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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92화 (92/175)

92화 치유 마법의 원리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준의 마나는 아그네스의 내부를 생생히 탐색했다.

심장에 마나 서클을 심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실 마나 서클을 심는 것 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다. 고도로 응축된 마나를 심으면 그만이니까.

가장 어려운 것은 마나 서클로부터 발현되는 마나를 온몸에 흐르게 하는 것이다. 적어도 혈도를 타고 손까지 마나가 전해져야 뭐라도 해 볼 수 있으니.

‘먼저 혈도를 살펴봐야겠어. 큰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준은 마나를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아그네스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파?”

“아뇨. 아프진 않은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에요.”

“강한 마나가 빨리 흘러서 느껴지는 감각이다. 그에 대한 거부 반응이니 괜찮아. 참아라.”

준은 멈췄던 마나의 흐름을 다시 일으켰다. 아그네스는 기묘한 기분을 잘 참았다. 그렇게 마나가 몸을 일주천했고, 준은 결론을 얻었다.

썩 좋은 결론은 아니었다.

‘마나를 받아들이기 좋은 몸은 아니군. 막혀 있는 혈도가 너무 많아.’

어느 정도 예상은 하던 일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제법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런데 손녀인 그녀에게 마법적인 재능이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이대로는 마나 서클을 심장에 심는다고 해도 제대로 마나가 발현되지 않을 것이다. 길이 막혀 있으니 통증만 느낄 게 분명했다.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막힌 혈도부터 풀고 서클을 심어야겠어. 방법은?’

고민을 끝낸 준이 손을 뻗었다. 아그네스가 눈을 감고 있었기에 슬쩍 아공간 창고에서 죽통을 꺼냈다.

먼 옛날 북해빙궁에 잠시 머물 때, 그곳의 궁주인 빙설화에게 선물 받은 침통이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져 있는 침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마나를 흡수하고 증폭시키는 것에 가장 좋은 재료 중 하나였다.

“아그네스. 잠시 일어나 봐.”

“예? 무슨 문제라도…….”

아그네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준의 손으로 향했다. 그 손엔 예리하게 빛나는 장침이 들려 있었다.

“사소한 문제가 생겼는데.”

“어떤 문제요? 혹시 그 바늘하고 관련이 있는 건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몸은 마나 유저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

“아…… 그럼 안 되는 건가요?”

“실망할 것 없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간단히 말해 마나가 흐르는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인데, 이 침으로 그 길을 뚫을 생각이다.”

“아프겠죠?”

“꽤.”

준은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다. 그가 꽤 아프다고 한다면, 정말 아픈 것이리라.

하지만 아그네스는 죽기까지 각오하고 여기에 온 것이었다.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전 괜찮으니까 해 주세요.”

“그럼 일단 옷을 벗어라.”

“전부……요?”

“아니. 속옷 정도는 입어도 돼.”

다 벗어야 하는 상황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아그네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엄청 아픈 게 낫지, 속살을 보이는 건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의 앞에서 말이다.

물론 준은 그녀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냥 마음 편히 진료를 받는다고 생각해. 스캐너 검사 정도가 적당하겠군. 환자들이 벗고 검사를 하는 모습 많이 봐 왔잖아.”

“알았어요. 대신 하룬이 못 보게 해 주세요.”

“그러지.”

준이 손을 휘젓자 뒤쪽으로 검은 장막이 펼쳐졌다. 안에선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막이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아그네스가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준의 말처럼 진료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보다 쉽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언젠가 혹시 아프게 되면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잠시 후, 겉옷을 전부 벗은 그녀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차마 준과 눈을 마주치지 못해 그냥 꾹 감았다.

물론 준은 그녀의 모습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죽통에서 침을 잔뜩 꺼낼 뿐.

정확히 17개의 침을 꺼내 든 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그네스의 몸에 하나씩 꽂기 시작했다.

“통증은?”

“따끔한데 괜찮아요.”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침을 모조리 아그네스의 몸에 꽂았다. 문제가 되는 부분만 정확히 찌른 엄청난 침술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두 손을 뻗고 장침을 향해 마나를 흘렸다. 꽂힌 침이 파르르 떨더니, 흘러나온 마나를 무서운 속도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윽!”

엄청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이어 짜릿한 전류가 그녀의 몸을 자극했다. 몸이 의지와는 달리 벌벌 떨렸다. 까무러칠 뻔했지만, 아그네스는 이를 꽉 깨물며 버텼다.

툭, 투두둑!

준의 귀로 막힌 혈도가 뚫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아그네스가 정신을 잃지 않고 버텨 준 덕에 준은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됐다.”

시술이 끝났다.

준이 손에서 마나가 사라졌고, 그가 손을 거뒀다. 동시에 아그네스의 몸도 안정을 되찾았다.

“잘 견뎌 줬구나. 괜찮나?”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구요…… 뭐가 뭔지 모르니 더 무섭기도 하고. 환자분들이 검사를 받을 때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아요. 앞으로는 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해 드려야겠어요.”

“하하하하. 좋은 경험이었군.”

준이 침을 모두 거뒀다. 일단 더 이상 침술은 필요 없기에 천으로 아그네스의 몸을 덮어 주었다.

다시 손목을 쥐고 마나를 흘렸다.

아까처럼 강한 마나를 빠르게 쏟아 냈다. 그 와중에 준은 아그네스의 표정을 살폈다.

“이상한 느낌이 느껴지나?”

“음. 조금 느껴지긴 하는데 아까보다는 훨씬 괜찮은 거 같아요.”

“좋아. 막힌 곳이 잘 뚫린 것 같군.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네 심장에 마나 서클을 만들 거야. 마나 서클은 온몸에 마나를 공급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지. 굉장히 중요하다.”

