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특이점 (2)
그날 저녁, 카이엔이 돌아왔다.
한참을 기다리다 깜빡 잠든 볼카누스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산책을 좀 했다. 날씨가 아주 좋더군.”
“추워 죽겠는데 산책은 무슨.”
“음? 혹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미친놈. 정신도 산책시키고 온 게야?”
볼카누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카이엔의 묘한 미소를 보곤 화가 벌컥 났다. 마치 네 속은 뻔히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용족의 로드가 솔직하지 못하군.”
“시끄러워!”
이럴 땐 화제를 돌리는 게 제일이다. 헛기침을 한 볼카누스가 능청스럽게 다른 말을 꺼냈다.
“진료소에는 별일 없고?”
“누군가 무책임하게 약초 공급을 끊는 바람에 약초 수급에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더군. 마이더스 상단을 통해서 약초를 구입하고 있는 탓에 적자 폭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크흠.”
내심 뜨끔했다.
카이엔이 레어에 머물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가 곤란했다. 혹시라도 그가 레어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요 며칠 같이 지내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믿음이 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카이엔이 다른 마음을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준과 아그네스가 있는 이상.
“그래서. 아까 했던 이야기는 뭐야? 재미있는 일 한번 해 보자며.”
“레어에 던전을 만들다 보니, 용족의 힘을 암영초 재배에 이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괴한 생각이군.”
카이엔이 손을 펼쳤다. 곧 동그란 검은 마력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암영초가 자라기 위해선 계속해서 암흑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 공급만 된다고 자라는 건 아니지. 모종의 ‘특이점’이 필요하다.”
“그게 뭔데?”
“쉽게 말해 일종의 씨앗이라고 할까. 종류는 다양하다. 암영초 파종의 방아쇠가 된다면 뭐든 특이점이 될 수 있지.”
볼카누스는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어렵고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인 그였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론만 말해 봐.”
“내가 정한 장소에 그대의 마력을 풀어 암흑 에너지를 끌어모을 생각이다. 마치 낚시를 하듯이 말이야. 그대의 에너지가 미끼가 되어 암흑 에너지를 유인하는 거지. 그래서 인위적인 특이점을 만드는 거다.”
“흐음.”
볼카누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방법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판단할 근거는 없다.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 방법이 신묘한 탓에 생각에 빠진 것이다.
“그러니까 물통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그쪽으로 암흑 에너지가 흘러갈 수 있게끔?”
“보기보단 머리가 나쁘지 않군.”
“흥, 용족의 로드인 몸이시다! 그 정도 잔꾀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지.”
“그래서. 협력하겠나?”
생각에 잠겼던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레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혀 다른 유형의 에너지가 아슬아슬하게 모이게 될 것이다. 만약 일이 틀어져 충돌한다면 그 파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네가 제시한 방법이 레어에 끼치는 영향은?”
“알 수 없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군. 두 상반된 마력이 충돌할지도 모르는데 과연 탈이 없을까?”
“문제가 생긴다고 별다른 방법이 있나? 지금은 이 방법이 최선인 거 같은데 말이지. 레어야 날아가면 다시 만들면 그만이잖나.”
“허, 지 레어 아니라고 막말하네?”
특별히 모아 둔 귀중품도 많이 없고, 임시로 지은 레어니 날아가도 크게 문제는 없지만 누아 마을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볼카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계획을 세운 카이엔도 가만히 넋 놓고 구경하진 않을 테고.
“돌팔이한테 미리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바쁜 사람 괜히 붙잡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게 좋지.”
“좋아. 해 보자.”
“그럼 바로 가자.”
카이엔이 던전 코어에 손을 댔다.
우웅!
흑마력의 파장이 일어나며 한쪽에 포탈이 열렸다. 그렇게 두 초월자는 포탈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것은 던전 마스터의 권능 중 하나였다. 던전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능력.
그렇게 두 초월자는 사방이 어두운 한 공간에 내려섰다.
“이곳이 바로 내가 선택한 지역이다. 암흑 에너지가 모이기 아주 적당한 곳이지. 대단하지 않나?”
카이엔은 자부심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마계와 매우 흡사한 곳이었다. 분위기든 형성된 마력이든 말이다.
용족인 볼카누스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간이 자신의 레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두 배는 더 안 좋아졌다.
일단 그가 주변을 살폈다.
굉장히 음습하고 어두컴컴했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겁에 질리거나 미쳐 버렸을 것이다.
“굳이 내 마력을 이용하지 않아도 암영초가 무더기로 나올 것 같은 곳인데?”
“네 마력은 촉매의 역할을 한다.”
“어려운 말 좀 쓰지 말라고.”
카이엔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볼카누스가 그 뒤를 따랐고, 곧 토양이 형성된 지점에서 카이엔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네 마력을 집어넣어라. 크기는 인간의 눈알 하나 정도 크기가 좋겠군.”
“잔인한 새끼. 상식적인 비유로 해봐.”
“이 정도다.”
볼카누스는 카이엔이 엄지와 검지로 만들어 낸 동그라미를 참고해 자신의 마력을 구체로 응집시켰다. 웅혼한 드래곤의 마력이 꿈틀거렸다.
“다음은?”
“저기 흙 한가운데에 집어넣어라. 깊이는 두 뼘 정도.”
“좋아.”
