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신성한 의식
“왕도로?”
뜻밖의 제안이었다.
루치아는 무언가를 하자고 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은근히 부추기는 면이 없잖아 있어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준이 물었다.
“왕도엔 왜?”
“바람 쐬러요. 시골에만 갇혀 있었더니 갑갑하기도 하고. 왕도의 새로운 문물을 구경해야죠?”
“전직 전령이 구경할 게 더 있던가?”
“인간이 된 이후로는 모든 게 처음이니까요. 뭔가 색다르지 않겠어요?”
준은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그것은 자신도 느끼던 바였다. 신의 대리인 자리에서 은퇴하고 난 지금의 삶도 평범하지만 하나같이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녀오는 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것도 아니고. 치유사가 갑자기 둘이나 빠지면 곤란할 텐데?”
“아그네스도 이제 정식 치유사가 됐고, 곧 마나까지 다룰 줄 알게 된다면 혼자서도 잘해 낼 거예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우리가 늘 진료소에 있으니 자꾸 의지하게 되잖아요. 이 기회에 오래 자리를 비워서 독립심을 키워 주는 거죠.”
“흐음.”
좋은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진료소에 있기 때문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은 나름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준은 아그네스가 궁지에 몰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그네스가 마나 유저가 된 이후에 좀 지켜볼 시간이 필요해. 마나를 다루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왕도행은 좀 천천히 생각해 보자.”
“제자 사랑은 못 말린다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예전에 받은 초대장, 아직 유효해요? 그 뭐냐, 누구 후작한테 받았다고 하지 않았었어요?”
페르디낭 후작에게 받은 왕립학술원 초청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효기간은 끝났지. 하지만 언제 찾아가도 환대받을 수 있을 거다. 나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를 보였으니까.”
“잘됐네요. 왕도 관광도 하고, 상류층 문화도 한번 경험해 보고.”
“릴리처럼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루치아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녀가 웃자 준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퀘스트를 위해 함께 움직였다. 어디를 같이 간다고 해도 물리쳐야 하는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낭만이나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와의 여행은 꽤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그날 저녁, 준은 바이런을 찾아갔다.
엘누아르 가문의 기사단은 예전 자경단 본부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구성원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편이 좋았다.
바뀐 것은 엘누아르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이 걸려 있다는 것뿐이었다.
상징물은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잘 알려진 카두세우스(Caduceus)였다.
두 마리의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올라가고, 상단 부분에 날개가 달려 있는 형상이었다. 루치아가 추천해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다.
준은 기사단 본부로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기사단 규모를 키우려면 건물을 증축해야겠어. 이걸로는 겨울을 나기도 어려워 보이는군.’
모든 것이 갑작스레 변한 탓이다.
신축 진료소 공사가 모두 끝났으니 역량을 이쪽으로 집중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료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기사단이니까.
진료소가 영지의 건강을 책임진다면 이곳 기사단이 영지의 치안을 책임질 것이다.
‘그만큼 많이 투자할 필요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드물지만 준은 재정이 허락하는 한 기사단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오오오!”
그때, 기사단원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준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원들이 모여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훈련용 목검을 들고 대련을 펼치는 단원들도 있었다.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기강이 잘 유지되고 있어.’
기사단으로 승격되기 전부터 바이런이 기강과 질서에 신경을 많이 쓴 덕이었다. 괜히 단원들이 몰려들까 몰래 훑어본 준이 돌아섰다.
“주군!”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하룬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기사다운 멋은 없었지만 개구쟁이 같은 그 모습이 좋았다.
“주군께서 오셨다!”
하룬의 외침 덕에 훈련을 하던 기사단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준에게 군례를 취했다.
일이 커졌다. 준은 손으로 다른 단원들을 물리고 하룬만 남겼다.
“훈련은 할 만하나?”
“아뇨.”
“하하하. 지나치게 솔직한데?”
“차라리 겨울일 때가 좋았어요. 아주 죽을 맛입니다. 훈련량이 뻥 안 치고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아요. 혹시 전쟁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나는 기사단 훈련에 관여하지 않아.”
“아쉽네요.”
“아무튼 반가운 소식이군. 너희들이 흘린 땀만큼 우리 영지가 보다 안전해질 테니까.”
예전의 하룬이었다면 더 칭얼거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마을이 아니라 영지라는 보다 큰 것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보람도 클 것이다.
“그런데 진료소에 새로운 사람이 왔다면서요? 엘누아르 가문의 시종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하룬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만약 새로 온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질문 자체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예쁘거나 귀엽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
“그래. 예전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돼서 불러들였다.”
“몇 살입니까?”
“너보다 두 살 어리지. 마리와 동갑이고.”
“애인 있대요?”
“글쎄. 그런 건 직접 물어봐라.”
