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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87화 (87/175)

87화 최선을 다한 결과 (2)

손질은 순식간에 끝났다. 준은 두툼하게 썰린 암영초와 각종 약재를 탕약기에 넣었다.

“이제 달이기만 하면 되나요?”

아그네스가 나서려고 했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달여서는 안 된다. 조금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데. 마리. 지팡이를 들고 따라 나와라. 루치아 선생도 좀 돕고.”

준의 말에 의료진은 다 같이 자리를 옮겼다. 진료소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였다.

준은 공터 한가운데에 탕약기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마법으로 가열한다. 정확히는 마나가 섞인 화염으로 약재의 효능을 끌어내는 방법이지.”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흔히 쓰이는 방법은 아니지.”

사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가장 확실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볼카누스의 브레스로 열을 내면 딱일 텐데. 아쉽군.’

그렇다고 그가 고향에서 돌아오는 것을 마냥 기다릴 순 없는 상황. 기약 없이 떠난 그였다.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탕약기를 확실히 밀봉한 준이 뒤로 물러났다.

“내가 신호를 할 때까지 화염 마법을 쏟아내. 위력은 최대한으로. 셋, 둘, 하나!”

콰아아아아아!

엄청난 마력을 담은 열기가 준과 루치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마리도 한몫 거들었지만, 두 사람의 화염에 비할 바는 못됐다.

보통의 탕약기라면 부서지거나 녹았겠지만, 그것은 꿋꿋이 화염을 견뎠다. 그것도 준이 만든 성물 중 하나였다.

쿠아아아!

빛과 열기가 점차 강렬해졌다.

그러다 보니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아그네스가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하룬은 망토를 펼쳐 그녀의 앞을 가려 주었다. 제법 기사다운 티가 났다.

“괜찮아?”

“아, 응. 잠깐 놀라서 그래.”

“이제 놀랄 필요 없어. 이 오빠가 있으니까. 후후후.”

하룬이 던진 무리수 덕분에 아그네스는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평범한 마을 주민을 위한 탕약은 점차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준은 향을 맡아 약이 제대로 우러나고 있는지 살폈다.

‘이쯤이면 됐다. 너무 오래 가열하면 약효가 오히려 떨어지니.’

준은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거뒀다. 루치아와 마리도 마법을 멈췄다. 시뻘건 화염이 사라졌고, 새까맣게 그을린 탕약기만 남았다.

뚜껑을 치우고 안을 확인했다. 그 엄청난 열을 맞았음에도 안은 멀쩡했다. 진한 암영초의 향이 담겨 있는 탕약이 잔뜩 남아 있었다.

준은 탕약을 신중히 그릇에 옮겼다.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좋아. 다 됐다. 이제 카누 씨의 집으로 가서 약을 쓰면 되겠어. 루치아. 마리. 고생했다. 그리고 아그네스. 지금 바로 왕진 준비를 해.”

“주군! 저는 뭘 할까요?”

“뒷정리를 부탁한다.”

“하…….”

하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마친 준과 아그네스는 진료소를 나섰다.

해가 떨어져 날씨가 무척 추웠지만,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그네스는 들떠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로서는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종지부를 찍는다면 가장 홀가분한 건 그녀일 것이다.

“이제 그 약을 쓰면 카누 씨의 병이 모두 낫게 되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간혹 약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환자들도 있으니까.”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웬일로 아그네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준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곧이어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든 약이잖아요. 치유의 여신께서 분명 기특하게 여겨 기적을 보여 주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군.”

대답을 그렇게 하긴 했지만, 준은 속으로 기적은 이미 실현되었다고 대꾸했다.

역사상 가장 효능이 좋은 암영초가 수확되었다.

마계의 대공과 용족의 로드가 힘을 모았고, 전직 절대자인 자신과 천족인 루치아, 그리고 용족의 힘을 이어받은 마리의 손을 거쳐 최상의 약재로 탈바꿈했다.

이 이상의 약재는 그 누구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대륙에서는.

“있죠.”

그렇게 운을 뗀 아그네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준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주었다.

“카누 씨의 병이 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제가 진단을 좀 더 잘했더라면 병을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 때문에 너무 슬프고 괴로웠어요.”

하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너는 견습 치유사에 불과하니까.

준은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아그네스의 시간이었다. 사족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검사가 끝나고 확진이 나왔던 그날, 방으로 올라가서 한참을 울었어요. 치유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누군가를 치료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왜 생각을 바꿨지?”

“제가 그만둔다고 해서 카누 씨의 병이 낫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아그네스가 미소를 지었다.

“정신을 차리고 더 열심히 해서 카누 씨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실력이 부족한 걸 합리화하려는 건 아녜요. 실력도 경험도 부족하지만, 제가 분명히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시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어요. 다시 환자분들을 대할 용기도 생겼고요.”

아그네스의 속마음을 듣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간단히 그녀에게 마나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실력이 무르익기 전에 마나를 익히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너는 아주 잘하고 있다.”

“정말요?”

“그래. 지금까지 내가 봐 온 그 어떤 견습 치유사보다도.”

“예?”

아그네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의 마음고생과 감동이 눈물이 되어 흘러넘칠 뻔했지만, 그녀는 씩씩하게 참아 냈다.