“얼마나 아픈지 여쭤봐도 돼요?”

“하나도 안 아플 거다. 하룬 녀석도 숨소리도 내지 않을 정도로.”

“그래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기절할 테니까.”

아그네스는 뭐라 반문을 하려다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체념한 듯 눈을 감았고, 준은 두 손을 아그네스의 가슴 한가운데에 겹치게 놓았다.

“마음을 편히 가라앉혀. 잔잔한 호수처럼. 너의 마음가짐이 네 마력의 수준을 결정할 거다.”

아그네스는 마음을 다스렸다. 마음가짐에 따라 마력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말 자체를 버렸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파앗!

순간, 엄청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 * *

“……어라?”

눈을 뜬 아그네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차가운 동굴 바닥이 아닌, 푹신한 침대였다.

아그네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풍경. 이곳은 분명 누아의 진료소였다. 정확히는 신관의 입원실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응? 잠깐. 이건…….”

아그네스는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살아있는 게 간질이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신선한 기운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이게…… 마나인가?”

아그네스는 손바닥을 폈다. 마나를 일으키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이 모시던 선생님들처럼 하얗게 빛나진 않았다.

한숨을 쉰 아그네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려가서 준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어떻게 됐는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어났군.”

때마침 준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의 손엔 시들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기분은 어때?”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뭔가가 꿈틀거리는 거 같아요. 의식은 성공한 건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공이다. 그 불안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아주 잘 다스렸더구나. 굉장히 높은 마나가 네 심장에 모였다.”

“어느 정도인데요?”

“중급 치유사들에게 꿇리지 않을 정도.”

아그네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십 년을 수련해야 중급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대단한 성과였다.

“축하한다.”

가까이 다가온 준이 시든 꽃을 내밀었다. 이게 뭘까 싶었지만 아그네스는 일단 그것을 받았다.

“설마 시든 꽃을 축하선물로 주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예전에 그 일 기억하지? 마리가 각성하던 그때.”

“각성하던 그때요?”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아그네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와 자경단원들이 몰려들 정도로 강한 빛의 폭발이 있었던 그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준이 원하는 건 바로 그 직전의 상황이었다.

“아, 맞아요. 그때 마리가 시든 꽃을 치료해 달라고 했었죠?”

“그래. 사실 시든 식물을 되살리는 건 아주 기본적인 단계의 치유 마법이다. 특별한 주문이 필요 없을 정도지. 그냥 그 꽃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하거든.”

그렇게 설명한 준이 손을 내밀며 한번 해 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이걸 주신 거군요. 살짝 서운할 뻔했는데 다행이에요.”

아그네스가 시든 꽃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으로 줄기를 꼭 쥐었다. 일단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든 꽃을 연민하는 마음과 함께 활짝 핀 모습을 상상했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손에서 부드러운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 선생님!”

“쉿. 하던 일에 집중해.”

고개를 끄덕인 아그네스가 다시 시든 꽃을 주목했다.

살리고 싶어.

살려야 해.

주문을 외우듯,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그네스의 손에서 하얀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연약한 빛이지만, 꽃을 살리고 싶다는 아그네스의 마음이 담긴 건강한 마법이다.

치유 마법이 시든 꽃을 한 바퀴 돌며 감쌌다. 꽃은 양분을 흡수하듯 치유 마법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원래의 빛깔을 되찾았다.

시들었던 꽃이 만개했다. 마치 갓 피어난 것처럼.

아그네스의 표정도 활짝 폈다.

“제가 해냈어요!”

“그래. 잘했다. 그게 바로 치유 마법이다.”

아그네스는 꽃을 가슴에 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야 마나로 치유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준은 흐뭇한 표정으로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가르쳐 줘야 할 게 하나 남았다.

“그 꽃을 되살릴 때 어떻게 했지?”

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그네스는 눈물을 훔치며 당당히 대답했다.

“이 꽃이 싱싱해지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그거다.”

“예?”

아그네스는 준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준은 자신을 내려다본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치유 마법은 마나를 근원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치유 마법의 핵심은 바로 환자에 대한 연민과 치료하겠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지. 네가 지금 이 꽃을 활짝 피게 한 것처럼.”

아그네스가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준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잊지 않을게요.”

“그래.”

가르치는 보람이란 이런 걸까. 준은 기특한 마음에 아그네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때 정신을 퍼뜩 차린 아그네스가 물었다.

“맞다! 선생님. 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예요?”

“일주일.”

“설마요. 농담이시죠?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 주세요.”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꺄아!”

뜬금없이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싸 쥔 아그네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왜?”

“윈스턴 씨 화상 당한 거 봐 드려야 하는데! 그뿐이 아녜요. 아이린 아주머니 허리 아프신 것도 검사를 한번 해 보려고 했거든요! 단순한 요통이 아닌 거 같아서요.”

“하하하하.”

준은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까.

“네 환자들은 루치아 선생이 대신 진료했어. 윈스턴 씨는 깨끗하게 나으셨고, 아이린 씨도 별 이상이 없어서 약만 타 가셨지. 다른 환자들도 문제없었고.”

“정말요?”

“그래도 내려가서 인사 정도는 해. 요 며칠 환자가 꽤 많았거든.”

“다녀오겠습니다!”

아그네스가 정신없이 진료실을 뛰어나갔다.

따라 나가려던 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테이블 위에 꽃이 놓여 있었다. 아그네스가 치유 마법으로 되살린 그 꽃이었다.

준은 꽃을 코로 가져갔다. 싱그러운 봄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기념으로 삼아도 괜찮겠지?”

준은 꽃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평소와는 차원이 다른 마나가 사용된, 최상급의 보존 마법이었다. 아마 아그네스가 눈을 감기 전까지 이 꽃이 시들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책상 위에 꽃을 내려놓고 준도 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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