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꿈을 이루다
스러지는 눈처럼 겨울이 지나갔다.
냇물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눈으로 뒤덮였던 숲이 차츰 푸른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왕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누아 마을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온 것이다.
찌르르!
작은 새들이 지저귀며 하늘을 날았다.
기분 좋은 아침. 따사로운 봄 햇살을 등지며 준은 새롭게 들어선 진료소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완성인가. 생각보다 괜찮은데?’
확실히 도면으로 보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짐작하던 것보다 건물이 컸다. 이 정도면 누아 마을 주민들은 물론, 주변 마을에서 오는 환자까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제야 우리 루치아 님이 더 이상 좁고 누추한 곳에서 진료를 보지 않으셔도 되겠군요!」
‘루치아만 챙길 거면 마스터를 그쪽으로 바꿔.’
「아유~ 우리 마스터 삐지셨어요? 우쭈쭈쭈. 루치아 님은 손님이니까 더 신경을 쓰는 거라구요.」
준은 피식 웃어넘겼다. 릴리도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의 톤이 평소보다 더 높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진료를 볼 수 있게 됐다. 거기에 연구까지 할 수 있으니 앞으로 더욱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마이더스 상단하고 맺은 계약이 이제야 빛을 보겠네요. 지원도 많이 받을 거고. 열심히 약 개발해서 역사에 길이 남는 부자가 되자구요!」
‘부자가 된다고 해서 네가 페어리 퀸이 되진 않아.’
「못됐네, 정말!」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칭얼거리기 시작한 릴리가 종적을 감췄다.
“좋은 아침입니다. 영주님.”
폴링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이 몸을 돌리자 그가 예를 갖췄다. 그간 신축 공사와 광산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여러모로 고생을 했는지 피부가 거칠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리가 모두 끝났으니 제가 안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아 참, 그런데 외관은 어떠십니까?”
“아주 좋군요. 마을 풍경과 잘 어울리는 자재를 써서 그런지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하하하! 알아봐 주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실제로 설계 단계부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왠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조화를 중시하는 분 같아서 말이죠.”
“그렇습니까?”
오히려 제대로 본 것은 폴링이었다.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절로 조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희대의 숙적인 볼카누스와 카이엔을 동거하게 만든 것도 준의 심성에 기인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볼카누스는 어떻게 됐을까? 가족들과 재회했을까? 소식이 없으니 궁금하군.’
준은 다시금 신축 진료소의 외관을 살폈다.
이 정도 규모의 건축물이면 조용한 시골 마을과 잘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한데, 마치 오래전부터 마을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준은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누아 마을 주민들 중 가장 거주 기간이 짧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마을에 애정을 품게 되었다.
“슬슬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좋습니다.”
준은 폴링의 안내를 받아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잘 만들어진 입구를 지나자 환자 대기실이 보였다. 넓고 쾌적했다. 거기에 시원한 향기가 났다. 주변을 둘러본 준은 그것이 의도된 향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향이 좋군요.”
“특수 처리를 한 목재를 사용했습니다. 환자분들이 심신을 보다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말이죠.”
“비용이 꽤 들지 않습니까? 마법 처리를 한 것 같은데.”
“돈을 아끼지 말라는 백작 각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의 의도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준도 잘 알고 있었다. 고위 귀족이나 귀빈들의 이목을 끌려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런 좋은 시설을 누아 마을은 물론, 다른 환자들도 누릴 수 있다면 서로 좋은 거니까 말이다.
“이쪽은 환자들이 접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뒤쪽으로 차트를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있고, 직원들이 머물 수 있는 대기실이 있습니다.”
“상당히 넓군요. 직원을 몇 명 더 채용해도 되겠습니다.”
“조만간 켈세타 성의 진료소에서 인력이 파견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고개를 끄덕인 준은 안으로 들어가 차트가 꽂혀 있는 책장을 살폈다.
예전 건물에 있던 차트가 모두 옮겨져 있었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진료를 보시라고 미리 옮겨 두었습니다.”
“세심하시군요. 고맙습니다.”
“그러면 이제 진료실을 보러 가셔야지요?”
진료실이 다른 층에 있는 진료소도 꽤 있지만, 누아 마을은 고령화가 심한 편이기 때문에 진료실이 대기실과 같은 층에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 옆쪽을 지나니 똑같은 문으로 된 방 세 개가 나타났다.
폴링이 손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진료실을 세 개로 나눴습니다. 두 개는 영주님과 루치아 선생께서 쓰시면 되고, 나머지 하나는 여분입니다. 예정대로라면 조만간 아그네스 양의 차지가 되겠지요.”
“시험에 합격한 뒤의 이야기겠지요.”
“지금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일 텐데요. 선생님께서는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고 계십니까?”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겁니다.”
아그네스는 켈세타로 떠나 왕립학술원에서 주관하는 초급 치유사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결과는 다음 날 바로 나오기 때문에 그녀는 결과와 함께 마을로 돌아올 것이다.
호위는 하룬이 맡았고, 루치아가 켈세타까지 동행했다. 마리는 진료소 일 때문에 누아 마을에 남았지만, 마음만큼은 언니와 함께하며 그녀가 합격하기를 기도했다.
“아그네스 양에게 좋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폴링은 미소를 지으며 맨 첫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딸칵.