볼카누스는 잴 것 없이 바로 구체를 날렸다. 과연 용족의 로드답게 그는 카이엔이 원하는 지점에 정확히 마력원을 심는 것에 성공했다.
카이엔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성공했군. 이제 일주일 정도 기다리면 된다. 성공한다면 암영초의 꽃이 피어날 거다.”
“여러 개가 동시에 자라날 수도 있나?”
“물론. 어쩌면 보통의 암영초를 뛰어넘는 게 자라날 수도 있겠지. 네 마력이 섞였으니까.”
“그건 좀 기대되는군.”
“너무 기대는 하지 마라. 암영초가 아예 자라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성공적으로 완성된 ‘특이점’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던전의 암흑 에너지가 암영초 밭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 * *
며칠 후, 카누가 딸과 함께 진료소를 찾았다. 완벽에 가까운 치료 덕에 오히려 진단이 내려졌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오셨어요? 오늘은 좀 어떠세요?”
아그네스가 생글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카누가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서기관님 덕분에 무탈합니다. 이젠 기침도 많이 안 합니다.”
“병원에서는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아직은 견습이라서요.”
“그래도…….”
“그게 저한테도 편해요. 마음 같아서는 서기관 같은 거 그만두고 싶은데 선생님 고집이 워낙 세셔서. 아무튼, 부탁드려요.”
카누는 어색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데스크에서 접수를 하고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운 좋게도 대기 환자가 없었다.
준이 진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죠. 안색이 아주 좋으시네요. 기분은 어떠십니까?”
“크게 불편한 곳 없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전해 들으신 대로 중간 검사를 한번 해 볼 생각입니다. 전에 했던 스캐너 검사만 할 겁니다. 퍼진 암 조직이 얼마나 전과 달라졌는지 한번 살펴볼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님.”
그렇게 검사가 시작됐다. 아그네스는 슬라임 윤활제와 스캐너를 준비했다.
“아그네스. 이번엔 네가 핸들을 잡도록 해.”
“알겠습니다.”
“녀석.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럼요!”
혹시나 싶었는데 또다시 기회가 왔다.
아그네스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핸들에 슬라임 윤활제를 발랐다.
“그럼 검사 시작할게요. 불편한 곳 있으시면 바로 말씀하셔요.”
아그네스는 전에 준이 했던 검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한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특정 장기를 보기 위해 어떻게 핸들을 움직여야 하는지 이미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그녀였다.
“연습 많이 했구나.”
“헤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했어요. 자, 이쪽입니다. 선생님.”
“어디 보자.”
처음으로 살핀 장기는 위장이었다. 한구석에 암 조직이 선명히 보였다.
“처음 찍은 사진하고 좀 비교를 해 봐야겠구나. 영상을 불러와.”
“예.”
딸깍!
스위치를 조작하니 영상이 바뀌었다. 틈틈이 연습한 것치곤 능숙한 솜씨였다.
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화면이 바뀌었고, 준은 막대 자를 모니터에 대고 크기를 서로 비교했다. 정확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유추는 할 수 있었다.
“크기가 좀 줄었네요! 약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
“확실히 그렇군.”
아그네스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암영초가 없더라도 장기 생존이 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만간 조직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기능을 넣어야겠어. 일단 다른 곳을 계속 살펴보자.”
그렇게 아그네스는 최선을 다해 핸들을 움직여 시야를 확보했다. 암이 전이된 장기는 물론, 처음에 확인하지 않은 다른 장기까지 모두 확인했다.
덕분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긴 했지만 검사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카누 씨. 기뻐하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암 조직이 처음에 비해 꽤 작아졌습니다. 육안으로 관찰해도 작아진 게 뚜렷이 보입니다. 월영초의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큰 것 같군요.”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딸 엘레나도 거듭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준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암 조직은 여전히 그의 몸에 남아 있었으니까.
“아직 치료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닙니다. 약도 오래 쓰면 몸이 적응해서 효과가 크게 떨어질 수도 있지요. 지금처럼 관리 잘하시면서 꾸준히 약을 드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약은 전과 그대로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달라진 건 없으니 똑같이 탕약으로 만들어서 드세요.”
“예.”
카누가 딸과 함께 진료실을 나섰다. 아그네스는 약초 준비를 시작했고, 준은 오늘 진찰 내용과 소감을 빠짐없이 차트에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절로 암영초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카이엔에게 소식이 너무 없는데. 던전이 만들어진 지도 꽤 지났고. 역시 혼자서는 힘에 부치는 건가?’
만약 암영초를 구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암 조직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간은 좀 오래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루치아의 도움이 있다면 말이다.
차트 기록을 마친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카이엔 씨가 찾아오셨어요.”
“카이엔이?”
준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진료 시간이 아닌데?”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셔요.”
준은 바로 환자 대기실로 나갔다. 카이엔은 뒷짐을 진 채 고고히 환자 대기실을 거닐고 있었다.
“결과가 나왔나 보군.”
“그래.”
“성공했나?”
잠시 준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카이엔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준도 미소를 지었다.
“성공했군. 고생했다. 정말.”
카이엔이 전음으로 답했다. 주변에 환자들과 진료소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 문제라니?
― 엄청난 암영초가 자라기 시작했다. 마계 역사를 통틀어 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한번 가서 확인해 보겠나?
엄청난 암영초?
마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물건이라면 대체 어떤 것일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준은 곧장 진료소를 나섰다.