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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90화 (90/175)

90화 릴리의 전성시대

아그네스의 의지를 확인한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난관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아그네스의 아버지인 바이런을 설득하는 것.

몰래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마나 유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었다. 아그네스의 몸에 손을 대기 전에 바이런에게 허락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좋아. 그럼 마나 유저로 만들어 주마.”

“야호!”

아그네스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닫곤 정색했다.

“혹시…… 저 놀리는 건 아니죠? 치유사가 된 기념으로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죠?”

“그럴 시간이 있었다면 환자를 한 명 더 받았겠지.”

“휴우.”

아그네스는 안도했다. 준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분명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 방법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마나를 느끼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비밀이다.”

“비밀이라고 치고 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다 마나 유저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선생님은 대체 정체가 뭐예요?”

일반인을 마나 유저로 만든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그네스가 정답을 맞혔다.

“나는 누아 마을의 치유사다. 이렇게 말씀하시려고 했죠?”

“하하하. 혼자 잘 노는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야 정해져 있으니까요. 이번 기회에 레퍼토리를 좀 바꿔 보시는 건 어때요?”

“됐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슬슬 시간이 된 거 같은데.”

“좋죠.”

아그네스는 준과 함께 구관을 나섰다.

견습 시절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나란히 건물을 나서니 왠지 동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치유사 시험의 결과는 아그네스의 인생을 하나둘 바꿔 놓고 있었다.

* * *

「적당한 곳을 찾았어요!」

늦은 밤, 릴리가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 그녀는 반짝이는 날개를 팔락이며 창문을 통해 준의 방으로 들어왔다.

준이 잔소리했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뭐 어때요. 마법사 천지인 곳인데. 마법 연습을 한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되지.」

“그럴듯하군.”

특히나 마리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별생각 없이 사무장이라는 직책을 줬는데, 마리는 뜻밖의 수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켈세타 성에서 머물 때 마가렛 하녀장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마리가 힘써 준 덕분에 진료소는 빠르게 질서를 갖춰 나갔다. 아그네스나 마리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싹 사라졌다.

“그래서, 어딘데?”

「당근 뒷산이죠.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쪽 말고 반대편 쪽에 작은 폭포와 연못이 있어요. 그 폭포 뒤에 동굴이 있었어요.」

“폭포 뒤에 동굴이 있다고?”

「넹. 왜요?」

턱을 괸 준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폭포 뒤라면 천연 동굴은 아닐 테고. 사람이 머문 흔적은 없었나?”

「자세히 보진 않아서 모르겠는데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었어요. 등산로도 없어서 평범한 사람이 가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고. 찝찝하시면 다시 갔다 올까요?」

“됐다. 가서 직접 살펴보면 되겠지. 고생했다.”

「근데요, 마스터.」

“왜?”

어울리지 않게 릴리가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뭔가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 팝콘이 상했나?

「저, 어제 루치아 님께 들었는데요.」

“뭔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군.”

「사람이 얘기도 들어 보지 않고 단정하면 못 쓰는 거라면서요!」

“넌 정령이니까 예외다.”

「흥.」

“됐고, 말해 봐.”

릴리의 태도가 급변했다.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은 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도 새 몸을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으음. 역시 꿍꿍이가 있었군. 선뜻 장소를 찾으러 간다기에 뭔가 이상했었지.”

「루치아 님이 그랬단 말이에요. 왜 저한테 몸을 안 만들어 주냐구. 정령인 채로 돌아다니긴 좀 그렇잖아요? 여러 가지로 불편하단 말이죠.」

몸을 만들어 달라는 건, 다시 말해 정령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겠다는 걸 의미한다. 소환술의 일종인데 재료만 있다면 정령의 혼을 담을 수 있는 몸을 만들 수 있다.

“재료는 가지고 있긴 한데.”

「정말요?」

“그래. 언젠가 필요할 거 같아서 아공간 창고에 넣어 놨다.”

