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최선을 다한 결과 (1)
“진짜 엄청난 물건이군.”
카이엔이 말한 ‘엄청난 암영초’를 확인한 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술술 풍겨 내는 아우라부터가 달랐다.
지금까지 암영초를 몇 번 보긴 했지만, 이렇게 굵고 색이 진한 건 처음이었다. 한 입 베어 물기만 해도 기운이 요동칠 것 같았다.
“색이 좀 특이한데?”
“천 년에 한 번 나온다는 그 전설의 암영초와 비슷한 색이다. 하지만 크기로 따지면 이쪽이 훨씬 더 크지.”
“그렇군.”
암영초는 원래 색이 새까맣다. 하지만 카이엔이 만든 암영초는 특이하게 검붉은빛을 띠었는데, 굵기가 볼카누스의 팔뚝보다 더욱 굵었다.
한참을 살펴보던 준이 물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이상한 느낌인데.”
“역시 전직 절대자인가. 눈썰미가 좋군.”
“내 마력을 섞었다. 암흑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지. 그렇게 탄생한 게 이 암영초라는 말씀! 내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암영초 따위는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하하하!”
볼카누스의 자화자찬격 설명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초월자들이 합심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였다.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다행이다.
심호흡을 한 준은 조심스레 한쪽 무릎을 꿇고 암영초에 접근했다. 잘 익었으니 슬슬 약초를 캐야 했다.
“그대. 캐는 방법은 아나?”
“지켜보기나 해.”
준이 허리춤에서 호미를 꺼냈다. 그리고 강력한 마나를 주입했다. 그는 마치 흙을 한 알씩 털어 내는 듯 미세하게 작업을 했다.
물론 그 전에 암영초에 보존 마법을 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단순한 보존 마법이 아니었다. 암영초는 흑마력을 먹고 자라는 존재였기에,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라 흑마력을 이용한 보존 마법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카이엔이 흠칫 놀랐다.
“흑마력을 다룰 줄 알다니?”
“얼마 전에 터득했다.”
“뭐라?”
“너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네 마력을 조금 추출했지. 그리고 분석했고, 응용했다. 이게 바로 그 결과지.”
확실히 암영초는 얇디얇은 검은 막에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평소 말을 논리정연하게 잘하던 카이엔이었다. 그런 그가 말을 줄일 정도였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대. 정말 은퇴한 게 맞나?”
“은퇴했다고 해서 능력과 경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러다 얘기가 길어지겠군. 잠시 집중 좀 해야겠다. 말은 나중에 걸어라.”
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암영초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였다.
준은 잎은 물론 뿌리 하나 손상시키지 않고 완벽한 상태로 암영초를 캐는 데 성공했다.
“다시 봐도 멋진 놈이군. 마음에 든다.”
은은한 검붉은빛이 도는 최상급의 암영초. 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크기라면 환자 서너 명은 치료하고도 남을 것이다.
카이엔이 물었다.
“그 정도면 빚은 갚은 거겠지?”
“충분하지. 이 정도면 카누 씨의 암은 깨끗이 낫겠어. 너희들이 한 생명을 살렸다. 한 아이의 미래는 물론, 한 가정의 행복까지 지켰다. 수고했어.”
“괜히 엮지 마라. 마족 따위와 얽히고 싶지 않다.”
“글쎄. 역사상 최초의 용족과 마족의 합작 사업 아닌가? 싸우는 건 괴롭고 고통스럽지. 하지만 이렇게 힘을 모아 좋은 일을 하는 건 즐겁다. 안 그래? 그게 바로 사는 재미 아닐까.”
“으음.”
두 초월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준의 말이 틀렸다면 아니라는 말이 바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분명 준의 말에는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이번 암영초 재배를 하며 느낀 바가 많았다. 마족도, 그리고 용족도 생각보다 괜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뭐,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고.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준은 시커먼 종이에 암영초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었다. 이제 진료소로 돌아가 약재로 만들면 된다.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카이엔과 볼카누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준은 그래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기껏 좋은 말을 해 줬더니 싸우기라도 할 참인가?”
카이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얼마 전에 볼카누스와 약조를 했었다. 암영초를 성공적으로 재배하게 되면 내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그런 약속을 했었어?”
“크흠!”
솔직히 까먹고 있었다.
그때는 어떤 청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암영초를 이렇게 멋지게 만들어 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볼카누스가 마나를 끌어 올리며 기세를 휘어잡았다.
“그래, 좋아!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목숨이라도 구걸할 생각이냐?”
“기억력이 정말 형편없는 로드로군. 이 정도면 병인데. 아무튼 그때 나는 말했었다. 마계의 대공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알았으니까 대체 뭔데?”
잠시 뜸을 들인 카이엔이 묵직히 입을 열었다.
“고향에 다녀와라.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와라. 이게 내 요구다.”
“뭐라?”
순간 던전 내부에 정적이 깔렸다. 볼카누스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그대의 고향에 다녀오라고 말했다. 듣기로 치료가 완전히 끝났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차원 여행이 가능하겠지.”
카이엔은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고개를 끄덕여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볼카누스는 이제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이 나았다.
“나는 도망가지 않고 여기에 있을 거다.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와라. 승부는 그 이후에 가려도 늦지 않을 거다. 어차피 완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말이야.”
“대체…… 무슨 속셈이냐?”
“후후후. 죽기 전에 가족들은 한번 만나고 와야 하지 않겠나?”
명백한 도발.