“진료소에 갈 시간이 없으니까 이렇게 여쭤보는 거 아닙니까? 매정하시네. 주군께서 평민이셨던 그때가 그리워지네요. 역시 사람은 변하는 걸까요? 권력은 무섭습니다.”
너스레는 여전했다. 피식 웃은 준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곤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주군!”
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본부에 긴장이 감돌았다.
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군례를 취했다. 상석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던 바이런도 재빨리 일어났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좀 상의할 문제가 있어서 왔습니다. 잠깐 괜찮으십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바이런은 내심 긴장했다. 준은 늘 알아서 잘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가 무언가를 상의한다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혹시 광산 사업이 틀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만약 눈속임을 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드뇌르 백작이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군대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이 된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지금 기사단 전력으로는 백작의 군대를 막을 수 없다.
물론 준이나 루치아가 나선다면 그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애석하게도 바이런은 그 두 존재의 진짜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두 사람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임시로 만든 곳이라 좁고 불편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준이 먼저 앉자 그제야 바이런이 착석했다.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그네스에 관한 일입니다.”
“아그네스요?”
뜻밖의 문제였다.
당연히 영지에 관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혹시 아그네스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치유사가 됐다고 들떠 있어서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따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시군요.”
“그야 그럴 수밖에요. 이제 성인이 됐다곤 해도 제 눈에는 어린아이일 뿐이니 말입니다.”
부모 없이 자라고, 또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었던 준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여 존중해 주었다.
“아그네스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그건 비단 치유술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과 관계된 일에서 재능을 발휘하죠. 친화력이라고 할까요. 혹은 매력이 될 수도 있겠고.”
극찬에 가까운 말에 바이런의 긴장이 풀렸다. 아마 좋은 일로 자신을 찾아온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그네스가 가진 선천적인 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선천적인 한계요? 어디 아프기라도 하단 말입니까?”
준은 웃으며 오른손을 펼쳤다. 새하얀 신성력이 맺히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빛이었다.
그제야 바이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요!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게 문제가 되지요. 딸애도 늘 아쉬워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문제까지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아쉬운 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 부분을 해결해 주려고 합니다. 제가.”
“예?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어떻게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아그네스를 마나 유저로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경험이 풍부한 바이런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마법을 전수하는 것은 가능해도, 마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준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본인에게는 동의를 받았습니다. 곧 보름달이 떠오를 텐데, 마나 농도가 가장 짙은 그날에 일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정녕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제가 단장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당당한 눈빛에 바이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준은 거짓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실없이 허풍을 떠는 사람도 아니었다.
“부작용이나 그런 건 없습니까? 만약 그 일이 실패한다든지 하는 가능성이…….”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어.”
바이런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고민이 길어졌다. 하나뿐인 딸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기에.
사실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불충이자 결례였다. 엘누아르 가문에 충성을 바치는 가신으로서 해야 할 자세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준은 그가 선택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으음. 좋습니다. 딸애의 선택을 믿겠습니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의외인데요?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그건 주군에 대한 불충이지요.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걱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딸애는 주군을 저보다 오래 가까이서 모셨지요. 아마 잘 판단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믿음, 감사히 받지요.”
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사단 본부를 나섰다.
그리고 며칠 후, 밤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세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준과 아그네스, 그리고 하룬이었다.
* * *
하룬은 미리 준비한 장작으로 모닥불을 폈다. 따뜻한 빛이 동굴로 퍼졌다.
“오래 걸립니까?”
“그건 알 수 없다. 아그네스가 어떻게 해 주느냐에 따라 다르지.”
“신기하네요. 마나를 느끼게 할 수 있다니…… 혹시 그럼 저도 주군께서 도와주시면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는 겁니까?”
“물론.”
준은 하룬의 두 눈에 서린 열망을 읽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때가 아니다. 수련을 하다 보면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을 거다. 그때가 되면 도와주마. 검기를 뿌릴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소드마스터인 건 아니거든.”
“옙. 주군.”
하룬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아그네스 때문이었다. 친구인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치유사가 되었다. 그래서 얻는 보상이니, 자신도 그에 걸맞는 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전 이제 뭐 하고 있을까요?”
“밖을 지켜라.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알겠습니다.”
하룬이 동굴을 나섰다. 폭포가 있는 곳이라 누가 들어올 일은 없지만 하룬이 도와준다면 든든했다.
동굴 안엔 준과 아그네스만 남았다.
“이쪽으로 누워라.”
긴장한 아그네스가 자리 위로 누웠다. 준이 그 곁에 앉아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많이 아파요?”
“너라면 잘 참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시작한다. 눈 감고 마음 편히 먹어라.”
아그네스가 눈을 감았다. 준도 눈을 감고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동시에 손에서 발산된 마나가 아그네스의 손목으로 흘러들었다.
의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