준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 감동할 필요까진 없어. 지금까지 내가 겪은 견습 치유사는 네가 처음이었거든.”

“한 명 중에 일 등이라는 말씀이군요…….”

“하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결국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문득, 준은 기묘한 우연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카누 씨의 딸, 이름이 엘레나라고 했었지?”

“맞아요.”

“치유의 여신과 이름이 똑같군.”

“어머! 정말 그렇네요. 왜 모르고 있었지? 진짜 치유의 여신께서 보살펴 주신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신의 안배일지도 모르고.’

카누의 병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변화를 겪었다. 아그네스는 보다 성숙해졌고, 카이엔과 볼카누스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평범한 마을 사람의 병이 낸 결과치고는 의미심장하다고 할 만했다.

“도착했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카누의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하고 있었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엘레나가 뛰어나왔다.

“영주님! 서기관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얘는.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아그네스는 여전히 서기관이라는 직함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누아 마을 사람들에겐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하곤 했다.

가까이 다가온 엘레나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준의 눈치를 보면서.

“그래도 영주님도 계신데 언니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걸?”

“정말요?”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비루나 왕국의 국왕이 있는 자리도 아닌데 굳이 체면치레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준이 물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시니?”

“아까 잠깐 주무시는 것 같았는데 곧 일어나실 거예요. 저녁 시간이거든요.”

“미안한데 아버지를 좀 깨웠으면 좋겠구나. 암영초를 구해 왔다.”

“예에?”

엘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준을 올려다보았다. 준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서. 약이 식기 전에.”

“아, 아버지!”

엘레나가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달려갔다. 그 목소리에 잠에서 깬 카누가 밖으로 나왔다.

“영주님!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어인 일로……?”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준은 손에 든 탕약을 들어 보였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카누가 진료소를 찾아왔다. 오늘은 진료소가 쉬는 날이지만 모든 의료진이 진료 준비를 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쉬는 날에 폐를 끼치는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쉬는 날 대신 좋은 날이 될 겁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카누는 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은 진찰을 시작했다. 간단한 문진과 촉진, 그리고 청진이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형적인 병세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상태가 아주 좋군요.”

“한층 젊어진 느낌입니다. 허허허. 기운도 잘 나고요. 입맛도 좋고 소화도 잘됩니다. 그 엄청나게 쓴 약을 먹은 뒤로 말이죠.”

카누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사흘 전 투여했던 암영초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섣불리 예단할 순 없었다.

눈으로 병소가 사라진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완치 판정을 내릴 수는 없다.

“아그네스. 스캐너는?”

“준비 끝났습니다. 카누 씨. 이쪽으로 누워 주세요.”

카누가 침상에 누웠다. 아그네스는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상냥히 검사에 대해 다시 설명했다.

“전에 했던 검사랑 같은 거예요. 카누 씨의 몸에 있던 암 조직들이 어떻게 됐는지 꼼꼼히 확인할 거예요.”

“잘 부탁합니다.”

달칵.

스캐너의 전원을 올리자 모니터에 신호가 들어왔다. 아그네스는 핸들 끝에 슬라임 윤활제를 묻혀 준에게 건넸다.

하지만 준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아그네스는 준의 의도를 읽었다.

“그럼 검사 시작하겠습니다.”

아그네스가 직접 핸들을 조작하며 검사를 시작했다.

내부 장기를 살피는 그녀의 손은 이제 거침이 없었다. 모니터 판독에도 익숙해졌는지 딱히 질문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딸깍.

“위장 이상 없습니다.”

다음 목적지로 핸들이 움직였다.

악성 종양이 머물고 있던 자리가 거짓말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병소가 있었던 곳을 확인할 때마다 아그네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폐 이상 없습니다. 다음으로 간을…….”

딸깍.

이상이 없다는 선언이 계속되었고, 마지막 병소까지 확인을 모두 마친 아그네스는 핸들을 내려놓았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선생님. 모든 병소에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런 것 같구나. 루치아 선생은?”

“저도요. 깨끗하네요.”

모든 의료진이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준이 카누의 손을 꼭 잡았다.

“암 조직은 이제 모두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셔야 하겠지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카누는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는 손을 뻗어 아그네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마움이 물씬 느껴졌다.

“이제 왕진을 안 와 주셔도 되겠습니다. 서기관께서는 분명 훌륭한 치유사가 되실 겁니다. 그렇고 말고요.”

“감사해요. 하지만 더 열심히 할 거예요.”

결국 아그네스도 한줄기 눈물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진료실 구석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카이엔은 팔짱을 낀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지?”

준이 다가와 물었다. 카이엔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암영초가 쓰였으니 낫는 건 당연할진대. 인간들은 너무 감상적이야.”

“암영초가 치료의 전부는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저들은 암영초가 얼마나 대단한 약초인지 알지 못해. 단순히 구하기 어렵다는 것만 알고 있지. 그래도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어렵군.”

모두가 눈물을 거두고 서로를 안아 주며 기쁨을 나눴다.

하룬은 은근슬쩍 아그네스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가 정색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하지만 덕분에 모두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준도 피식 웃었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네가 그렇게 무시하는 볼카누스도 그 이유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거든.”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카이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렇게 그는 턱을 괸 채 한참이나 인간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물론 쉽게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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