보기 좋게 걸려든 볼카누스가 눈을 부라렸다. 머리카락이 용암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레어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미친 새끼!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런 이야기라면 네놈이 먼저 가족들을 만나고 와야겠지.”
“나는 가족이 없다.”
“……망할!”
왜인지 모르게 볼카누스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준이 건네준 절대악의 정수를 촉매로 이용하면 쉽게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두려웠다. 막상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가족들이 전쟁에서 귀환하지 못했을까 봐.
카이엔은 그 부분을 정확히 읽었다.
“겁이 나나?”
“닥쳐! 누가 겁이 난다고 그래?”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다. 로드라는 호칭에 걸린 명예가 흙을 뒹구는 벌레보다 못하다면 지키지 않아도 좋다. 거기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
카이엔이 포탈을 열어 던전을 나갔다. 그곳에 남은 것은 볼카누스와 준뿐이었다.
“어쩔 생각이지?”
“으음…….”
볼카누스의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는 금방 결정을 내렸는지 카이엔을 따라 포탈로 들어갔다. 준도 같은 방법으로 던전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볼카누스와 카이엔 두 존재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향에 다녀오겠다.”
“잘 생각했다. 결과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한 종족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지.”
“시끄러워! 금방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묏자리 잡아 놓고 얌전히 기다리도록.”
볼카누스는 화끈한 성정답게 곧바로 차원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엄청난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안식처 안에 전류를 만들어 냈다. 전류가 튀는 소리와 함께 한가운데에 커다란 포탈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네 안식처는 내가 지키고 있겠다. 걱정 말고 다녀오도록.”
“흥. 도둑질이나 하지 마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평소였다면 당장 레어에서 꺼지라고 으름장을 놓았겠지만, 그는 카이엔이 이곳에 머무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락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준은 그 두 존재의 변화에 미소를 지었다.
포탈이 진한 푸른빛을 띠며 점점 완성되고 있었다. 이번엔 준이 말했다.
“혹시 부상당한 드래곤이 있다면 데려와도 좋다. 내가 깨끗이 치료해 줄 테니까.”
“누구 비늘을 또 뽑으려고?”
“안 뽑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데려와라.”
볼카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포탈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를 삼킨 포탈은 순식간에 수축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철혈의 대공답지 않게 감상적이군. 적에게 자비를 베풀다니.”
“이게 자비로 보이나? 은퇴하더니 감이 많이 죽었군. 지켜야 할 존재가 남아 있다면 그 어떤 존재든 약해질 수밖에 없다. 생에 집착이 생기거든. 그렇다면 볼카누스와의 일전은 더욱 수월하게 풀리겠지.”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은데? 왠지 내 눈엔 너희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싸울 생각이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럴 리가.”
“아니면 말고.”
피식 웃은 준이 왕진 가방을 들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엔은 조용히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 * *
준은 진료소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대기실에 환자가 많았다. 루치아가 꽤 고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준은 즉시 진료실로 들어가 백의를 걸쳤다.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예요?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말이에요. 특별 수당이나 좀 주고 가든가!”
역시나 루치아는 불만을 표했다. 그녀는 넘어져 무릎이 찢어진 환자의 외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피가 흐를 정도로 꽤 심했지만, 루치아가 펼치는 치유 마법에 빠른 속도로 상처가 아물었다.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 진료에 집중해.”
“어? 잠깐! 거기에 든 거 암영초 아니에요? 설마 재배에 성공한 거예요?”
루치아는 준이 들고 있는 가방에서 암영초의 기운을 읽었다.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종이로 꽁꽁 싼 암영초를 책상에 올렸다.
암영초라는 한마디에 직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소식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그네스였다.
“정말이요? 잘됐네요! 이제 카누 씨를 완치시킬 수 있겠어요. 대체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이거 구하기 정말 어렵다고 들었는데요.”
“볼카누스와 카이엔이 며칠 동안 고생해 줬다. 운도 좋았고.”
“나중에 따로 인사드려야겠네요. 지금 바로 가서 카누 씨 모셔올까요?”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진료부터 마무리해야지. 너도 루치아 선생 보조에 신경 쓰도록 해라. 이따 진료 끝나고 저녁에 카누 씨를 찾아가자. 준비하도록.”
“예. 선생님!”
신이 난 아그네스가 평소보다 경쾌한 걸음으로 대기실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 준은, 마리가 데려온 환자를 맞았다.
그렇게 특별한 문제 없이 오후 진료를 모두 마친 누아의 의료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로 암영초 때문이었다.
모든 불을 소등한 뒤 준이 종이를 벗겨냈다.
약초 배합용 테이블 위에 모습을 드러낸 암영초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마음껏 뽐냈다.
“와아!”
“세상에. 이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한답니까?”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투박하지만, 이렇게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약초는 처음이었다. 월영초보다도 훨씬 더 진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그네스가 물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약재로 만들죠?”
“마나를 이용해 가공해야 한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손을 대면 약효가 사라지지. 이번엔 잘 지켜보고 머리에 새겨라. 언젠가 쓸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아그네스는 아쉬워할 틈도 없이 모든 신경을 준의 손끝에 집중했다.
그는 암영초를 약재로 만들기 위해 특별한 도구를 준비했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룡의 이빨로 만든 칼이었다. 마룡은 흑마력을 잔뜩 품고 있는 존재라 암영초를 다듬는 데 가장 좋은 도구라고 생각했다.
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암영초에 칼을 찔러 넣었다.
싹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