안은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진료용 책상과 침상, 그리고 약병을 보관할 수 있는 찬장이 보였다.
따스한 햇볕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폴링은 창가로 가 커튼을 쳤다. 그제야 진료실 안이 좀 차분해졌다.
“이곳이 앞으로 영주님의 새로운 진료실입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훌륭하군요.”
준은 흡족한 표정으로 책상을 손으로 쓸었다. 재질이 좋았다. 침상도, 찬장도 기타 다른 집기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준은 입원실과 실험실, 그리고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엘누아르 가문의 안가로 사용될 공간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집무실과 응접실 등 모든 시설들이 잘 꾸며져 있었다.
이번엔 폴링이 커다란 침대가 들어선 방을 소개했다.
“침실은 특별히 더 신경을 썼습니다.”
“확실히 침대가 크긴 하군요. 그래도 혼자 쓰기엔 조금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루치아 선생님의 취향을 최대한 고려했습니다.”
폴링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방인데 왜 루치아의 취향을 반영한단 말인가? 의외로 그에게 짓궂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시설을 다 둘러본 두 사람은 다시 1층으로 돌아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총평을 듣고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건물입니다. 아니, 침실은 조금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백작 각하께 말씀 잘 전해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각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폴링 씨가 공사를 맡아 주셔서 결과가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라뇨. 손 풀기로는 아주 적당했지요.”
“손 풀기?”
“본 게임을 슬슬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금광 개발 사업을 공식적으로 알릴 계획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말입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축 진료소가 세워지는 동시에 폴링은 금광 개발 사업을 비밀리에 추진해 왔다. 금광에 투입될 인부와 부대시설이 모두 준비된 상황이었다.
광부들은 자신들이 금광석을 캐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주님. 생산된 금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상단을 하나 잡고 거래를 하는 방법이 가장 무난합니다만. 아니면 귀금속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글쎄요. 아직 고민 중입니다. 곧 결정하지요.”
그때,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분명 마차를 끄는 소리였다. 준과 폴링은 신축 진료소에서 나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 아그네스가 켈세타로 떠날 때 탔던 그 마차였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할 소식이 있는 걸까요?”
폴링이 한껏 기대하며 그렇게 물었다. 준은 그저 웃으며 마차가 진료소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곧 도착한 마차가 멈추고 문이 활짝 열렸다.
“선생님!”
아그네스가 뛰어내리다시피 마차에서 빠져나왔다. 만약 그 장면을 바이런이 봤다면 체통이 없다며 호되게 꾸짖었을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듣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은데.”
확실히 그랬다. 아그네스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뒤따라 내린 루치아와 하룬도 표정이 밝았다. 시험에 떨어졌는데 표정이 이럴 순 없을 것이다.
아그네스가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왕립학술원장의 인장이 찍혀 있는 합격증이었다. 금빛 자수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가장 높은 등급으로 합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짜잔! 합격했어요!”
“축하한다.”
“와, 반응이 그게 뭐예요? 조금도 축하하는 것 같지가 않잖아요. 저 이제 왕국에서 인정한 정식 치유사가 됐다구요. 네?”
“네가 치유사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거든.”
모두가 살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에.
당사자인 아그네스는 더더욱.
“언제부터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푸이푸이와 라자이아의 상호작용을 모르긴 했지만, 마을 주민들을 위한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열의가 있어 보였지.”
아그네스는 제법 감동을 한 표정이다.
하룬은 휘파람을 불었고, 루치아는 그거 작업할 때 쓰는 멘트 아니냐며 정중히 항의했다.
준이 아그네스 앞에 섰다.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같이 힘을 합쳐 여기 진료소를 멋진 곳으로 만들어 보자. 아그네스 선생.”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했다. 감격에 찬 표정을 지은 아그네스가 손을 잡았다.
“저 그럼 이제 선생님과 동급?”
“그럴 리가 있나? 중급 시험에 통과하면 그때 진지하게 생각해 보마.”
아그네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서운할 틈이 없었다. 준이 그녀를 이끌고 신축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기 아직 공사 중 아니에요?”
“공사는 어제 끝났다. 정식으로 치유사가 됐으니 진료실을 받아야겠지.”
준은 아까 폴링이 설명한 여분의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진료실은 모두 같은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시무룩한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으니까.
“여기가 정말 제 진료실이에요?”
“그래. 오늘부터는 여기에서 환자를 보면 돼. 조만간 켈세타에서 오기로 한 견습 치유사들이 널 보조할 거다.”
“진찰하다가 어리바리하면 어쩌죠?”
“어쩌긴? 혼나야지.”
아그네스가 진료실을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을 사이, 준은 잠시 그곳을 빠져나와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백의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뭐예요?”
“합격 선물.”
준은 백의를 펼쳐 아그네스에게 입혀 주었다. 마치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잘 맞았다.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였는데, 이제 백의를 입으니 성숙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제야 진짜 치유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고마워요. 선생님.”
준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번 헝클어 주었다. 자상한 손길에 아그네스가 얼굴을 붉혔다.
합격한 것도 합격한 거 나름이지만, 왠지 준과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아그네스가 초급 치유사가 됐으니 슬슬 다음 단계로 들어가도 되겠어.’
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