「역시 우리 마스터가 최고라니까!」

“만들어 준다고는 안 했는데?”

「아잉. 그러지 말구요오~」

릴리가 달려들더니 버둥거렸다. 영체라 느낌이 오지는 않았지만 귀여운 발버둥이었다.

준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긴 세월을 같이한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의 몸을 원하다니?

“갑자기 인간의 몸이 필요한 이유는 뭐냐? 오히려 공간의 제약이 생겨서 더 불편할 텐데?”

「그냥요.」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정확히 이유를 다섯 가지만 말해 봐.”

「첫째. 귀여우니까! 둘째. 섹시하니까! 셋째. 예쁘니까! 넷째. 글래머러스…… 아, 이건 아닌가?」

“거절한다.”

「히잉.」

잔뜩 기대하고 있던 릴리가 시무룩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옆으로 날아가더니 무릎을 껴안고 뒤돌아 앉았다. 그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급기야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바보똥개. 뭐 이런 글자인 것 같다.

준은 피식 웃었다.

“알았다. 만들어 주지.”

「정말욧?」

“대신 이유를 말해 봐. 왜 몸이 필요한지 알아야 목적에 맞게 만들 거 아냐?”

「루치아 님이 인간계로 강림하신 뒤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저도 인간처럼 한번 살아 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군.”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준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만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유지도 마찬가지. 다만 갑자기 나타날 새로운 존재를 주변에 어떻게 소개하느냐가 문제였다.

“대신 조건이 있다. 캐릭터 설정을 해야 하는데, 마리가 가신이 된 이후로 시종이 공석이니 네가 그 자리를 채우면 되겠구나. 엘누아르 가문의 시녀로.”

「와 대박. 너무하시네. 제가 수만 년 동안 마스터 쫓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 한 건 잊으셨나요?」

“싫으면 말고.”

준은 침대에 편히 누웠다. 그리고 편안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릴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

“진즉 그럴 것이지.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진행해 볼까?”

준은 아공간 창고를 열고 재료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 * *

릴리가 찾은 동굴은 확실히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내부를 살펴보면 분명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너무 깨끗하다 싶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준은 한쪽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밀짚 인형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한편, 릴리는 마치 재촉하는 것처럼 주변을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릴리. 나이는 몇 살로 할 거야?”

「음…… 아그네스랑 동갑내기 하고 싶은데 19살이면 너무 늙은 느낌이죠?」

“전혀.”

「나이는 어릴수록 좋은 거라고 하니까 17살! 마리랑 친구 해야지. 헤헤헷.」

좋은 생각이었다. 나이도 같고 어차피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존재로 태어날 테니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준은 체구에 맞게 밀짚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준은 순식간에 밀짚 인형을 만들었다. 밋밋하고 못생긴 인형이었다.

“외모는?”

「루치아 님보다 예쁘긴 어려우니까 아그네스보다 예쁘고, 마리보다 더 귀엽게.」

“그냥 남자로 해야겠군.”

「안 돼요! 덜렁거리는 거 달고 다니기 싫단 말이야!」

“요구사항이 너무 많으니 내 마음대로 하마.”

릴리는 싫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준이 마음을 돌릴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인형을 지켜보았다.

이제 마지막 과정이 남았다.

준은 밀짚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인형 가슴에 영롱한 보석을 쑥 박아 넣었다. 그것은 세계수의 눈물을 응결시켜 만든 것이었다.

세계수는 다른 말로 생명의 나무다. 그것의 눈물을 넣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과 같다.

“다됐다. 네 힘을 세계수의 눈물에 집중시키도록 해.”

「오예! 고고싱!」

우우우웅!

릴리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며 원형 구체로 변했다. 준도 마나를 일으켜 밀짚 인형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릴리의 영체가 세계수에 눈물에 닿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번쩍!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밀짚 인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난 것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었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귀여운 인상의 여자아이였다.

