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준, 제안하다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진료실을 냉큼 하나 떼 주다니.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에요?”
루치아가 찾아왔다. 진료실을 정리하던 준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결혼도 안 한 영주의 침실을 멋대로 꾸민 것에 비하면 평범하지.”
“폴링 씨가 고민을 많이 하는 거 같아서 조금 도움을 준 것뿐인데. 마음에 들어요?”
“공간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소모된 것만 빼면 나쁘진 않더군.”
“나쁘다는 얘기네. 휴, 사람이 좀 욕심을 내면 얼마나 좋아?”
루치아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정리를 모두 끝낸 준은 부적처럼 여기던 치유의 여신 엘레나의 조각상을 책상 한쪽에 놓았다.
그제야 루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준이 먼저 질문을 꺼냈다.
“치유사 시험은 어땠어?”
“문제를 봤는데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초급과 중급 사이 정도 되는 문제가 많이 출제돼서 까다로웠어요.”
“그런데도 용케 최우수로 합격을 했군.”
“그만큼 열심히 했으니까요. 가끔 결과가 노력을 배신할 때가 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뭔가 수를 쓴 건 아니지?”
“설마요.”
루치아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면 시험 문제를 사전에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다. 물론 왕립학술원에서 주관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뚫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이제 많이 바빠지죠? 켈세타에 있을 때 몇몇 사람을 만났는데 다들 당신만 찾고 있더라고요. 특히 마이더스 상단 사람들이.”
“쓸데없이 소모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볼 생각이야. 종합감기약 개량판이 나오면 여기서 제조하지 않고 조제법을 상단에 넘길 생각이다.”
“그럼 수익이 더 줄어들지 않아요?”
“수익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거든.”
씨익 웃은 준이 여유롭게 책을 꺼내 펼쳤다.
그것은 왕립학술원에서 발행한 중급 치유학 전공서였다. 이것을 독파해야만 중급 시험을 이해할 수 있다.
루치아는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그 책이 필요한 사람은 아그네스뿐이니까.
“이제 갓 치유사가 된 아이한테 또 공부를 시키려고요? 독하네.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 둬요. 진료를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있을 테니까.”
“오해야.”
“그러면 다행이고.”
준은 다시 책을 덮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한정적이야. 반면 아그네스가 지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이제 슬슬 마나 유저로 각성시켜도 좋지 않을까 해.”
그 말에 루치아가 두 눈을 빛냈다.
“드디어 마음을 굳힌 거예요?”
“조금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최우수로 합격을 했다니, 더 이상 지체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더군.”
“거기에 카누 씨 일도 그렇고요. 그쵸?”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최근 카누의 병을 치료한 일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아그네스는 포기하지 않는 것과 환자를 위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웠다.
그것은 개론서나 전공서도 알려주지 않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준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도, 배경도 아닌 정신력이었다. 나머지는 후천적으로 완성할 수 있지만 정신력은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마나를 깨우치게 할 건가요?”
“보름달이 뜨는 밤에.”
“낭만적이네요. 보름달이라.”
묘한 미소를 지은 루치아가 잘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나섰다.
이번엔 릴리가 나타났다.
「보름달이라면 앞으로 나흘 남았군요.」
“그렇지. 적당한 곳을 알아봐야겠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마나를 느끼게 하는 일은 말만큼 그렇게 쉽지 않다. 마나의 농도가 가장 짙은 보름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시기도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물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준에게 그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가능하면 최상의 상황에서 일을 진행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그네스의 일이니까.’
무엇보다도 수혜자에게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된다. 기혈이 뒤틀리고 근골이 재배치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외진 곳이 좋다.
「제가 한번 찾아볼까요?」
“웬일이야? 평소에 그렇게 귀찮아하더니.”
「요즘 재미가 없어요. 볼카누스 아재한테 소식도 없고, 마계 할배는 코빼기도 안 비추고. 환자들 골골거리는 소리를 들을 바엔 나가서 바람이나 쐴래요.」
“그러든가.”
준이 허가하자 릴리가 기다렸다는 듯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뭐, 알아서 잘하겠지.’
때마침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준이 진료실을 나섰다. 켈세타에서 온 의료진이 장비와 약초 등을 들고 진료소로 들이닥친 것 같았다.
“어머! 아그네스 양! 이게 얼마 만이에요? 치유사 시험에 합격하셨다던데. 이제 선생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아니에요.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 주세요.”
“어쩜 그래요? 엘누아르의 서기관이 됐다는 얘기도 있던데. 어린 나이에 벼락출세를 했네. 대단해요!”
“부끄럽게 자꾸 왜 그러세요.”
겸양을 부리면서도 아그네스는 기분이 좋은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예전에 아그네스가 켈세타 성 진료실에서 연수를 받을 때 친분을 쌓았던 의료진이었다. 모두가 여자였는데, 아그네스를 둘러싼 채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나이도 아그네스보다 많고 다들 경험이 많아 보이는군. 쉽지 않겠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준은 마침 지나가던 마리를 불렀다.
“무슨 일이세요?”
“진료소 식구들이 늘었으니 앞으로 직원 관리는 네가 하는 게 좋겠구나. 아그네스는 이제 진료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같이하기 어려울 거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이와 경험을 따지지 말고 엄하게 관리하는 게 좋겠지. 왠지 아그네스가 곤란한 일에 처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너무 착한 것도 탈이 될 때가 있으니까. 켈세타 성의 마가렛 하녀장. 기억나나?”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귀한 존재였고, 또 경외의 대상이었다. 치유사 자격증이 없다고 해도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 점을 이용한 지시였다.
