되지.”
“봄도 오고 했으니, 기념으로 축제나 한번 열어 보는 건 어떤가?”
“그거 좋은데? 가서 촌장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자구.”
“지금 바로 가 보세!”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우르르 진료소를 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시끄러웠죠? 선생님들께 피해를 드린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한숨을 내쉰 아그네스가 죄송하다며 꾸벅 인사했다. 루치아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죄송하다고 그래? 축하받아 마땅한 일인데. 환자분들도 이해해 주셨고.”
“그래도요.”
“정 미안한 거 같으면 다음에 대진 좀 해 주든가. 호호호.”
손을 흔들어 보인 루치아가 진료실로 사라졌다. 과연 진료소의 마녀다운 제안이었다. 피식 웃은 준이 아그네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마나를 다루는 건 좀 어때?”
“아직 어색하긴 한데, 처음보단 많이 좋아졌어요. 식물 말고 인체로 실험을 좀 해 봐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아그네스의 시선이 하룬을 향했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하룬이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은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도움이 될 만한 책 같은 게 있을까요?”
“책보다 좋은 교재가 많지. 시간이 될 때 너희 할아버지께 찾아가 보거라. 왕년에 꽤 유명한 마법사였다고 들었거든.”
“하지만 할아버지는 치유 마법은 잘 모르실 텐데요.”
“마나를 다루는 원리는 공격 마법이나 치유 마법이나 다 똑같다. 지금은 뭐든 배우는 게 좋으니까 한번 말씀드려 봐.”
“알겠습니다.”
준이 돌아서려 할 때 뭔가를 떠올린 아그네스가 그를 붙잡았다.
“근데요, 선생님. 볼카누스 씨는 이제 안 오시는 건가요? 소식이 너무 오랫동안 없으셔서 좀 걱정돼요.”
“조만간 찾아올 거야. 병은 다 나았으니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준은 진료실로 돌아갔다.
처음 카이엔과 약조한 20주의 시간이 거의 임박해 있었다. 특별한 문제가 생겨 차원 여행이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돌아올 것이다.
준은 의자에 편히 몸을 묻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20주까지 2주일 정도 남았나? 한바탕 또 시끄러워지겠군. 크게 부딪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확실히 볼카누스는 처음 카이엔을 만났을 때보다 적대감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동거의 효과가 그만큼 컸다.
그런데 문제는 카이엔이었다.
흑마력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카이엔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족 고유의 권세가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볼카누스에게 가족을 만나고 오라고 제안했을 때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를 생각하면 적에 대한 마지막 자비를 베푼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쉽게 말해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 내서 한번 찾아가 봐야겠군. 슬슬 약초 채집용 던전에 대한 이야기도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일을 정리한 준은 진료를 시작하려 견습 치유사를 불렀다.
“환자 들여보내세요.”
“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환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뒤늦게 견습 치유사는 환자 대신 편지를 하나 들고 왔다.
“선생님. 환자분은 안 계시고 편지가 하나 왔어요.”
“무슨 편지입니까?”
“마르다 마을의 진료소에서 온 편지인데요. 알렌이라는 분이 보낸 편지인 것 같아요.”
“알렌.”
잠시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마르다 마을의 치유사였다는 사실과, 던전에서 부상당한 탐사대원의 심장압전을 진단하지 못했던 그때의 일이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마을을 떠나기 전에 간질 발작 환자를 치료해 보겠다고 했었지. 좋은 소식이 온 건가?’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편지를 받은 준은 즉시 뜯어 내용을 살폈다.
편지는 흔한 안부로 시작됐다. 마르다 마을에서도 폭설 피해가 있었는지, 그 일에 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읽어 내려가던 준.
그런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한 문장에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사라지고 말았다.
‘프리드 씨가…… 사망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환자는 아니었지만 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월영초를 나눠 주기도 했었다. 지금쯤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월영초가 효과가 없었던 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 인사말까지 다 읽은 준은 현재 알렌이 무슨 상태에 놓였는지 결론을 내렸다.
‘환자의 사망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군.’
흔히 있는 일이었다.
치유사도 사람인지라 감정 이입이 되는 환자가 있다. 특히 오래도록 치료해 온 환자가 사망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상상할 수도 없다.
프리드는 마르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알렌이 부임할 때부터 계속 치료해 왔던 환자라고 들었었다.
아마 상실감은 일반적인 상황보다 더욱 클 것이다.
‘환자의 사망은 치유사가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긴 하지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게 할 수 없었다. 견습 치유사가 들어와선 환자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준은 잠시 생각을 미룬 채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 * *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진료가 모두 끝났지만, 준은 진료실 한쪽에 서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이 굉장히 깊어 보였다.
그때 폴링이 안으로 들어왔다.
인기척이 들렸지만 준은 전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폴링은 점잖게 다시 밖으로 나가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아닙니다. 앉으시죠.”
꾸벅 인사한 폴링은 가져온 서류를 준에게 넘겼다.
“서기관께서 바쁘신 것 같아 바로 전달 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금광의 채굴 준비 작업이 모두 끝났습니다. 금광석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의 건축도 완료됐지요.”
“좋군요.”
“한 가지 걱정되는 사안이 있습니다만.”
준은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폴링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니 꽤 큰 문제인 것 같았다.
“채굴된 금광석을 보관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이런 기사단장님과 의논해 봤는데, 현재 기사단 규모로는 그곳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 같더군요. 그렇다고 용병을 쓰는 건 여러모로 믿기가 어렵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지적이군요. 하지만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마리에게 일임할 생각입니다.”
“마리 사무장이요? 아!”
그제야 폴링이 준의 의도를 깨달았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리는 수준급의 마력을 보유한 마법사였다. 마법을 이용한다면 문제가 없을 터다.
“그리고 몇 가지 마법공학 도구를 이용해서 경계를 강화할 겁니다. 렌즈를 이용하면 창고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장치도 만들 수 있지요.”
“대단하군요! 그거라면 문제없겠습니다.”
“백작께는 보고가 들어갔습니까?”
“예. 어제 전령을 보냈으니 빠르면 내일쯤 소식이 켈세타 성에 도달할 겁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궁금했다. 과연 엘누아르 영지에서 엄청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주께서 공물을 요구하시겠지요?”
“물론입니다. 봉토를 받은 사우던 가문의 가신들은 모두 세금에 비례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예외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나마 세금에 비례해서 한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예전 바스티엔 대공자를 치료하고 세금 감면 혜택을 받고 있었으니까. 공물도 5할 정도 덜 내면 된다.
서류 검토를 마친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용대로 일을 진행해 주시면 될 거 같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녁 준비가 한창인 것 같습니다만.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더군요.”
“외출을 좀 해야 해서.”
“아, 그러시군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녁은 다음에 같이 하시지요.”
미소를 지은 폴링이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준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그리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