“와아아!”

바로 릴리였다.

릴리는 신기한 듯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손가락으로 살을 쿡쿡 눌러 보더니, 손도 움직여 보고 다리와 몸을 살펴보았다.

이번엔 걸음을 몇 번 옮기더니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와우! 이런 게 달린다는 기분이군요! 날지 못해서 아쉽지만 이것도 괜찮네요!”

릴리는 마치 꼬마 아이처럼 동굴 안을 휘젓고 다녔다. 그녀를 바라보던 준은 위화감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았다.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 빠져 있었다.

“릴리. 뭐라도 좀 입는 게 좋겠다.”

“꺅!”

릴리의 비명이 조용한 동굴을 울렸다.

* * *

다음 날, 약속대로 릴리는 진료소를 찾아왔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준은 그녀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오늘부터 엘누아르 가문의 시종으로 일을 하게 된 릴리다. 마리 사무장의 후임이라고 할까. 아무튼 모두 가족처럼 잘 보살펴 주길 바란다.”

“잘 부탁드려요오!”

상쾌한 인사말과 발랄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그네스가 관심을 보였다. 반면 마리는 경쟁자로 인식했는지 눈빛이 매서웠다.

아그네스가 물었다.

“어디 출신이에요?”

“아, 저는 세계수에서 태어났어요. 요정들의 낙원인 엘븐하임이 제 고향이죠!”

“네?”

순간 아그네스가 당황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종이 아니라 환자가 아니냐 하는.

릴리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맺혔지만 그녀의 순발력은 발군이었다.

“헤헷! 농담이고요. 켈세타에서 왔답니다~”

“와아. 도시 출신이에요?”

“그럼요! 모이라이의 살롱에서 오래 일을 하다 이곳으로 오게 됐어요.”

“어? 저 거기서 옷 산 적 있는데.”

“와! 정말요? 언제요?”

“예전에 백작께서 연회를 열었을 때 갔었거든요. 그때 선생님들 옷도 사고 제 옷도 산 적이 있어요.”

“그땐 쉬는 중이라 매장에 없었나 봐요. 아쉽다.”

죽이 척척 맞았다.

그럴 만도 했다. 아그네스는 릴리의 정체에 대해 모르지만, 릴리는 아그네스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거의 다 알고 있었으니까.

공통점을 만들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친밀감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첫 소개에서 조금 삐끗하긴 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졌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릴리는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매번 페어리의 모습을 보다 저렇게 보니 새로운 느낌도 들었다.

루치아가 손가락으로 준의 어깨를 쿡쿡 두드렸다.

“생각보다 일찍 만들어 줬네요?”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만들어 줄 걸 그랬어.”

“당신 인색한 거야 신들도 다 아는 사실이니까. 잠깐 나가요.”

루치아가 앞장섰고 준은 뒤를 따랐다. 밖에서 경비를 서던 기사단원들이 군례를 취했다.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훈훈한 바람에 햇살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길가로 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고, 저 멀리 보이는 뒷산은 푸른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길을 걸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아뇨.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은 빠져 주는 게 좋죠. 어쨌든 저 친구들이 진료소의 주역이 되어야 하니까.”

“하긴.”

언제까지 누아 마을에 계속 머물지는 알 수 없다. 정착했다고 해도 마을을 떠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러기 전에 아그네스를 주인공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참, 아그네스는 어떻게 됐어요? 마나 유저가 되고 싶대요?”

“본인은 하겠다고 하는데 문제는 바이런 경이야. 오늘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의외로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걱정이긴 하네요. 당신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다고는 하지만 몇 달 되지도 않은 충성일 뿐이니까요.”

“잘되겠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으니.”

루치아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봄바람이 살랑일 그때,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봄기운을 만끽했다. 그리고 준 쪽으로 돌아섰다.

“그 일 끝나면, 같이 왕도로 가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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