“마가렛 하녀장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역할을 해 줬으면 한다. 마리 사무장.”
“사무장…… 알겠습니다.”
무서운 얼굴을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어수선해진 대기실을 휘어잡았다.
“대기실에서는 정숙을 지켜야 해요. 환자분들이 계시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새로 온 분들은 옮기던 짐부터 마저 옮기고 저를 따라오세요.”
“당신은 누구시죠?”
새파랗게 어린 소녀가 명령을 하자 대부분 반발했다. 그래도 켈세타 성의 진료실에서 나름 경험을 쌓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준이 기적을 보여 주었다곤 해도, 그들도 나름의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성의 진료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하지만 반발의 원인은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 있었다.
눈앞의 아그네스도 소녀처럼 보이는데, 그보다 더 어린 마리가 나서니 내심 불쾌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저는 엘누아르 가문의 마법사이자 앞으로 여러분들의 관리를 책임질 사무장이에요.”
“말도 안 돼! 견습이 아니고요? 이렇게 어려 보이는데?”
“견습이요?”
차갑게 쏘아붙인 마리가 오른손을 펼쳐 화염 마법을 일으켰다. 볼카누스의 내력이 실린 화염이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준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강하게 나가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저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말조심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들 꼬리를 내렸다. 좌중을 한번 슥 훑어본 마리는 화염을 거뒀다.
“진료소 안에서는 규율을 잘 지켜 주세요. 여러분들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누아에 왔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 주시고요.”
“예!”
“아그네스 선생님은 슬슬 진찰 준비하셔야죠?”
마리는 일부러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강조점을 뒀다. 이제 파견된 사람들 중 아그네스를 편하게 부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겁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켈세타에서 파견된 수습들이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장면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준도 다시 들어가 진료를 준비했다.
* * *
“수고하셨어요. 아그네스 선생님. 이제 오전 진료는 끝났어요. 방금 환자가 마지막 환자였어요.”
“아, 멜린 씨도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어디 불편하세요?”
“예? 아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그네스가 억지로 웃음을 짓자 멜린이 꾸벅 인사한 뒤 차트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진찰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하룬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기사단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진료실 안을 배회하다 밖으로 나갔다.
오전 진료가 끝나고 누아의 진료소는 점심 식사 준비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어디 나가세요?”
“요 앞에 잠깐 바람 쐬러요.”
“너무 멀리 가지 마셔요. 곧 점심 식사가 준비될 거랍니다.”
“알았어요.”
앞치마를 두른 견습생 하나가 빠르게 식당으로 걸었다.
아그네스는 이제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식사는 켈세타에서 파견된 견습생들이 도맡게 됐다. 다행히 요리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많아 준비가 오히려 수월해졌다.
‘다 같이 점심 준비를 하는 것도 즐거웠는데.’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아그네스는 바로 옆에 있는 구관(舊館)으로 향했다.
이곳은 이제 숙소로 쓰인다. 유사시에는 응급실과 입원실로도 쓰일 예정이다.
그래도 진료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그네스는 텅 빈 진료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불쑥 진료실로 들어왔다.
“첫 진료 소감은?”
“꺄악!”
멍하니 있던 아그네스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예요, 선생님! 깜짝 놀랐잖아요. 그렇게 갑자기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뭐 죄지은 거라도 있어?”
“아뇨. 그냥…….”
다시 멍해지려던 아그네스가 정신줄을 붙잡았다.
“참, 방금 질문하셨었죠? 첫 진료 소감이 어떠냐고.”
“많이 발전했구나.”
“제가 뭘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정신이 없었어요. 제대로 진찰을 한 걸까요? 처방은 제대로 했나 모르겠어요.”
“걱정돼?”
아그네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하지만 준은 가벼이 웃어 보일 뿐이다.
“그럼 가서 다시 차트를 봐. 어떻게 처방했는지 보면 답이 나올 테니까.”
“휴, 선생님은 참 현실적이시네요. 애제자를 위해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 정도는 해 주셔도 되잖아요?”
“현실적인 게 오히려 도움이 되지. 뜬구름 잡는 얘기는 해서 뭐하나.”
준은 텅 빈 진료실에 굴러다니던 시험용 플라스크를 어루만졌다. 먼지가 쌓이기 전에 찬장을 열고 그것을 안에 집어넣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아그네스가 살짝 놀랐다. 준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 대신 다른 건 어때?”
“다른 거요?”
“그래. 이를테면,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법이라든지.”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가능해요? 마나를 느끼는 건 태어날 때 결정되는 거 아니었나요?”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강제로 마나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아…….”
아그네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궁금한 게 머릿속으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너무 놀란 탓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다. 엄청난 고통이 따를 거고. 간혹 부작용으로 외모가 흉하게 변하기도 한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그래도 하겠나? 원한다면 마나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지.”
준은 그녀가 충분히 고민하도록 기다려 주었다.
사실 외모가 흉하게 변한다거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준의 경지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부작용이었다.
그래도 준은 그녀가 쉽게 선택하지 않기를 바랐고, 또 기연을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할래요. 하겠어요. 꼭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